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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28화 (128/133)

128화

23장. 태양의 눈(1)

케인 일행은 새벽에 출항했다.

그들은 중간 규모의 배를 타고 반란군 몇을 더 태워 바다 상인으로 위장한 채 동대륙에 넘어갈 예정이었다.

데로니스군의 해상 병력이 훈련으로 웨스트 아리아에 집중되어 있었고, 물길을 잘 아는 데칸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동대륙까지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자, 우리도 이만하면 준비가 다 끝났다고 볼 수 있겠어.”

출발을 앞두고 에드먼드가 모든 일행들을 살폈다.

백마의 털을 엮어 만든 희끗한 가발을 뒤집어쓴 헤리스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는 메리와 함께 노부부가 되어 특별 농작물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상경하게 될 것이다.

‘내가 왜 또 이러고 있는 거냐.’

워렌과 에드먼드는 노부부의 장성한 형제로, 브라운과 레온은 그들을 따라나선 식솔로 분했다.

“저… 안 이상해요, 공자님?”

“그럴 리가 없잖아.”

“…이상하단 말씀이시죠?”

“당연하지.”

물론 여장을 한 채 말이다.

“진짜 못해먹겠네. 난 또 왜 이러고 있는 거야?”

군데군데 낡은 치마를 팔락거리며 레온이 불만을 표했다.

“이미 크라운 캐슬에서 드레스를 입고 나다녔잖아. 내가 또다시 여장을 하리란 건 그들도 이미 예상하고 있을걸?”

떠날 준비를 마친 일행들이 레온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일리 있는 항변이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아르테미스 잭으로 신분을 속였던 전적이 있으니 그들도 이제 성별을 가리지 않고 추적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 사실을 모르는 이가 더 많아. 적어도 슐츠와 이그리아에서 활동하기엔 그 모습이 더 편할 거야, 레온.”

“맞습니다, 공자님. 이번엔 눈동자도 가렸고 원래 모습과 더 거리가 있으니 한결 편하실 거예요.”

에드먼드와 브라운이 앞다투어 상황을 납득시키기 위해 애썼다.

레온이 제 눈을 가리고 있는 얇은 천을 매만졌다.

눈동자를 가릴 방법이 많지 않아 레온은 하는 수 없이 맹인인 척해야만 했다.

“도련님, 불편하진 않으세요?”

“…실눈을 뜨면 얼핏 보이긴 해. 이건 문제가 안 돼.”

어쩔 수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레온이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 여정 자체가 제게 머무는 혈족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였다.

일행들에게 불만이나 털어놓고 헛소리할 주제 따위 못 된다는 거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창피하다고.’

눈에 띄는 외모를 가려주기 위해 마다비아의 여인들이 무척이나 애를 썼다.

그들은 자유인 시절의 자신들을 생각하며 짧은 단발의 특색 없는 머리칼을 만들어 주었다.

역시나 말의 꼬리털을 엮어 뻣뻣하고 멋대로 이리저리 삐죽 튀어나온 가발이었다.

게다가 복장 역시 경험에 착안해 준비됐는데, 레온은 바지 위에 넓은 천을 치마처럼 두르고 어깨를 모두 드러내는 얇은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전부 마다비아 출신의 자유인들이 주로 입는 복색이었다.

“마다비아에 버려진 자매를 거두어 식구처럼 키운 자애로운 노부부 역할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좀 더 몸을 가렸다 뿐이지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의 브라운이 기세 좋게 레온을 위로했다.

그는 오랜 여정으로 자르지 못해 어깨 끝까지 온 곱실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고 있었다.

키는 레온보다 껑충 컸지만 모습에 변화를 주니 단정한 집사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여자 같진 않아, 브라운.”

“우기는 데 장사 없습니다. 결례를 범하면 벨이 코를 물어뜯어줄 거예요.”

앙!

이제 새끼 사자만큼이나 커다란 몸집이 된 벨이 그르릉거리며 레온의 발치에 고개를 비벼댔다.

“자뎅을 만나면 그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공자님을 도울 겁니다.”

