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23장. 태양의 눈(2)
이 기록은 낯선 몸에서 눈을 뜬 첫날, 새로운 운명을 결정하며 적어두었던 바다의 기억이다.
‘이걸 다시 얻게 될 줄이야.’
그때는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완생을 앞두고 물거품 속에 잠겼는데, 인간 세계에서 눈을 떴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인어족의 불운을 막을, 두 번 다신 없을 기회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모든 기억은 영혼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앞으로 일어날 400년간의 일들이.
“적군이 아직 폰네시 궁성까지 진입하지 못했을 때, 공자님의 방으로 갔습니다.”
마주 앉은 헤리스가 그날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공자님의 비밀이 밝혀지면 안 될 것 같아 관련된 모든 걸 불태웠습니다.”
침실 내, 서재에 진입했지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류할 여유는 없었다.
여벌의 드레스와 여인의 몸을 가릴 만한 것들이 준비되어 있는 옷장은 물론이고, 레온의 흔적이 남아 있을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가신들을 내보냈던 것이 어제 일처럼 아직도 생생했다.
“그럼 이건?”
가죽 안에 둘둘 말린 기록지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데로니스와 검은 사냥개 놈들의 향후 움직임이 모두 이곳에 적혀 있다.
“오래 전부터 공자님께서 중요히 여기던 서권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공자님께서요.”
“그래서 따로 챙겨둔 건가?”
“예, 제가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건 그게 유일했습니다. 물론 내부는 열어보지 않았습니다.”
레온이 여인인 건 궁성 내에서도 단 세 명인 루시오와 메리, 그리고 헤리스까지 최측근만 알고 있는 크나큰 비밀이었다.
적군이 언제 폰네시를 점령할지 모르는 상황에 그 사실 만큼은 반드시 비밀에 부쳐야 했다.
영지를 빼앗기고 만에 하나 루시오가 목숨을 잃을 경우, 이 폰네시의 희망은 후계자인 레온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여자란 사실이 밝혀지면… 좋은 소린 못 들었겠지. 얼마간은 말이야.”
다시 폰네시를 되찾기 위해선 희망이 필요했다.
후계자가 사실은 여자였고, 그 비밀을 숨긴 채 남자 행세를 했다는 게 밝혀지면 영지민들과 주변 세력의 신뢰는 회복할 수 없다.
“당신은 나를 지킨 게 아니야. 우리 폰네시를 지킨 거지.”
비록 그 선택으로 절친한 친구를 잃는 끔찍함을 맛봐야 했지만.
“도움이 되어 다행이네요… 진심으로요, 공자님.”
레온이 그 안에 남은 기록을 손으로 쓸었다.
주로 검은 사냥개들의 움직임 위주로 적어놓은 기록은 앞으로 데로니스가 어떻게 움직일지 예측이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다 해도 그 흐름이 크게 어긋나진 않았다.
레온이 바다의 기억을 감추고 그 안에 함께 말려 있는 메모 하나를 살폈다.
어머니의 영면소에 다녀오기 위해 길을 나선 레브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 의해 납치당했다.
‘이건 내가 처음 레온이 되었을 때 발견한 기록이야.’
진짜 레온이 레브의 납치와 관련해 남겨두었던 글이다.
벌써 전생처럼 아득한 날이지만 여기 그 사건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가 있다.
“헤리스, 하나 물어볼 게 있어.”
“하명하십시오, 공자님.”
“레온이 죽던 날, 그 전쯤에 내가 납치되었다고 했었지?”
레온 몬데이어의 입에서 나온 그 익숙하고 낯선 이름에 잠시 헤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앞에 마주한 이가 사실은 공녀 레브 몬데이어란 것, 그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해 헤리스가 정신을 가다듬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줘.”
“…기억을 모두 잃었다고 하셨습니까, 공자님?”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뒤바뀌었으나 몸 안에 이전 기억 몇 가지는 남아 있었다.
