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22장. 갈림길(2)
바다 향을 가득 머금은 해풍이 얼굴 위에 달라붙었다.
레온은 가만히 눈을 감고 온몸을 감싸는 바람을 느꼈다.
이제 태양은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그 아래 펼쳐진 바다를 빛에 잠재우려는지 뜨거움을 한껏 과시했다.
“…….”
길라에 가고 싶었다.
폰네시보다 더 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그곳에서 맞이하는 뜨거움을 맛보고 싶어서였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 그곳에서 차갑고 시린 심해 속에 살던 날을 보상받고 싶었다.
레온이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그토록 바라던 태양의 절기가 돌아왔고, 이제 엔드해를 발밑에 두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다.
‘기억이 잘 안 나.’
바다의 주인으로서 모든 걸 기억했던 지난날이 더 이상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크고 굵직한 중요한 정보들은 어렴풋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전부 파도에 잘게 부서져 사라졌다.
인어의 몸을 떠나 인간이 되어서일까?
그토록 오래,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누렸던 삶인데 어째서 이렇게 빨리 멀어진 걸까.
“…….”
잊고 싶은 기억들이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레온이 뻐근한 심장을 문질렀다. 그곳에 남아 있는 라피스가 지친 몸을 쉬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게 만들었다.
검은 투구를 쓴 인간들이 동족을 사냥하고, 라피스를 빼앗는 모습을 그저 뜬 눈으로 지켜보기만 했던 예전 날처럼.
‘이건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네.’
바다의 주인이었던 지난 삶은 그 모든 걸 기억에 깊이 새겨야 했다.
모든 바다를 기억하는 것.
해주의 메모리아 라피스를 지표 삼아 사냥개를 피해 다녀야 하는 후대 인어족을 위해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
레온이 발치 아래 펼쳐진 엔드해를 바라보았다.
마다비아의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올라 레온이 손을 펼쳤다.
‘내 손에 모든 게 있어.’
이제 놈들과 맞서 싸울 힘이 이 안에 있었다.
용의 혈족,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힘을 얻었지만 마다할 마음은 전혀 없다.
놈들을 죽일 수만 있다면 드래곤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공자님.”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뒤편에서 주춤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레온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케인의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예상한 대로 덩치 큰 케인이 쭈뼛거리고 있다.
“이리 와, 케인.”
오라고 말하지 않으면 그곳에 꼼짝 않고 서서 밤이 되도록 지켜만 볼 녀석이었다.
우울함에 골몰해 있던 것과 달리 비교적 산뜻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직은 어둠까지 내어줄 마음이 없었다. 혼자만 알고 지내도 충분한 이야기였다.
“저….”
마다비아의 해안 동굴 위쪽으로 한참을 걸어오면 뻥 뚫린 넓은 언덕이 있었다.
높게 솟은 절벽 위에 겨우 생명을 틔운 촘촘한 풀밭이었다.
정체가 발각될까 늘 조심하는 레온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새로운 여정의 출발이 하루 뒤로 다가왔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바다를 눈에 담고 싶었다.
“섭섭하지… 않으세요?”
케인이 언덕 끝에 걸터앉은 레온의 곁에 자리 잡고 물었다.
“…….”
케인은 레온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다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나 복잡한 감정, 그런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케인의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글쎄.”
케인은 피타, 데칸, 그리고 제노와 린과 함께 동대륙 행을 결정지었다. 블레이드 호수를 찾아 다이아 스틸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찾아 나서기로 한 것이다.
“내가 섭섭해하지 않으면 네가 섭섭해할 거란 것만은 확실해.”
이제 케인이 고개를 돌려 레온을 빤히 바라봤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코를 훌쩍이는 게 정말이지 감정적인 녀석이었다.
“…저를 완벽히 파악하셨군요, 공자님?”
“그래, 케인.”
이제 레온도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제게 필요한 덩치 크고 선하기만 한 젊은 기사를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넌 르테르 섬 출신이라고 했잖아. 동대륙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테니 그 여정에 적임자야.”
케인이 동대륙 출신이란 건 이번을 통해 알게 됐다.
