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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23화 (123/133)

123화

21장. 재회(2)

어둡고 눅눅한 동굴의 긴 길을 지나 레온 일행은 벌써 오 일째 걷고 있었다.

초행길이라곤 해도 이처럼 속도가 안 날 줄은 몰랐다.

간헐적으로 발작하는 린의 두려움을 막아주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쉬었다 가야만 했고, 아직 체력 회복을 못 한 레온도 두 번이나 심한 고열을 앓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나와요.”

제노가 두려움과 긴장이 뒤섞인 목소리로 정면을 가리켰다.

예상치 못한 고난이 있었지만 결국엔 끝이 보인다.

에드먼드가 큰 결단을 내린 제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제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평생을 이런 빛도 없는 곳에 갇혀 살다 죽을 순 없었으니까.

“공자니이이이이임!”

지치지도 않는지 케인이 동굴 끝까지 정찰을 끝마치고 빠르게 달려왔다.

“이제 정말 다 왔습니다! 이 앞에 나갈 수 있는 빛이 보여요!”

워렌이 그에게 깨끗한 식수를 건네주었다. 어찌나 달게 마시는지 벨이 입맛을 다실 정도였다.

“제노, 네가 다녔던 길이 이곳이 맞니?”

메리의 인자한 목소리에 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쓰레기 산 주변을 잘 뒤져보면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이 운 좋게 떠내려 오기도 했다.

때때로 이곳에서 음식을 구했으므로 제노는 정확히 길을 알고 있었다.

“출입구를 빠져나가려면 좀 힘들 거예요. …꽤 비좁거든요.”

살펴보니 여리여리한 공자님이나 용맹한 벨, 그리고 갈색 머리를 가진 부집사 정도나 빠져나갈 수 있을 듯 보였다.

“나가서 제가 틈을 좀 벌려 보겠습니다.”

이 역할을 해낼 적임자는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브라운이 팔을 걷어붙이고 의지를 다질 때였다.

“내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브라운이 누구보다 도움이 되는 인물임은 틀림없지만 힘쓰는 일에 있어선 영 신뢰감이 없었다.

레온이 제 푸른 검을 살폈다.

용의 살기를 끌어 올리거나 불의 힘을 쓸 상태는 아니었지만, 다이아 스틸이라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브라운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몬데이어가 가는 길은 디카르테가 만듭니다!”

“그래, 그렇겠지.”

“제가 해볼게요!”

“아니야. 이런 일까지 네가 다 할 필요는 없어.”

“…맙소사, 그 정도로 제가 약해 보이세요?”

레온은 답하지 않았다.

브라운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절망적인 눈길에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확실히 비좁기는 하네.”

쓰레기가 얼마나 밀려왔는지 곧 있으면 좁은 출입구가 모두 막힐 것처럼 보였다.

레온이 쌓인 돌무더기를 밟고 겨우 빛이 드는 입구 쪽에 자신의 몸을 밀어 넣었다.

케인은 눈치껏 그런 레온의 다리를 붙잡아 주었다.

“공자님, 상황은 어때요?”

삐죽, 상체만 내민 레온이 주변을 살폈다.

서대륙의 곳곳에서 대협곡을 따라 밀려든 온갖 쓰레기가 주변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높이 떠 있는 태양마저 이곳을 비추지 못했다.

절대 넘어갈 수 없어 보이는 쓰레기 산은 고이고 썩어 끈적끈적하고 끔찍한 늪을 이뤘다.

“입구 쪽만 치우면 되겠어. 날 올려 보내줘, 케인.”

“예!”

레온이 손쉽게 비좁은 틈을 빠져나왔다. 곧이어 벨도 발을 털며 튀어나왔다.

제노와 브라운까지 겨우 나오고 나자 레온이 일행들을 뒤로 물렸다.

“검으로 찌를 테니 벗어나 있어.”

레온이 호흡을 다듬고 검을 뽑아 들었다. 평소의 가벼운 무게는 사라지고 살기 가득한 푸른 검은 이제 레온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해져 있었다.

‘…제발 말 좀 들어라.’

검 하나 들지 못하는 나약함은 원한 적 없다.