유모 메리를 단번에 알아본 것과 그녀에 대한 감정, 그리고 루시오 몬데이어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따위의 어렴풋한 느낌은 인어의 기억에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납치되었던 날의 기억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때 느꼈던 충격이나 두려움도 전혀.
“어머님이신 공작 부인의 영면일에 맞춰 영면소로 가던 날이었습니다.”
일리아 몬데이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궁성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후로 불과 여섯 번의 절기를 맞이했을 뿐이다.
아직 어렸던 레브 몬데이어는 유독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영면일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잠들어 있는 영면소에 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아시겠지만 몬데이어 일가의 영면소는 궁성에서도 꽤 멀리 떨어진 곳이라 늘 침묵의 기사단이 아가씨의 호위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그건 주로 헤리스 타린이 도맡는 일이기도 했다.
사고로 일리아를 잃은 루시오의 걱정이 대단했다.
주군의 명이기도 했으나 일리아의 부탁으로 헤리스 역시 항상 레온과 레브, 두 아이들의 보호에 힘써왔다.
“보통은 제가 아가씨를 그곳까지 모셔다 드리지만 그날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오래도록 사랑해왔던 여인의 영면일이다.
그런 날, 그 여인의 아이와 함께 그곳을 찾을 만한 용기는 헤리스 타린에게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선택이 가장 먼저 헤리스의 목을 죄어오는 죄책감으로 돌아왔다.
“궁성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는데, 그때 침묵의 기사단이 급하게 복귀했습니다. 끔찍한 소식과 함께요.”
훈련에 몰두하고 있던 기사단장에게 보고된 건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영면소로 향하던 중 공녀가 납치되었고, 수색 끝에 발견한 아이가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침묵의 기사단이 즉시 복귀해 대사제가 레브 몬데이어를 살폈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날 이후 오래도록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 침묵의 기사들은 어떻게 됐지? 나와 함께 갔던 자들이잖아.”
그들을 언급할 때 헤리스의 미간이 좁게 찌푸려졌다.
“곧장 주군과 함께 놈들을 살폈지만 이상할 만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을 못 했다고?”
“예, 정신을 잃은 자들도 여럿이었고, 이유 없이 겁에 질린 놈들도 있었습니다. 개중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헛소리하는 놈들도 있었고요.”
수상한 일이다.
함께 있다가 납치까지 되었는데 기억을 못 하다니? 게다가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납치당했단 사실을 어떻게 보고한단 말인가.
“저희도 그 부분이 가장 의심스러웠습니다만… 궁성으로 돌아온 이후부턴 알아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 중 외부 첩자가 있었던 건 아닐까?”
“예, 주군께서도 그 상황을 가장 의심하셨습니다. 하지만 밝힐 길이 없었습니다. 결국엔 모두를 죽여야 했고요.”
그날 동행했던 기사들 중 현장에서 이미 시신으로 발견된 이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 중 일을 주도한 이가 있었을 거란 의심만 할 뿐 밝혀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루시오와 헤리스, 두 사람이 오래도록 그 일에 매달렸어도 말이다.
“다른 특별한 건 없었고?”
“글쎄요… 공자님께서 오래도록 곁을 지키셨단 것을 제외하곤 특별히 보고드릴 만한 상황은 없었습니다.”
“레온이 내 곁에 있었다고?”
“예, 삼 일 정도 그곳에 머무르셨습니다. 한시도 나오지 않으시고요.”
우애가 깊었다곤 하나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주변을 수색하고, 혐의가 있을 만한 기사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도 헤리스가 기억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확실히 이상한데.’
레온이 골몰했다.
진짜 레온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얼핏 머릿속에 남아 있는 잔상 같은 게 하나 있었다.
독 향료에 중독되어 정신을 잃었을 때, 꿈결 같은 환상 속에서 마주했던 상황이 아주 흐리게 기억났다.