가장 앞선 곳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헤리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거대한 정보상을 운영하고 있는 만큼 그에게 거는 기대가 많았다.

“적어도 공자님을 도울 방법 열 가지 정도는 준비하고 있을 거예요.”

워렌도 익히 아는 자였다.

그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두 기사까지 합세하고 나니 더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긴 하지만, 뭐.’

어차피 껍데기 속 영혼은 변치 않고 영원하다.

레온이 조금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다리던 일행들도 드디어 배에 올라타고.

“그럼, 출발해볼까?”

“예, 공자님!”

레온 일행이 엔드해로 나아갔다.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

“해류가 좋아. 이대로 더 남하해서 물살을 타면 될 거야.”

인어로서 바다를 누빈 시간만 영원에 가깝다.

짙은 심해 속이나 수면 위나 레온에겐 그저 익숙한 길이었다.

“그게… 느껴지세요, 도련님?”

일행들은 해상 거주민용의 떠돌이 배를 타고 해안가를 따라 슐츠로 향하는 중이었다.

메리는 물속에 잠시 손을 집어넣은 것만으로도 해류를 읽어낸 레온이 신기했다.

태어나 쭉 폰네시에서만 지내던 분이 언제 이런 걸 익힌 걸까?

표정에서 본심이 모두 읽히는 메리를 보며 레온이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아직 남아 있는 권위로 무시하면 그만이다.

“날이 흐려서 걱정이었는데.”

워렌, 브라운과 교대한 에드먼드가 레온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조금 전까지 노를 젓던 헤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풍랑법에 대해 배우셨습니까?”

레온, 아니 레브가 태어난 시절부터 곁에서 아이들을 지켜온 헤리스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알기로 가짜 공자가 된 후 레온은 그 어떤 학문도 익히지 않았다.

그저 놀고먹으며 매일같이 길라 여행이나 꿈꾸는 철부지였다고 생각했는데.

“학자 판틴에게 몇 가지 기본적인 지혜를 배운 적이 있어.”

“그자라면 공자께서 연못에 빠뜨려 내쫓지 않으셨습니까?”

“…레온, 네가 진짜 그랬다고?”

그런 모습의 레온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에드먼드의 진한 눈동자가 깜빡거렸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배움이 싫다고 모든 가신을 물리셨지 않습니까? 판틴이라면 소동이 있던 그날부로 영영 궁성을 찾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 영감탱이가 진짜.

“기사단장께서 아버지를 모시느라 기억에 오류가 있는 모양이군.”

“그럴 리 없습니다. 주군께서 분명 그 일로 속앓이를 하시는 바람에….”

“우욱… 에, 에드먼드 도련님. 뱃멀미가 심한가 봐요. 제 등 좀 두드려 주시겠어요? 우윽!”

레온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눈치 빠른 메리가 서둘러 헤리스의 말을 가로막고 에드먼드의 손목을 냉큼 꿰어냈다.

저 자존심 강하고 부끄러움 많은 공자께서 아직 낯선 이에게 치부를 드러내기란 죽기보다 싫은 일일 터.

대기사 헤리스와 앞으로 여정을 함께하기 위해선 이쯤에서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주어야 했다.

“이런, 기지에서 챙겨온 환약이 있어. 그걸 좀 씹어 먹으면 괜찮을 거야, 메리.”

“다정하기도 하셔라.”

다시 한번 오장육부를 끌어 올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메리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에드먼드와 함께 넓은 배 한가운데 마련된 목재 숙소로 향했다.

선미엔 이제 레온과 헤리스 두 사람만이 남았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악의는 없었다. 기억하는 게 중요해 다른 상황을 신경 쓰지 못했을 뿐이다.

헤리스가 레온의 권위를 깎아먹었단 생각에 재빨리 사과했다.

“됐어.”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일러주기엔 아직 서먹한 사이였다.

레온이 시선을 돌려 안개 속에 휩싸인 바다를 눈에 담았다.

찰박거리며 선체에 달려드는 흰 포말이 아주 가까이서 보였다.

“…….”