레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다스리는 동안 지켜보던 브라운이 레온에게 다가갔다.

“공자님, 제가 다이아 스틸은 못 건드려도 공자님은 만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동굴 내부에 있던 이들이 그 목소릴 곱씹었다. 지금 뭘 하겠다고?

“제가 도울게요. 그게 제 역할이잖아요.”

브라운이 뒤편에서 레온을 감싸 안고, 검을 쥔 레온의 팔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잘 지탱할 수 있도록 붙잡은 손길에 모든 게 한결 편안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에 맞춰 두 사람이 함께 입구에 들러붙은 쓰레기를 검으로 가르며 빈 공간을 점차 키워나갔다.

모든 걸 베어낼 수 있는 다이아 스틸이기에 너무도 손쉬운 작업이었다.

“다들 이제 나와!”

충분히 공간을 확보하고 뒤로 물러서자 가장 먼저 린을 품에 안은 에드먼드가 안정적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툭, 케인이 짐을 내던지고 곧이어 메리를 껴안은 채 모습을 비췄다. 늘 그렇듯 일행들의 뒤를 살피는 워렌은 마지막 순번이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조심히 제노에게 린을 건네준 에드먼드가 물었다.

브라운은 여태껏 등 뒤에서 레온을 감싸 안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났음에도 말이다.

“실례했습니다, 공자님.”

“괜찮아, 뭐.”

손등을 내려치고 호들갑을 떠는 건 공작가의 영애께서나 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브라운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검 하나 제대로 들지도 못했을 게 분명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여기부터는 확실히 내 구역이야.”

멀쩡한 언덕 위를 밟아 오른 에드먼드가 허리에 손을 짚고 주변을 살폈다.

쓰레기로 뒤덮인 이 거대한 규모의 산등성이는 마다비아의 안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제대로 된 길은 나 있지 않지만 이동만 할 수 있다면 오늘 내로 거점 기지에 도착이 가능했다.

“서두르자. 데로니스 놈들이라고 여길 모르는 건 아닐 테니까.”

“그래, 추적조가 여러 곳으로 나뉘어 우릴 찾아대고 있을 거야.”

일행들이 지체 없이 끈적끈적한 늪을 피해 발길을 돌릴 때였다.

레온의 근처를 서성이던 벨의 귀가 쫑긋거렸다.

-멈춰!

예민한 짐승의 귓가에 낯선 기척이 닿았다.

말릴 틈도 없이 벨이 아주 빠른 속도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모두 멈춰!”

골치 아픈 소통법이었으나 벨의 오감은 이곳에 모인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레온이 일행들을 멈춰 세운 사이 앞쪽에서 고통에 겨운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끄아아악! 이, 이 고양이 새끼가!”

낯선 음성에 워렌이 재빨리 검을 뽑아들었다.

케인이 메리와 린을 보호하는 동안, 상황 파악을 위해 귀 기울이던 에드먼드의 경계 어린 표정이 의아함으로 변했다.

“…통나무?”

“응…?”

갑자기 웬 통나무 타령이람.

일행들 모두 갑작스러운 상황에 긴장을 놓지 않을 때였다.

저 먼 곳에서 다시 한번 비명 소리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에드먼드가 레온의 손목을 붙잡았다.

“반란군이야! 우릴 찾으러 왔나 봐!”

“뭐라고?”

“가자! 이제 안전해!”

“야, 야! 천천히 가!”

***

해풍 가득한 자유 도시를 벗어나자 지독한 악취와 끈적끈적한 습기가 온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데칸과 통나무, 두 사람이 해안가를 지나 쓰레기 산 초입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하는 것 없이 바닥에 늘어진 사람이 많이 줄기는 줄었군.”

버려진 도시의 하수로를 따라 밀려들어온 쓰레기가 곳곳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너저분한 쓰레기 더미 사이로, 적어도 서너 사람은 항상 이곳에 모여 시간이나 축내고 있었다.

삶의 의지도 전혀 없는 벌레 같은 인간들이 말이다.

“마다비아도 변할 수 있는 곳이었어. 멈춰 죽어 있는 곳이 아니었던 거지.”