‘내 곁을 지키는 레온이라면… 그날밖에 없는 것 같은데.’
생각에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날 그곳엔 다른 사람도 함께였다.
“내가 쓰러졌을 때 우리 궁성에 찾아온 다른 외부인은 없었어?”
오래도록 폰네시에 머물며 그런 사람은 본 기억이 없다.
잘 떠오르지 않아도 그에 대한 낯섦과 두려움 같은 건 남아 있었다.
“없습니다. 아가씨의 방에 드나들 수 있는 건 주군과 공자님, 단 두 분뿐이었습니다.”
기사단장인 헤리스 타린 역시 그 앞을 지키기만 할 뿐, 출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혹시 무언가가 떠오르신 겁니까, 공자님?”
“글쎄….”
선명하지 않은 기억은 금세 고통으로 흩어졌다.
‘그때 무슨 일이 있어서 내 영혼이 휘말려든 게 분명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날의 일을 밝히는 것보다 눈앞에 마주한 현실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언젠간 기억나겠지.”
“…그러길 바랍니다.”
헤리스는 그날의 사건이 일리아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 거라 의심했다.
두 사람이 한참이나 각자 바라는 것에 몰두하는 사이, 점차 배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다 온 모양이군요.”
먼 곳에서부터 서서히 눈에 잡히는 풍경은 오래도록 상상만 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도록 고향을 떠나 있었지만 나고 자란 곳이니 익숙함이 밀려들었다.
“다 왔습니다.”
헤리스가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먼 곳을 가리켰다.
태양의 축복을 받은 땅, 바로 슐츠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벨, 화내지 마.”
아르르르!
털을 빳빳이 세운 벨이 콧잔등을 잔뜩 찡그렸다.
“여기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와 떨어져서 너 혼자 찾아와야 해. 그럴 수 있겠어?”
낯선 곳의 낯선 환경이었다.
아직 아기인 벨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북부 짐승이 서대륙의 최남단까지 온 것만도 힘에 부치는 일이다.
홀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일행들을 찾아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니 어서 이 안으로 들어가. 내 말 들어.”
방금 전까지 기세 좋게 위협하던 벨의 꼬리가 힘없이 축 처졌다.
레온의 단호한 목소리에서 더 이상 고집 부려봤자 변하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벨이 킁, 콧김을 내뿜고 포대 자루 안으로 터덜터덜 발길을 옮겼다.
그 안엔 벨의 털과 비슷한 새하얀 껍질의 감자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검문소에 도착한 후엔 절대 움직이면 안 돼. 사람들이 널 빼앗아가는 걸 원치 않아.”
축 처진 벨의 귀가 쫑긋거렸다.
아직 너무 어려 왜 그런 걸 걱정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벨도 레온의 곁을 떠나는 건 원치 않았다.
‘사람의 모습을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레온이 힘없이 감자 사이에 자리 잡는 벨을 보며 생각했다.
설호족은 인간의 모습으로도 생활할 수 있는 수인족이다.
만에 하나 그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여정을 함께하는 게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준비 끝났나요, 공자님?”
“그래, 브라운. 서두르는 게 좋겠어. 이 안은 너무 덥거든.”
“출입 검문소까지는 금방입니다. 서둘러 길을 잡겠습니다.”
슐츠 출신의 헤리스 역시 마음이 급했다.
그가 워렌과 함께 서둘러 영지 출입 검문소 쪽으로 배를 돌렸다.
에드먼드가 두툼해진 감자 포대자루를 슬슬 쓰다듬으며 레온을 바라봤다.
새하얀 피부 위엔 반짝이는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눈을 가려야지, 레온.”
들키지 않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해볼 수 있는 만큼은 부딪혀 봐야겠지.
“준비됐어.”
에드먼드가 건네주는 얇은 천으로 레온이 푸른 눈동자를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턴 또다시 새로운 신분이다. 일행들이 긴장된 모습으로 검문소를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