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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24화 (124/133)

124화

21장. 재회(3)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폰네시 최강의 병력인 침묵의 기사단 내에서도 워렌의 실력은 최고를 달렸다.

그는 루시오 몬데이어의 곁을 지키는 기사단장 헤리스 타린과 더불어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한 유능한 젊은 기사였다.

다만 그에 대해 알려진 건 많지 않았다.

낯선 외모에 낯선 가문, 영주의 명으로 지난 오 년간 엔드해 정찰을 나갔다는 것뿐, 관련된 정보는 현저히 적었다.

“글쎄… 아는 사이인 것 같기는 한데.”

“우리 폰네시에 오기 전에 알고 지냈던 인물일까요? 하지만 저분은 마다비아의 자유인 같은데….”

레온은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워렌이 마다비아 출신이라 말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부모 없이 그곳에 버려진 아이들이 으레 겪는 모든 고난과 역경을 다 짊어지고 결국 폰네시에 오게 되었다는 것도.

‘아마 그때 워렌을 팔아넘긴 사람이지 않을까?’

레온이 눈앞에 두 사람을 번갈아 살폈다.

이제 옆에 서 있는 중년의 남자보다 훌쩍 커버린 워렌은 묵묵히 정면만 바라본 채 서너 걸음 앞서 있었다.

“다시 만나게 될 줄 몰랐다.”

오기 전에 술을 몇 잔 마신 게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데칸이 뜨끈한 코끝을 훔쳐내며 빠른 걸음으로 워렌의 뒤를 따랐다.

“녀석, 말 없는 건 여전하구나! 어른이 말하는데 대꾸도 없고.”

어린 열 몇 살의 워렌은 이렇게 혼을 내면 마지못해 대답이라도 했었다.

알려주기 전까지는 몰라서 못했다 하더라도 알려준 이후부터는 착실히 따르는 타입이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어서 귀찮게 굽니까?”

“뭐? 이 녀석 아주 잘못 컸구나!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오며 가며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자신에게 늘 깨끗한 물을 주던 사람이었다.

처음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갔을 때 떠오른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그것 말고도 고약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이도 맞지 않는 귀족가의 막내아들 대신 훈련병 역할을 하기 위해 어린 자신을 팔아넘긴 납치범.

“주검이 되어 영영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

“그렇게 나타났어야 하나?”

새 삶을 주는 거라,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라 떵떵거리던 데칸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글쎄,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날 이후로 삶이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데칸은 겪지 않아도 될 감정을 느끼게 한 장본인이었다. 경험하지 않았어도 될, 유일하게 믿는 이에게 버림받는 그 기분.

“녀석아… 나는.”

“어차피 지난 일입니다. 당신도 나에게 지나간 사람일 뿐이고.”

“…….”

“그저 그뿐이지.”

더 이상 나눌 만한 대화가 남아 있지 않았다.

워렌의 단호한 태도에 데칸은 결국 그곳에 홀로 멈추어 섰다.

얼마 가지 않아 뒤를 따르던 통나무가 눈치껏 그를 앞질러 지나쳤다.

일행들 역시 사연 많아 보이는 데칸에게 혼자 있을 시간을 주었다.

“그래서 저 아이들을 동굴에서 데려왔다고?”

“그곳에 그냥 뒀다면 아마 얼마 가지 못했을 거야. 여자아이 쪽은 상태가 꽤 심각해.”

“이런… 우리 쪽 부상병도 많은 편이지만….”

“아이 둘쯤 더 거두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해선 안 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통나무가 에드먼드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곤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휴고 일행은 잘 돌아왔고, 예정보다 늦어지는 너희를 찾아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물론 데칸이 먼저 자원해 싫다는 저를 끌어들인 일이었지만, 지금 그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어 보였다.

통나무가 에드먼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기회를 노릴 때였다.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됐는지 데칸이 다시 일행들을 따라잡았다.

“다들 고생 많으셨수.”

“별말씀을요. 찾으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운이 생긋 웃으며 데칸에게 예의 있게 대꾸했다.

