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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25화 (125/133)

125화

22장. 갈림길(1)

마다비아에 도착한 지 삼 일이 지났다.

그동안 일행들은 밀린 휴식을 취하며 새 출발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메리 부인! 치료용 약초 손질법에 대해 알려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메리는 대사제 대신 레온의 상처를 직접 돌볼 만큼 경험 많은 유모였지만, 전문적인 지식은 그 범위가 상당했다.

앞으로 여정에 더 보탬이 되려면 부지런히 배워둘 필요가 있었다.

“곧 갈게요. 린만 데려다주고요.”

메리와 함께 방을 쓰던 린이 방긋 웃으며 손을 뻗었다.

기력을 회복하니 상태가 부쩍 좋아졌다.

“데칸 아저씨가 엄청난 걸 만들었다고 어젯밤부터 난리였어요.”

“사실 내가 오늘 아침 슬쩍 보고 왔거든? 정말 대단하더구나, 린.”

“정말요? 기대해도 돼요?”

“그럼. 자, 이리 온.”

린이 메리의 품에 안겼다.

케인에게 체력 단련을 받던 제노가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내달렸다.

“제가 안을게요!”

“괜찮아, 제노. 훈련하다가 이렇게 막 달려오면 어쩌니? 저기 기사 케인께서 널 기다리고 있잖아.”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케인이 허리에 손을 짚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하나도 엄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린도 꽤 무거운데….”

“우리 벨 정도야 하겠니. 난 그 녀석도 하루 종일 안고 있을 수 있단다.”

“제노! 날 지켜주려면 검술을 배워야지. 자, 어서 가!”

“으음….”

모두가 반기지 않으니 별수 없다. 게다가 말없이 케인을 내버려 두고 온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제노가 머리를 긁적이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돌무더기 사이에 나다니는 크랩을 가지고 놀던 벨이 메리의 냄새를 맡곤 발치에 따라붙었다.

어깨에 매달린 린이 그런 녀석을 귀여워했다.

“데칸, 우리 왔어요.”

“아저씨!”

작업장 한편에서 밤새 작업물을 손보던 데칸이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입구로 달려왔다.

늘 불퉁한 표정의 데칸이지만 린과 제노를 만난 후 그의 얼굴도 많이 밝아졌다.

하는 일 없이 시간만 축내던 생활을 청산하고 녀석들을 돌보고 돕는 데 힘을 보태고 있었다.

“린, 이것 봐라!”

“우와… 이게 뭐예요?”

“쓸모없어진 수레를 이용해서 만들어봤지. 이것만 있다면 제노가 널 어디든 데려갈 수 있을 게야!”

반 토막 난 수레의 뒷바퀴를 이용해 데칸이 멋들어진 이동 수단을 만들어냈다.

점점 체력을 회복하고 있는 린을 평생 업고 다닐 수는 없는 일.

무게도 가벼운 데다, 짐을 보관할 수도 있어 여러모로 활용도가 좋았다.

“이제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 린.”

“정말…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린이 손을 뻗어 데칸을 꼭 안아주었다.

메리가 그녀를 이동 수단에 앉혀준 뒤 활짝 미소 지을 때였다.

“데칸! 메리!”

저 먼 곳에서 브라운이 손을 붕붕 흔들며 달려왔다.

그에겐 몸에 딱 맞는 맞춤 정복도 훌륭했지만, 마다비아 사람들이 입는 화려한 패턴의 자유복도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세 사람이 브라운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가 숨을 고르며 지체없이 찾아온 목적을 설명했다.

“공자님께서 모두들 모이시래요.”

에드먼드를 비롯한 반란군 주요 간부와 함께 레온은 지난밤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느라 줄곧 회의실에 있었다.

공통된 위험을 물리치고 바라는 목표를 되찾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쳐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브라운이 침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드디어 선택의 순간이 왔어요.”

브라운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기대감에 부푼 표정은 보는 사람마저 떨리게 만들었다.

“이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거예요.”

***

새로이 합류한 모든 인물이 뻥 뚫린 해안 동굴 회의실에 모여들었다.

먼저 자리하고 있던 레온의 곁엔 헤리스와 워렌이 있었고, 그 맞은편엔 반란군 대장 제이드와 에드먼드가 있었다.

브라운과 메리, 케인, 피타, 그리고 데칸까지.

모여야 할 사람들이 모두 나타나자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모든 사람은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소.”

그건 전쟁으로 전부를 잃은 반란군이 움직이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정하는 건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는 특권이지.”

제이드가 넓게 자리한 돌판 위에 가죽 결에 새긴 넓은 지도를 펼쳐냈다.

웨스트 아리아와 엔드해, 두 바다 사이에 위치한 서대륙의 규모만큼이나 커다란 지도였다.