그동안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털어놓지 않던 사람이라 알아둘 기회가 거의 없었다.
“제가 살던 곳은 본토와 좀 떨어진 섬이긴 하지만요.”
“그렇다고 했지.”
“예, 그래도 식견을 넓히러 우드로드로 견문 여행을 간 적이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어릴 때와 많이 달라지지만 않았다면?”
“그건 뭐, 지식이 풍부한 피타도 함께 가니 안심이 돼.”
“예?”
훌쩍.
크게 한 번 더 코를 들이마신 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의미세요, 공자님?”
“새겨듣진 마.”
“아니… 방금 저를 꽤 불신하신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레온이 걱정을 뒤로하고 케인의 듬직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모두를 지켜줘.”
“…예, 공자님.”
이 믿음직스럽고 착하기만 한 기사는 일행들을 지킬 유일한 검이 될 터였다.
모두 상대적으로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라 위험도가 적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엔드해를 건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데칸 씨가 뱃길을 잘 안다고 하니 다행이죠.”
“피타도 동대륙에서 유학한 적이 있으니 큰 도움이 될 테고.”
마치 이날을 위해 모인 것처럼 구성이 완벽했다.
레온이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하고 싶은 말이 더 남았지만 케인도 고개를 돌렸다.
“라리카에서 만나.”
“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게 영원한 이별은 아닐 테니까.
두 사람이 말없이 반짝이는 노을을 눈에 담았다.
***
반란군이 머무는 거주지 주변엔 돌담에 둘러싸인 해안 밭이 존재했다.
빽빽이 주변을 채우고 있는 키 작은 나무에 가로막혀 밖에선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존재감만큼은 확실했다.
바로 안쪽에서 키우고 있는 여러 허브와 약초들의 향기가 늘 근방까지 멀리 퍼졌기 때문이다.
“어머…! 저기 좀 봐요.”
“세상에… 어쩜 저렇게 멋있으실까.”
반란군의 치료와 회복을 돕기 위해 두 팔 걷어붙인 마다비아의 여인들이 황홀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엔 이곳 여인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레온 몬데이어가 서 있었다.
“우리 대륙의 제일가는 외모라 하더니 정말이네요.”
“저분과 함께 있는 그 기사분도 무척이나 멋있으시죠?”
“폰네시 사람들은 모두 잘생겼나? 오호호!”
“이거 왜 이래요? 우리 에드먼드가 제일이구만.”
못 들은 척하고 싶은데 너무 큰 목소리였다.
레온이 돌담에 기대어 메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도통 이런 역할은 제 몫이 아니었기에 쏟아지는 시선이 어색하기만 했다.
“도련님!”
약초 손질법과 수습법을 배우고 있던 메리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어찌나 급하게 왔는지 하루 종일 다듬은 버들가지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뒤따르는 벨만 바빴다.
녀석이 날카로운 이를 숨기고 메리가 흘린 것을 모두 물어왔다. 아주 강아지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데리러 왔어.”
“안 그래도 가려던 참이었어요.”
“오늘은 일찍 끝났네?”
“벨이 절 도와줬거든요. 어머머, 그것 이리 주렴, 아가.”
메리가 뒤늦게 벨이 꽉 물고 있는 버들가지를 받아들었다.
해독에 특효약이라는 귀한 재료인 만큼 다른 여인들에게 건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벨, 가서 린과 인사하고 와.”
레온이 발치에서 서성거리는 벨에게 말했다.
린은 벨의 목소릴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능력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게 두 친구 사이를 갈라놓을 이유가 되진 못했다.
벨이 기다렸다는 듯 날래게 달려 사라졌다. 말은 안 해도 벨 역시 서로 통하는 단짝이 그리울 것이다.
“이제 곧 떠난다고 이런 걸 받았지 뭐예요?”
“화관이네?”
“예, 꽃도 없이 약초로 엮어 만든 건데 의미가 있죠. 저분들이 그동안 제게 알려준 모든 약초가 담겨 있거든요.”
“많이 친해졌나 봐, 메리. 아쉽지 않겠어?”
조잘조잘 떠들어대던 메리가 레온의 뜻을 눈치채곤 미소 지었다.
