소설리스트

멸문가의 지표자-122화 (122/133)

122화

21장. 재회(1)

한동안 가라앉았던 반란군의 거점 기지에 활기가 돌았다.

“휴고!”

“제이드, 이것 참 오랜만이군.”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큰 천운이군, 천운이야!”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보기 드문 흥분한 모습으로 오래된 친구 휴고 우딘의 지친 몸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조금 전 새벽, 마다비아의 해안가를 통해 오랜 여정을 마무리한 후였다.

“부인, 오랜만입니다.”

“환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이드, 인사는 고맙네만 내 아내는 너무도 지치고 몸이 상했네. 이만 쉴 곳으로 안내 부탁해도 되겠는가?”

“이런, 내 마음만 너무 급했군. 자, 이쪽으로.”

제이드가 손수 우딘 부인과 그녀의 식솔들에게 쉴 곳을 안내해 주었다.

마다비아까지 길을 잡아준 반란군 넷은 이미 돌바닥에 널브러져 잠든 상태였다.

“작전 수행 일부터 한시도 쉬지 못했으니 힘들겠지. 저대로 내버려둠세.”

“좋은 포도주를 한잔 준비했어. 어서 마시게, 휴고.”

“고맙네, 친구.”

마음 같아선 휴고 우딘 역시 이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지만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제이드와 함께 동굴의 가장 가파른 절벽 위 회의실로 향했다.

그곳엔 홀로 앉아 돌 따먹기나 하던 데칸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손님이 오셨구만.”

데칸은 벌써 보름 넘게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피타와 헤리스도 함께였다.

길라와 인근 소영지에 대한 정보가 출중한 피타는 반란군 내 작전설계 부서에 머리를 보태고 있었고, 대기사 헤리스 타린은 반란군의 검술을 자문해주며 회복에 힘쓰고 있었다.

모두가 바쁜데 지난 십오 년이란 세월이 텅텅 빈 데칸은 무엇을 해야 할지도, 해야 하는지도 몰라 시간만 축내고 있었다.

“이만 자리를 비켜주지.”

결국 갈 곳이 없는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였다.

데칸이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그를 붙잡았다. 어차피 이곳에선 모두가 평등하게 정보를 공유한다.

“데칸, 자네가 들어도 문제없는 이야기란 소리지. 안 그런가, 휴고?”

“당연히 누구나 들을 권리가 있지. 자, 앉으시오.”

두 사람이 손짓하자 나서려던 데칸이 흠흠, 괜한 헛기침을 하며 결국 자리에 도로 앉았다.

안 그런 척했지만 데칸도 휴고 우딘의 여정이 궁금한 참이었다.

“에드먼드는?”

제이드는 가장 먼저 에드먼드의 행방을 물었다.

“설마…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건가?”

“뭐?”

“에드먼드는 레온 공자를 모시고 그레이트 대협곡 좌측 숲으로 빠졌네만…. 그쪽이라면 폰네시 사잇길을 지나 밀항을 해야 하는 우리보다 반드시 일찍 도착할 거라 예상했는데 어째서.”

“레온, 레온이라고 했어요, 방금?!”

데칸이 속으로 셋을 쉬는 동안 마지막 카운트에 맞춰 헐레벌떡 피타가 들이닥쳤다.

저 바닥 아래서부터 계단을 밟아 오르는 녀석의 뜀박질 소리가 다 들렸다.

“레온은 무사해요? 괜찮은 거예요?!”

처음 보는 사이에 인사도 생략하고 예의 없이 구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주제가 급했다.

제이드가 휴고 우딘에게 간략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피타는 친절하게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동안 발을 동동 구르며 레온의 안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답해줄 말이 영 좋은 쪽은 아니어서 미안하군.”

“예? …레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그분은 일행들과 함께 무사히 덴버그를 빠져나왔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문제지만, 그 정도 힘이라면… 아마 별일 없을 걸세.”

휴고 우딘이 반란군 대장을 돌아봤다.

“크라운 캐슬의 절반이 불탔네.”

이는 소식이 끊겨 더 이상 전달받지 못한 정보였다.

“…레온 공자께서 해낸 일이지.”

“공자께서?”

“설명하자면 몹시 긴 이야기가 되겠군….”

