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22장. 갈림길(3)
바닷가 근처는 아무리 태양이 높이 떠 있는 절기라 하더라도 늘 축축한 바람이 불어댔다.
슬슬 해가 저물어 하늘이 아르테미스의 머리칼과 비슷한 색이 되어갈 때, 레온은 에드먼드를 따라 마다비아의 깊은 숲 쪽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가 없으면 모두 쫄쫄 굶고 말걸, 에드먼드.”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엔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기 위한 만찬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깜짝 놀라게 한다고 이틀 밤낮을 고생했는데, 눈치 없는 통나무가 헤리스에게 나불거린 탓에 미리 알게 되었다.
“늦지 않을 거야. 너와 단둘이 사라졌다는 구설수 정도는 감내할 수 있지만.”
“그런 거라면 내가 사절이야.”
“왜? 넌 레온 몬데이어를 사랑하니까?”
“야.”
아르테미스인 척하던 시절을 놀리는 말투였다.
레온이 제 키만큼 자라난 야생 수풀을 밀어내며 뒤편을 살폈다.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혼자 가다간 모든 일행들이 실종된 공자를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아 얌전히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아니면 못 보는 거라서 그래. 이제 다 왔어, 레온.”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이곳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봐야 하는 곳이라며, 조급하진 않지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까지 했다.
‘도대체 뭘 보여주려고.’
물품은 이미 정비했고, 남은 일정은 최대한 오래 휴식하며 체력을 아끼는 것뿐이었다.
언제 또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반란군과 만찬을 나누는 것 역시 중요한 일정이었다.
‘내 계획에 이런 산행은 없었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부탁하는 에드먼드에게 매정하게 굴 마음은 없었다.
자주 놀리고 곤란하게 만들긴 해도,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다 왔어, 레온.”
앞서 걷던 에드먼드가 나무 틈을 밀어냈다.
유연하게 벌어지는 틈 사이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드러났다.
에드먼드가 나무를 붙잡아주며 레온에게 손을 뻗었다.
아래쪽은 무척 미끄러운 곳이다. 그의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지고 싶진 않았다.
레온이 에드먼드의 손을 잡고 빈 공간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우와.”
레온의 입에서 아이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때?”
그곳은 마치 풀숲에 둘러싸인 작은 바다 같았다.
작게 나 있는 호수 주변을 뱅 둘러 가린 거목이 빛 하나 들지 않게 그곳을 가렸다.
주변은 온통 어두웠다. 작은 호수의 크기만큼만 하늘을 허용한 빽빽한 나뭇잎이 쏟아지는 별빛에 반짝거렸다.
“아름답지?”
새카만 호수에 하늘이 쏟아져 내렸다. 잔잔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수면이 그 빛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야.”
때로는 고개 들지 않아도 하늘이 보고 싶은 법이다.
에드먼드는 억지로 힘내고 싶지 않을 때 이곳을 찾았다.
좌절하고 힘이 들어 한없이 가라앉는 날에도 언제나 눈앞엔 반짝거리는 하늘이 있었다.
“꼭 보여주고 싶었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름다운 경관에 흠뻑 빠져 있던 레온이 되물었다.
“떠나기 전에 보고 싶던 거야?”
에드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일행들과 함께 서대륙 내부 주요 적지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대대로 왕비를 배출해낸 큐어 가문, 즉 이그리아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건 그들의 후손인 에드먼드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이거든.”
아주 먼 곳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어둠이 내려앉고 사람들이 불을 밝히면 이 바닷속 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사라지게 된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에드먼드가 말없이 레온을 바라봤다.
주변에서 풀벌레가 우는 소리와 이름 모를 새가 날아다니는 소리, 그리고 물이 흔들리는 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다.
바람에 보답하듯 레온은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꼭… 내가 살던 곳 같다.”
아주 오래전, 비슷한 광경을 마주한 적이 있다.
심해를 벗어나고파, 빛을 찾아가고파 수면 바로 아래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그날.
그 바닷속에서도 이런 아름다움을 맛봤었다.
“폰네시에도 이런 곳이 있어?”
에드먼드의 물음에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거짓말을 보태고 싶진 않았다.
“정말 아름답다.”
그래, 인어의 기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
그 시절에 살았던 나도 여전히 나였다. 레브의 몸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나.
레온이 그 사실을 알려준 에드먼드에게 환하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에드먼드.”
“…….”
오늘은 이 호수보다 더 반짝거리는 게 있는 것 같다.
에드먼드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반짝거리는 레온의 눈을 한참 바라볼 때였다.
“헤리스에게 큰코다치고 싶지 않다면 행동거지 똑바로 해먹는 게 좋을 거요, 망할 공자 양반!”
“데칸! 언행이 대체 왜 그 모양이에요? 너무 무례하잖아요.”
“뭐야앗? 어른한테 그 모양이라니. 네 말버릇은 어떻고?”
뒤편에서 불쑥, 낯선 인기척이 두 사람을 찾아왔다.
에드먼드가 후욱, 내려앉은 긴 앞머리를 불어 넘겼다.
풀 틈에 고개를 내민 데칸과 피타가 헤실거리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을 찾아오지 않으면 헤리스 경이 반란군 기지를 초토화시킬 것 같아서요.”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걱정할 만도 하지, 암. 또 찾아 헤매게 만들 셈인가?!”
“좀 닥쳐요, 데칸!”
“이놈이 자꾸!”
좋은 분위기를 말싸움으로 망치고 싶진 않다.
에드먼드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돌아가야겠다.”
“그래야겠지?”
다시 마주한 아름다운 기억을 벗어나고 싶진 않지만 하는 수 없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레온이 뒤돌아서다 말고 다시 그곳을 눈에 담았다.