“꼴을 보아하니 여정이 편치만은 않았던 게야. 이쪽이 레온 공자인가?”

조금은 투박하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레온이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 곧장 씻는 게 좋겠군. 절친한 친구와 충직한 부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누가 날 기다리고 있어요?”

“참, 아직 소식을 못 들은 건가?”

그러고 보니 상황을 설명해야 할 때, 저 아기 맹수가 뛰어들어 타이밍이 엉망이긴 했다.

데칸이 흐뭇한 표정으로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함께한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들의 뚜렷한 목표와 간절한 명분은 곧 데칸에게 자부심 같은 게 되어주었다.

“길라의 후계자 피타 크루네가 기다리고 있지.”

물론 듣는 쪽은 반기지 않는 이름이었다. 피타가 어째서?

“걔를 애초에 반란군이 그냥 내버려 뒀다고요?”

“아, 이런…. 뭐, 자세한 이야긴 본인에게 듣는 게 좋겠군.”

총 소집령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그의 소식이 궁금하긴 했다.

어차피 반대 노선을 택한 놈이긴 했지만 말이다.

레온이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데칸은 눈치를 보며 아직 끝마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또….”

“또 누가 있습니까?”

먼저 말을 해도 괜찮은 걸까?

데칸이 머리를 굴리다 매를 맞아도 헤리스가 직접 맞는 것보단 자신이 대신 맞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막을 틈 없이 털어놓았다.

“그자도 기다리고 있지. 루시오 공작의 하나뿐인 친우”

비록 듣는 레온의 표정은 더욱 굳었지만.

“기사단장 헤리스 타린이!”

***

마다비아의 반란군 거점 기지.

해안가를 따라 깊게 침식된 동굴 안쪽엔 반란군의 거주지가 마련돼 있었다.

일행들은 많은 환영에 무사히 그곳에 입성했고, 에드먼드는 이번 작전으로 얻은 정보를 보고하기 위해 바쁘게 회의실로 사라졌다.

“공자님, 잠시 쉬고 계세요.”

브라운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휴고 우딘을 만나 안부를 물어야 했고, 반란군의 규모와 현 상태에 대해서도 확인이 필요했다.

“도련님 씻으시겠어요?”

“응, 혼자 충분하니까 메리도 돌아가서 쉬어.”

“그렇잖아도 린을 돌봐줄 사람이 좀 필요한 것 같아서 다녀오려구요.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될까요?”

“벨도 있고. 난 괜찮아.”

무엇보다 이제 스스로를 지킬 정도의 힘은 되찾은 상태였다.

레온이 메리와 일행들을 내보내고, 임시 거처에서 옷을 풀어냈다.

오랜 여정으로 상태가 말이 아니다. 레온이 도망가는 벨을 붙잡고 뜨끈한 물속에 파묻혔다.

“…….”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이곳에 헤리스 타린이 있다니.

“…그자를 죽이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물에 홀딱 젖은 벨의 투명한 눈동자에 레온의 모습이 비쳤다.

헤리스는 보름 전쯤 이곳에 도착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반란군의 검술 자문을 맡고 있다고 했다.

루시오 몬데이어를 끔찍이 생각하는 그들로선 의도를 알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만나보면 알 수 있겠지.’

모든 준비가 끝나면 결국 그자를 만나야 할 것이다.

레온은 벨과 함께 물속에 한참 잠겨 있다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며칠간 미뤄둔 피로감과 아직 회복하지 못한 고통이 물씬 밀려왔지만, 그보다는 배신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싶단 마음이 더욱 컸다.

뜨거운 물속에서 빠져나와 레온이 준비된 옷을 갖춰 입었다.

알아서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 벨이 얌전히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공자님, 워렌입니다.”

안에서 기척이 들리자 줄곧 대기 중이던 워렌이 상황을 알렸다.

“헤리스 타린이 와 있습니다.”

헤리스는 긴장으로 뻣뻣해진 주먹을 몇 번 움켜쥐고 석문 앞에서 호흡을 골랐다.