“지난밤, 레온 공자와 우리 반란군은 대응할 적이 같다는 뜻을 모았소.”

톡톡, 제이드의 거친 손이 서대륙 내의 중심부, 수도 덴버그를 가리켰다.

왕의 거처인 크라운 캐슬이 위치하며 적의 세력이 응집되어 있는 그곳을 말이다.

“하일 데로니스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에 유례없는 혼란을 초래하고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지.”

레온이 제이드의 말을 경청하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쩌면 그들이 예측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천 년의 천 년 전, 그보다도 더 오래전부터 인어들은 사냥개들에게 라피스를 빼앗겨 왔으니까.

“그들은 다양한 세력으로 나뉘어 서대륙의 아주 깊은 곳부터 침투해 있어. 마다비아를 통제 불가능한 버려진 땅으로 만든 것 역시 그 흔적이지.”

그들은 철저히 세력을 양분하고 상하 관계로 삶의 우위를 나누었으며, 생명을 가차 없이 소모품으로 삼았다.

“추측컨대 동대륙과 서대륙에서 빈번한 아동 납치 문제에도 데로니스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오.”

케인의 턱이 단단해졌다. 그의 눈빛엔 경멸과 분노만이 남아 있었다.

“마다비아에 버려지는 아이들의 시신에서 이상한 공통점을 하나 확인했지.”

“모두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에드먼드가 말을 이어받았다.

“동굴에서 린을 발견했을 때, 틀어진 하반신 모양을 보고 직감했습니다. 더 이상 이 대륙만의 문제가 아니란 걸 말이죠.”

수많은 정보를 수집해 규칙과 연관성을 찾아냈을 테니, 반란군의 추측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나 놈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반드시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데로니스 쪽의 움직임이란 증좌는 있습니까?”

브라운의 질문엔 제이드가 답했다.

“시신들의 몸속에서 발견된 조각이 있지.”

제이드가 문 앞을 지키던 한 반란군 병사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가 단단한 철로 만든 수납함을 내려두었다. 누구도 건들지 못하도록 꽁꽁 봉인해 둔 입구는 분명 의심스러웠다.

“크기도 제각각에 균일하지 않지만 아이들의 몸속이나 주변부에서 이런 조각이 모두 발견됐어.”

제이드가 거친 가죽 장갑으로 손을 감싼 채 함을 열었다.

그 안엔 다양한 크기의 철 조각과 비슷한 것이 놓여 있었다.

“다이아 스틸이야.”

레온이 손을 뻗었다.

막아서려는 제이드의 손은 그보다 느렸다.

“괜찮아요. 전 다치지 않을 거예요.”

작은 크기만으로도 큰 위협이 되었지만 레온만은 위험에서 자유로웠다.

혈족의 힘이 레온을 보호하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다이아 스틸은 그보다 강한 힘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이건 다이아 스틸이에요. 아이들의 몸속에서 이런 게 나왔다면 놈들의 짓일 가능성이 높아요.”

데로니스 세력은 아주 오래전부터 라피스를 통해 종족의 힘을 초월한 생명력을 손에 넣으려 했다.

“용의 혈족을 노리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일 겁니다.”

드래곤과 혈족의 힘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다이아 스틸을 다룰 수 있게 만들었다.

타티아나의 기억 속 드래곤 밀라쿠는 그의 불로 다이아 스틸을 녹여내고 인간들이 다룰 수 있게 정제하기까지 했다.

밀라쿠의 몸속에 타티아나의 라피스를 넣었던 그 술사, 그가 데로니스와 관련이 있다면 놈들도 분명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터.

“놈들은 인간이 맞설 수 없는 힘으로 이 서대륙을 장악할 테고 머지않아 동대륙까지 넘볼 거예요.”

그런 놈들과 맞서 싸우려면 반드시 다이아 스틸이 필요하다.

“북부를 지켜야 합니다.”

자연의 비호 아래 버티고는 있지만, 놈들이 다이아 스틸을 다룰 방법을 알아내는 순간 그곳을 내버려 둘 리는 없다.

“하지만 공자님, 하일 데로니스, 그자 역시 다이아 스틸로 만든 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 맞아. 워렌.”

놈과 맞서 겨뤄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확신에 일행들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놈들에게 맞설 유일한 무기 역시 놈들의 손에 있다니.

“하지만 놈들은 혈족의 심장을 찾아 헤매고 있어.”

타티아나의 기억 속에서 엿본 과거는 그러했다.

바다에 가라앉은 해주의 기억 역시 그걸 확신하게 만들었다.

400년 후에야 겨우, 놈들은 다른 방식으로 다이아 스틸을 손에 넣으니 말이다.