“전 남지 않아요. 제가 도련님을 떠나 어디에 살겠어요?”
“하지만… 힘든 여정이 될 거야. 이전과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레온이 멈추어 섰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메리보다 자신이 더 했다.
그녀가 없는 삶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메리의 나이가 너무 많았다.
“나 때문에 위험을 자처하지 않아도 돼, 메리.”
그 한마디로 모든 걸 보상받았다. 메리가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도련님께서 여인이 될 준비가 완벽해지면, 더는 제 도움이 필요치 않겠죠.”
“…그런 이유라면 지금 당장도 밝힐 수 있어.”
“아뇨. 남을 위해 살지 말라고 말씀하신 건 도련님이세요.”
비밀을 눈치챈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남장을 한 레온을 홀로 보낼 순 없었다.
언젠가 밝혀질 일이라지만 그 전에 레온에게 알려줄 것들이 많았다.
“또 도련님 없이 이 삶을 쓸쓸하게 마무리 짓고 싶지도 않고요.”
이별이 머지않았음은 메리도 직감하고 있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기약 없는 끝을 그리워만 하다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얼마간 더 저를 돌봐주세요, 도련님.”
“…….”
“저 역시 남은 생 동안 도련님을 최선을 다해 지킬게요.”
메리가 손을 뻗어 멈추어 선 레온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자 깊은 안정을 느꼈다.
레온이 힘 있게 메리의 손을 잡아끌어 품에 안았다.
애교를 부린다거나 어리광 섞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행동에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숨길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딱히 숨길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알리기도 싫으신 거죠?”
“응.”
어째서 남자의 삶을 택했는지 설명하려면 상황이 꽤나 복잡해진다.
비밀을 밝히기 위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도 가늠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후, 언젠가 웃으며 모두에게 털어놓을 기회가 있을까?
나는 사실 레브 몬데이어의 몸을 빌린 한낱 인어에 불과하다고.
인어족의 복수를 위해 긴 세월 전부를 속여 온 거라고.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런 것 따위 상관없던 삶이 조금 더 후련했을지 모른다. 비록 그만큼 외로웠을지라도 말이다.
“도련님.”
“응?”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온이 팔을 흔드는 메리의 재촉에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에드먼드가 있었다.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 벽에 기대어 있는 모습이 한눈에 잡혔다.
“홍홍홍! 에드먼드 도련님!”
“메리, 레온.”
목을 거의 드러낸 자유분방한 셔츠 차림이 레온의 발걸음을 느려지게 만들었다.
메리가 옆에서 그런 레온의 팔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비음 섞인 그녀의 웃음소리는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우리 도련님을 찾아오셨어용? 오호호~ 제가 늦는 바람에 두 분의 만남이 늦어지셨네요.”
“날 빌미로 메리가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지금.”
“그것도 맞지만, 글쎄요. 전 우리 벨 밥을 주러가야 해서.”
“갑자기 무슨 밥이야? 그 녀석 지금 린을 만나러 갔잖아?”
“그럴 리가요. 오다 보니 방에서 구슬피 울고 있던걸요? 서둘러야겠어요.”
“뭐라고?”
왜 자꾸 시키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면서 빠져나가는 거지?
레온이 두 눈을 부릅뜨고 메리를 붙잡으려 했으나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메리의 손길이 무척이나 차디찼다.
에드먼드가 빠르게 사라지는 메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심히 가, 메리. 레온은 걱정 말고.”
“그럴 게 뭐가 있겠어요! 그럼 전 이만!”
“메리!”
다른 사람들은 그토록 경계하면서, 왜!
레온이 발을 쾅, 구르고 메리를 쫓아낸 에드먼드를 홱 노려봤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두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레온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화 다 냈어?”
“화 안 냈거든?”
“그래, 그럼 화가 풀릴 만한 걸 보여줄까?”
“글쎄, 화 같은 거 안 났….”
생각해보니 지금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레온이 입을 꾹 다물고 에드먼드를 올려다보았다.
여유 넘치는 여우 같은 에드먼드가 뒤편을 가리켰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네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내일이 지나면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지 모를 테니까.
“함께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