지난 십여 년 동안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유인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몰랐으면 모를까, 점차 나아가는 모습을 맛본 이상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었다.

“네 아이도 이런 세상에 살았다면 좋았을 텐데.”

“…….”

“돌이킬 수 없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어. …정말 진심으로.”

앞서 걷던 데칸이 그곳에 멈추어 섰다.

발밑에 차이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마음이 쿵, 굴러떨어졌던가.

“…구하려고 했어, 정말로. 네 아이만 내버려두고 도망친 게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얼어붙은 강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선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사람들을 부르러 갔지만 이미….”

“됐어, 통나무. 난 그저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야.”

아이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다 해도 살릴 수 있단 보장이 없었다.

너무 늦게 발견한 데다 지나가던 통나무가 반드시 아이를 구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어린아이를 위험한 곳에 내버려둔 제 잘못이 컸다. 데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누구라도 원망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할 이유밖에 남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데칸이 허망한 표정을 감추고 서둘러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과거의 일에 묶여 있을 때가 아니었다.

“공자 일행을 찾고 나면 에일이나 한잔하자고.”

“그렇담 서둘러 찾아야겠군.”

“그래, 협곡의 좌측으로 빠졌다면 저 쓰레기 산을 통해 올 가능성이 가장 크잖아?”

“흠, 내가 발이 빠르니 저쪽을 먼저 살펴보고 오겠어.”

“좋아!”

데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과 염탐이 주특기인 통나무는 발이 무척 빠르고 날쌘 사람이었다.

그가 높게 쌓인 쓰레기 능선을 타고 한참이나 앞서 나갔다.

먼 곳에서 발걸음을 재촉하던 데칸도 늦지 않게 그 뒤를 따르며 주변을 예의 주시할 때였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튀어 올랐다.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주 빠른 속도였다.

“끄아아악!”

“토, 통나무!”

미지의 생물체가 금세 통나무에게 달려들어 그의 어깨를 공격했다. 데칸이 달려가다 쓰레기 더미를 밟고 나자빠졌다.

“이, 이 고양이 새끼가!”

“고양이라고?!”

덩치가 일반 고양이에 비하면 적어도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몸집이었다.

데칸이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쓰레기 속을 열심히 헤집으며 통나무에게 다가갔다.

그 곁엔 늠름하게 네 발을 딛고 서 있는 정체불명의 짐승이 있었다.

으르르르르르!

“통나무, 괜찮나? 이런… 상처가 제법 깊은데.”

두 사람은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목 깊은 곳에서 울리는 위협은 등에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게 만들었다.

시작부터 난관이라니. 돌아갈 수도, 그대로 벗어날 수도 없는 상황에 데칸이 입술만 깨물 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발소리에 녀석이 냉큼 뒤로 돌아 사라졌다.

“기회야! 어서 도망가지!”

“으윽! 저 고양이 새끼!”

“이리 오게, 통나무!”

데칸이 서둘러 통나무를 부축하고 일어설 때였다.

높은 능선 뒤편에서 누군가가 재빠르게 뛰어내렸다.

털 뭉치의 습격을 받은 직후라 두 사람이 끄악! 비명을 내지르며 나자빠졌다.

“통나무!”

“…이, 이 목소린… 에드먼드?!”

“누구라고? 에드먼드?”

에드먼드가 뛰어내리느라 잠시 품에 안았던 레온을 내려주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갑작스레 나타난 인물들을 살펴보았다.

“레, 레온 몬데이어?!”

찾아야 할 이의 인상착의라면 이미 전해 듣고도 남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작스레 하늘에서 뚝 떨어지다니?

데칸이 두 눈을 연신 비벼대며 정말 레온이 맞나 확인하려들 때였다.

뒤편에서 레온과 에드먼드를 찾아 달려온 일행들이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님.”

그리고 그중 가장 먼저 다가온 건.

“…너, 넌!”

데칸이 귀신을 보듯 입을 떡 벌렸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깨끗한 금발에 매서움을 담은 푸른 눈동자.

“…워렌 아니냐!”

제가 15년 전에 팔아넘긴, 그 소년이 서 있었다.

그것도 아주 완벽한 어른의 모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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