루시오가 남긴 정보와 반란군이 해낸 일, 그리고 덴버그가 받은 피해를 모두 설명하려면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휴고 우딘이 막 설명하려는 찰나, 데칸이 벌떡! 몸을 일으키곤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잠시만 기다려주쇼!”

“무, 무슨 일인가!”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한 명 더 있소. 그자가 이걸 놓쳐선 안 되지, 암! 그렇고말고!”

불현듯 떠오른 얼굴에 데칸이 뒷일도 생각지 않고 서둘러 회의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헤리스를 데리고 올 셈이로군.”

“…이젠 원수가 아니라 절친 같다니까요.”

“허허허! 두 사람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뭐, 무섭지도 않습니다.”

대관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휴고 우딘만이 영문을 모른 채 입을 다물었다.

***

이야기를 들을 만한 인물들은 모조리 둘러앉았다. 기대와 긴장이 만발한 얼굴들이었다.

휴고 우딘이 아득히 꿈꾸는 표정으로 기억 속 레온을 떠올렸다.

“그분은 불 속에서도 온전한 모습 그대로셨지.”

뭐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느낌이었다.

화마에 휩싸인 붉은 불꽃 사이로 푸르게 존재하는 레온의 모습은 아마 죽기 전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로를 무너뜨리며 하류 구역이 모두 물에 잠겼고, 그레이트 대협곡까지 호송선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네.”

반란군과 함께 준비한 작전 당일에 잭 가문 여식으로 나타난 몬데이어 공자의 소식은 이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일어난 며칠간의 상세한 기록은 누구에게도 전해 듣지 못한 상태였다.

“공자님의 활약으로 만인 앞에서 데로니스 그놈이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모습을 보였으니… 당분간은 그것만으로 위안 삼아야겠지.”

비록 목숨을 잃은 이들이 많고 반란군의 피해도 없는 건 아니었으나, 레온의 존재를 알리고 왕가의 꼴사나운 모습을 끌어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턱을 쓸었다. 과연, 요 며칠 데로니스 놈들이 조용하다 싶었더니 그만한 피해를 입었다면 그럴 만도 했다.

“참, 헤리스 경. 경도 알고 계셨소?”

제법 상세하게 이야기를 끝마친 휴고 우딘이 가슴 안쪽, 몰래 간직하고 있던 루시오 공작의 서신을 건넸다.

헤리스가 그것을 받아들고 유심히 살폈다.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오래된 종이는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불에 비춰 보시오.”

그가 탁자 위에 놓인 등불을 헤리스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헤리스가 둘둘 말린 종이를 아래위로 펼쳐들고 불빛 가까이 비췄다.

그러자 루시오의 정갈하고 힘 있는 필체가 보였다.

“혈족에 관한 이야기군….”

루시오는 반란군에게 레온의 비밀을 알려주려 하였다.

몬데이어 일가가 용의 혈족이었다는 것과, 그 힘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혈족에 관한 일이라면 루시오가 알고 있는 건 나도 모두 알고 있소.”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하나 여기 모인 모두가 헤리스 타린의 발언을 비웃지 않았다.

“적어도 그 친구와 난 오래된 그 종족 전쟁을 끝내기 위해 함께 애써왔으니.”

두 사람은 단순한 친구 관계 그 이상이었다.

삶의 고락을 모두 함께해온 인생의 동반자이자 최고의 파트너였다.

그런 두 사람의 마지막이 온갖 불명예와 오해로 얼룩지다니….

피타는 헤리스가 자책으로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선택을 되돌리고 싶어 한다는 것도.

“혈족의 힘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게 사실이오?”

휴고 우딘이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이번 작전에서 새로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지. 만일 그들이 혈족의 힘을 노리는 무리라면 이거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새로운 놈들이라니? 덴버그에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난 겐가?”

“그래, 검은 투구를 쓰고 있었지. 직접 겨뤄본 적은 없지만 전해 듣길, 마치 철갑으로 만들어진 몸 같다고 했어. 도저히 공격이 먹히질 않는다고.”

검은 투구!

모여 앉은 이들이 모두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바로 길라에서 폰네시의 포로들을 무참히 죽인 암살자 놈이었다.

“세력이 얼마나 끝도 없는지 조금만 늦었다면 우리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을 걸세.”

휴고 우딘이 아찔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고개를 저어댔다.

“레온이 혈족의 힘을 내보였으니 표적이 되었을지 모르겠군요.”

“이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유가….”