“…….”

얼핏 푸른 바다 위에 제 얼굴이 비쳤던 것 같다.

레온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지난밤, 피타에게 전해들었던 그간의 일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의심할 길이 없어.’

다만 무엇이 그를 이토록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들었는지는 궁금했다.

폰네시를 떠난 직후부터 헤리스는 단 한 번도 제대로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비단 겉으로 드러난 깊은 자상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매일 고통과 절규 속에 자신을 몰아넣은 채 채찍질하고 있었다.

“헤리스.”

“예, 공자님.”

“아버지가 부탁을 했다고 했지?”

그가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대륙 라리카로 가 술사 바네티오를 찾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공자님을 그곳으로 모시라는 마지막 명을 남기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순간에 곁을 지킨 거지?”

“…예, 부끄럽지만 주군 대신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런 이야길 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폰네시를 바라보고 있어.”

“…예?”

“그레이트 대협곡, 영지 맞은편 부근에 묻어 드렸거든.”

침울함에 빠져 있던 헤리스의 얼굴에 잠시나마 빛이 찾아들었다.

“비록 지금은 여러 곳에 나뉘어 있지만 이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반드시 우리 영면소로 모실 거야.”

그곳 역시 데로니스 놈들이 가만 내버려 두었을 가능성은 낮았지만 죽고 난 영혼은 이미 엔드해에서 자유로웠다.

그들을 기억하고 위로할 가족만 남아 있다면 그 어느 곳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니 자책은 그만둬.”

“…….”

“아버진 전부를 걸어 당신을 지켰어.”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에게 제 운명을 내맡겼다.

레온이 이제 시선을 돌려 헤리스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스스로 상처를 돌봐. 그건 남이 어찌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헤리스 타린이 습격의 날 무슨 선택을 했고, 어떤 후회를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의 선택을 종용한 마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자책으로 무너져가는 모습은 두고 볼 수 없다.

“당신은 진짜 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이야.”

헤리스는 메리와 더불어 레온이 처음 남자가 되던 날, 그날부터 운명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란 뜻이지.”

그게 헤리스가 다시 힘내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준다면 몇 번이고 그에게 되새겨줄 마음이 있었다.

레온이 툭, 마다비아의 여인들이 건네준 치료제를 던졌다.

“열갈퀴줄기로 만든 연고니까 제대로 상처를 돌보도록 해.”

기사가 되어 무릎이 그 모양이라면 균형도 잡지 못할 게 분명했다.

검은 온몸으로 휘두르는 무기였다. 한군데라도 몸에 이상이 생기면 온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루시오가 나를 살리고, 아가씨께서 나를 죽지 못하게 만드시는구나.’

그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모든 걸 얻었다.

그간 명예를 지키는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 기사 헤리스 타린은 레온 몬데이어의 곁에서 목숨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게 레온의 목숨이든, 아니면 헤리스 타린의 목숨이든.

“감사합니다, 공자님.”

헤리스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뜨거움을 삼켜내고 곧장 제 무릎을 돌보기 시작했다.

고약한 모습으로 어긋난 뼈를 바로잡고 짓무른 상처 위에 열갈퀴줄기 연고를 덧발랐다.

‘실천력 하나는 빠르네.’

레온이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점차 맑아져오는 하늘을 살폈다.

“가는 동안 아버지가 남긴 비밀에 대해 알려줘.”

“예, 공자님. 알고 있는 것 전부를 전….”

금세 기운이 난 헤리스가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잇다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다 말면 궁금한 법이다.

레온이 그를 바라보자 헤리스가 내내 가슴속에 품고 있던 가죽 뭉치를 꺼냈다.

“…헤리스, 그건!”

“죄송합니다, 공자님.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레온이 손을 뻗어 급하게 가죽 뭉치를 받아들었다.

그러곤 형형색색으로 잘 다듬은 부드러운 가죽 안에 둘둘 싸인 오래된 기록지를 살폈다.

“찾았다….”

그건 8년 전 그날.

새로운 신분을 얻었던 날 밤 적어두었던 바다의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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