“놈들은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어. 겨우 흉내는 냈겠지만 그걸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겠지.”

다이아 스틸을 이겨내기 위해 라피스를 운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레온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었다.

“아직 기회는 우리에게 유리해.”

모든 사실을 밝힐 순 없지만 라피스와 다이아 스틸, 그리고 혈족의 힘을 모두 손에 넣은 자신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레온이 돌판 위에 푸른 검을 내려두었다.

기력을 회복하자 그곳에 어려 있던 탁한 살기도 모두 거두어졌다.

“혈족의 비밀을 알아내야 해.”

결국 그 비밀이 다이아 스틸을 손에 넣도록 만들 테니.

레온이 헤리스를 돌아봤다. 그는 루시오가 남긴 관련된 정보를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정보는 주군께서 자뎅에게 비밀문서로 넘겨주었습니다.”

“자뎅?”

“저와 루시오의 오랜 친구로 제 고향 슐츠에서 정보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반란군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주군께선 모든 비밀을 짊어졌을 경우 목숨이 위태로울 것을 우려해 우리 두 사람,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들에게 비밀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과연, 모든 일에 대비가 철저한 분답군.”

다소 골치 아픈 이야기였으나 비밀문서의 행방을 모르는 것도 아니니 감내할 만한 현실이었다.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에드먼드를 살폈다.

몬데이어의 비밀이라면 트레톨라 왕가의 후계자인 에드먼드 쪽도 짊어지고 있었다.

“모든 건 큐어 가문 소유의 영지 산속에 보관돼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큐어 가문이라면….”

“서부 이그리아에 가야 한단 소리죠. 어머니의 고향인.”

반역이 있던 날 크라운 캐슬을 떠나며 왕세자비는 무참한 죽임을 당했다. 아니, 모두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당시 군 사령관이던 제이드가 상황을 대비해 겨우 그녀를 구출해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많은 것을 잃은 후였다.

그 안엔 왕가에 전해져오는 방대한 역사의 기록과 정보도 포함이었다.

“어머니의 일기 중에 그곳에 중요한 문서들을 모두 보관해두기 위해 여정을 떠났던 날이 기록돼 있어.”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어. 직접 부딪혀 봐야지.”

모든 대화를 경청하던 브라운이 생각에 잠겼다.

이제 해야 할 일의 윤곽이 잡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또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슐츠의 자뎅을 찾아가 다이아 스틸을 다룰 수 있는 혈족의 비밀을 알아낸 뒤, 이그리아에 남아 있는 트레톨라 왕가의 정보까지 손에 넣으면 됩니다.”

간단한 일처럼 느껴지지만 두 곳 모두 주요 적지였다.

게다가 모든 비밀을 알아냈다고 해서 다이아 스틸을 바로 다룰 수 있게 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동대륙에도 다이아 스틸에 대해 아는 이들이 있어.”

“그게 정말이에요, 공자님?”

“응, 확실해.”

바다 아래 묻힌 기억 속엔 그와 관련된 미래가 남아 있었다.

‘후대엔 동대륙인들이 정제수를 통해 다이아 스틸을 녹여냈어. 지역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레온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이내 목적지를 정했다.

“산성이 강한 호수.”

그런 곳이라면 단 한 곳뿐이다.

“블레이드 호수.”

“블레이드 호수라면… 워터로드에 있는 거대한 호수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래, 브라운. 그곳 주변을 조사하다 보면 방법을 아는 이가 있을지도 몰라. 없다면 우리가 알아내야 하고.”

놈들이 종족을 초월한 모든 능력을 손에 넣기 전에 다이아 스틸만큼은 반드시 아군의 것이 되어야 했다.

“놈들은 원하는 만큼 힘을 얻기 위해 앞으로도 수많은 생명을 무자비하게 죽일 거야.”

그 안엔 알 수 없는 이유로 납치된 어린 인간족도 있을 테고, 넘치는 생명력을 빼앗기 위한 인어족도 있을 것이다.

또 넘볼 수 없는 힘을 얻기 위한 드래곤과 그의 혈족도 포함돼 있었다.

모든 생명이 오직 한 세력만을 위해 희생되는 이 지겨운 굴레를 끊어내야만 한다.

‘난 절대 피하지 않아.’

어쩌면 이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400년 전, 이 세상에서 눈을 뜬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중한 것을 잃어간 불쌍한 영혼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부터 두 세력으로 나뉜다.”

결심한 레온이 손끝으로 넓은 지도를 가리켰다.

“서대륙과 동대륙.”

어쩌면 이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이 될 그 두 곳으로.

“선택해.”

레온이 푸른 눈으로 모두를 응시했다. 이제 선택은 일행들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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