모든 걸 마무리한 후, 이곳을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내 영혼을 위로할 수 있을지도.’
어쩌면 영원한 안식을 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레온이 전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발길을 되돌렸다.
***
만찬의 규모는 대단하지 않았다.
마다비아의 인구 유입은 이미 반란군이 제어하고 있지만, 아무도 몰래 적이 숨어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마을에 사는 자유인과 반란군들 중 해안가 기지에 머무르지 않는 이들 대부분은 레온 일행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조촐하지만 떠나는 동료들을 위해 정성껏 마련했소.”
레온과 일행들이 어디로 떠나는지 알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대한 조심히, 하지만 정성껏 준비한 만찬을 시작하며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손을 높게 들었다.
잔 안의 독한 포도주가 어둠을 집어삼킨 바닷물처럼 새카매 보였다.
“모두에게 엔드해의 축복이 머무르길.”
“머무르길!”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만찬이 시작되었다.
오늘을 위해 이틀 전 길라까지 가 포도주를 공수해온 반란군이 잽싸게 잔에 따라주기 시작했다.
“자, 몬데이어 공자도 어서 한잔 받으시오!”
“음, 글쎄. 난 괜찮은데.”
“이 여정의 주인공이 빠질 수야 있나. 자, 어서 받으래도.”
예전 언젠가 술을 마시고 된통 당했던 기억이 있어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권유였다.
하지만 레온도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다.
반란군 병사가 기대에 부푼 눈빛으로 바라보던 순간, 레온이 단숨에 포도주를 마셔 넘겼다.
“헤리스, 한잔 마실 텐가?”
벌써 얼큰하게 취한 데칸이 슬쩍 옆으로 다가왔다.
이 자리에서 누가 위험하다고 저리 고집스레 검을 들고 있는지.
“거, 너도 마실 테냐?”
게다가 똑같이 뻣뻣하게 앉아 레온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워렌도 마찬가지였다.
데칸이 철 밥통 같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을 흔들었다.
침묵의 기사 둘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공자님을 지켜야 하니 향만 맡겠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간.”
데칸이 쩝, 입을 다물고 그 가운데 앉아 있는 레온을 바라봤다.
“고생이 많수.”
“별말씀을.”
상황이 이렇게 되니 함께 마셔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레온이 데칸과 시선을 마주하고 다시 한 잔을 마셔 넘겼다.
“지금 날 지키겠다고 이러고 있는 거 맞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헤리스와 워렌의 대답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레온은 워렌이 기사단장의 숨겨둔 아들이란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융통성 없는 이 구황 작물 행동거지는 그에게 배웠을 것이 분명하다.
“둘 다 내 명령엔 복종하기로 했다.”
이 고구마 답답이들 사이에 있다간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
레온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나 두 사람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러곤 단단한 근육이 뭉쳐 있는 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미소 지었다.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어. 아주 거울이 따로 없네.”
헤리스가 뒤를 따르려 했지만 내리누르는 레온의 손힘이 제법이었다.
항변하려는 워렌까지 내버려두고 돌아서자 속이 시원했다.
레온이 둘 사이를 빠져나오자마자 먼 곳에서 브라운이 후닥닥 달려왔다.
“뭐야. 울었어?”
“아, 아닙니다.”
거짓말도 못 하면서 괜한 소리를 한다. 브라운은 울었는지 코끝이 새빨개져 있었다.
“케인이 떠나는 게 슬픈가봐?”
“그야… 정이 들었으니까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 누구보다 유능하고 똑똑한 브라운이지만 때로는 냉철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함께하던 동료가 떠난다고 눈물을 보이다니.
“금방 만나게 될 거야. 우리 모두 각자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낸다면.”
“맞습니다, 공자님. 제가 꼭 그렇게 되게 만들어야죠.”
“나 역시 그렇게 되도록 최선을 다할게, 레온.”
훌쩍거리는 케인을 토닥이며 피타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의 덩치 큰 기사는 눈물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피타.”
그러고 보니 여태껏 피타와는 제대로 말조차 나누지 못했다.
브라운이 눈치껏 케인의 뒷목을 잡아채 사람들 많은 곳에 뒤섞여 주었다.
어느새 레온의 곁엔 피타가 포도주와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
“…….”
달리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레온이 피타에게 잔을 마주 대었다.
“크루네 가문의 결단은 잊지 않을 거야.”
그들이 길라의 영지를 데로니스에게 넘겼다는 건 그 의미가 대단한 일이었다.
귀속된 모든 땅과 그간 그곳에서 쌓아올린 수많은 백작가의 권리를 전부 포기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글쎄, 영지야 책임져야 할 땅일 뿐이지. 아버진 그런 것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하셨어.”
“백작께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분명 아실 거야. 넌 몬데이어잖아. 아버지는 너의 영향력을 믿고 계셔.”
그간 누려온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피타는 레온을 믿고 있었다.
제 절친한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그런 놈이었다. 모든 이가 겁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선수범하여 앞서 나가는 선구자.
“우리의 미래는 너뿐이야, 레온.”
몬데이어의 힘을 믿고 나아간다면, 반드시 올바른 곳에 도착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피타와 레온이 잔을 맞부딪쳤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거야.”
레온도 그 의견에 동감했다.
사람들이 부르는 노랫소리, 그와 어우러지는 이름 모를 풀벌레의 울음소리.
음식을 굽는 매캐한 연기 냄새와 축축한 해변가의 바람까지 모두 잊히지 않을 것이다.
“라리카에서 보자, 피타.”
레온이 왁자지껄한 공간 속에서 고요한 평온을 느끼며 포도주를 마셨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