피타의 가정에 휴고와 제이드가 걱정을 이었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하던 헤리스가 검을 움켜쥐었다. 또 뒷일 따윈 생각도 안 하고 튀어 나가려는 기세였다.

데칸이 늦을세라 헤리스의 뒷목을 잡아챘다.

“이거 놔라, 데칸!”

“기사단장까지 했던 자가 대체 왜 이리 경솔한지, 원! 뜻을 모으고 움직이라고!”

“공자께서 위험에 처했는데 작전을 구상하고 계획을 정리할 때까지 언제 기다리지? 지금 당장 그레이트 대협곡을 거슬러 오르겠어!”

레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리아의 마지막 부탁을 지켜주기 위해 제가 무엇을 잃었는지 모른다.

헤리스는 매일 밤 그날의 선택을 후회했다.

“공자님을 구해야 해!”

루시오가 아닌 레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뒤돌았던 그 순간을 말이다.

만일 곧장 루시오를 지키러 달려갔다면, 그를 도와 전열을 가다듬고 제1요새를 무너뜨려 적들의 침입을 막기만 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레온을 이 지독한 땅에서 헤매도록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래, 에드먼드가 그쪽에 함께 있으니 이러고 앉아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순 없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반란군에게 있어 에드먼드는 루시오 공작만큼이나 중요한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루시오보다도, 레온 몬데이어보다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왕가의 마지막 후계자. 그 적법성을 이을 유일한 존재의 행방을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데로니스군이라고 그레이트 대협곡에 없으리란 보장이 없잖아요. 괜히 움직였다가 일행들의 동선을 알려주는 꼴이 될 수도 있어요.”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피타가 고개를 내저었다.

제이드 역시 반대 의견이었다.

“게다가 이번 수행 작전으로 잃은 반란군의 수가 너무 많아.”

그들의 희생 덕에 모두가 살아남았다. 당장 수색 작전에 투입할 만큼의 병력도, 여유도 없었다.

“…….”

“…….”

흥분했던 헤리스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검을 쥐고 있어도, 지키려 마음먹어도 공자에게 닿을 길이 없다.

그 공허한 표정을 한참 바라보던 데칸이 침묵이 내려앉은 테이블에 툭, 목소릴 끼얹었다.

“그럼 내가 한번 가보는 건 어떻겠수?”

이곳 마다비아 근방의 지리라면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반란군 소속도 아니니 병력의 희생 따위에도 관련이 없다.

데로니스군에게 붙잡혀봤자 마다비아의 자유인이니 얻어낼 수 있는 게 없다는 것도 중요했다.

“할 일도 없이 시간만 축내는 게 영 성미에 맞질 않아서.”

데칸이 쏟아지는 시선에 입을 불퉁히 내밀고 옆 목을 긁적거렸다.

“과연, 데칸이 그 일을 맡아준다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겠군.”

“…이런 적임자가 있었다니. 정말 큰 결단이오. 고맙소, 데칸!”

제이드와 휴고가 고마움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헤리스는 미간을 잔뜩 모으고 데칸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주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사람 표현 한번 고약하긴.

데칸이 그런 헤리스에게 손을 내저었다.

“고맙단 인사는 공자를 만난 뒤에나 하라고.”

“안 되겠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어요!”

“빠져라, 꼬맹이. 이 어르신이 간만에 생색 좀 내겠다는데 껴들지 마!”

“위험하다구요! 데칸은 검도 다룰 줄 모르잖아요?”

“그러는 너는 잘 다루고?”

“그야…!”

걱정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었다.

데칸이 손을 탁탁 털고 금세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참, 대장 양반.”

회의실을 나서기 전 데칸이 제이드를 향해 입술을 씰룩거렸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수?”

“무엇이든지.”

“좋아. 그럼 사람 한 명만 데려가겠수다!”

“사람? 누굴 말인가?”

클클클!

데칸이 거친 수염을 문지르며 손을 뻗었다.

회의실 옆 입구, 내내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통나무가 잡아끄는 그 힘에 못 이겨 거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 염탐꾼을 말이지!”

“날 왜!”

“몰래 엿듣고 뒤를 밟는 건 네놈 특기가 아니냐!”

고약한 재능이었으나 분명 이번엔 도움이 될 것이다.

데칸이 미소와 함께 쓰러진 통나무에게 손을 내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