곁에 서 있는 워렌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가 배신자라 손가락질해도, 말도 안 되는 오해로 얼룩져 제 명예가 엔드해에 가라앉았다 하더라도 중요한 건 오직 몬데이어뿐이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졌다. 그는 처음 검을 쥐었을 때보다 지금 더 손끝이 떨린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 죄지은 자의 감정 따위는 드러내선 안 되는 것이다.

헤리스가 그토록 찾아 헤맨 레온 몬데이어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공자님.”

문 앞엔 어느새 피타 크루네도 다가와 있었다.

레온은 루시오가 가장 의지했을, 그러나 가차 없이 뒤돌았을 그들을 매정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의 하나뿐인 주군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헤리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에 대해 변명하지 않았다.

항변하고 오해를 풀 마음조차 없었다.

“그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제 피에 새길 영원한 죄목입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주군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등에 직접 칼을 내리꽂진 않았지만, 루시오가 자신 때문에 적들에게 심장을 내어준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헤리스! 당신은 주군을 배반한 게 아니잖아요.”

이야길 듣고 있던 피타가 끼어들었다. 이런 오해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왜 설명하지 않아요. 당신이 마지막까지 주군의 곁에서 그분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는 걸 왜 말하지 않는 거냐고요!”

지금껏 변명하지 않고 기다린 건 죽은 루시오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버텨왔는지 알고 있었다.

피타가 꿇어앉은 헤리스의 무릎을 살폈다. 다시 또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 이젠 정말 못 걷게 될지도 모른다.

“레온!”

“그만해, 피타.”

이건 누구도 대신 해명해줄 수 없는 일이다.

헤리스는 용서받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다.

이제 레온 역시 헤리스의 무릎을 보고 있었다.

벌어진 상처는 여전히 심각했고, 영영 나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헤리스가 제 상처를 돌보겠다고 마음먹기 전까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주군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것만큼은 변하지도 않고, 벗어날 수도 없는 현실이다. 루시오 몬데이어는 이 세상을 영영 떠났다.

매일 아침 깨어나 그가 없는 세상에서 눈 뜨는 게 지옥 같다. 할 수만 있다면 죽음으로 이 고통을 끝내고 싶었다.

지켜야 할 사람을 지키지 못하고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현실만이 제 목을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건 루시오가 남긴 마지막 부탁 때문이었다.

헤리스가 루시오에게 받은 제 보검을 꺼내들었다.

그러곤 지금껏 억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며 손끝에 검기를 실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이제 제가 당신을 새로운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루시오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레온 몬데이어는 지켜내야만 한다.

“나의 오랜 친구가 부탁한 것을 이루기 위해 나의 전부를 걸고 당신을 위해 싸우겠습니다!”

대기사의 검기가 레온에게도 전해졌다.

그의 절규가 레온을 집어삼킬 것처럼 밀려왔다.

본 적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소중한 것들을 떠나보내기만 했던 해주 시절의 자신과 닮아 있는 얼굴이었다.

당신은 무엇을 잃은 걸까. 무엇을 지키고 싶은 걸까?

“…….”

천천히 손을 뻗었다. 헤리스의 기세가 담긴 검은 레온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혈족의 힘이 레온을 보호했다. 레온은 뜨거운 그 검을 받아들어 헤리스의 목에 천천히 겨누었다.

“레온!”

피타가 달려들려는 걸 워렌이 막아섰다.

레온이 한참이나 말없이 헤리스를 응시했다.

“이제 다신 그 누구를 위해서도 살지 마세요.”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은 결국 차선이 될 뿐이다. 언젠간 반드시 버릴 차선.

“당신의 삶은 당신 거야.”

선택은 내 몫이며 그로 인한 감당 역시 홀로 해내야 할 일이다.

레온이 천천히 헤리스의 목에서 검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차피 남의 운명을 결정할 욕심 따윈 진즉에 버렸다.

하고 싶다면 하고 싶은 대로 그저 내버려 둘 뿐.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레온이 핏발 터진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헤리스에게 천천히 검을 건넸다.

늘 그렇듯, 선택권은 언제나 그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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