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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30화 (130/133)

130화

23장. 태양의 눈(3)

슐츠의 해안 검문소가 입항을 기다리는 수많은 행렬로 무척이나 붐볐다.

“특별 농작물 대회는 물론이고, 태양의 절기에 개최하는 슐츠의 황금 축제는 수많은 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행사입니다.”

헤리스가 레온과 일행들에게 슐츠에 대한 간략한 정보를 설명해 주었다.

“매일같이 오십 척이 넘는 배가 슐츠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는 게 일반적입니다만….”

서대륙의 균형을 좌우하는 4개 대영지 중 한곳인 슐츠는 남부에 위치했다.

이 태양의 땅은 타린 공작가의 것이었는데, 그들은 가문의 검술 비책을 통해 수많은 유학생을 받아 가르쳐왔다.

게다가 황금 축제를 시작으로 보름 간격의 크고 작은 장을 열어 서대륙 내에서도 가장 유동 인구가 많은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만큼 검문이 체계적입니다, 공자님.”

타린 공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헤리스도 이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아주 오래전 고향을 떠나 더는 가문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해도 말이다.

“반란군이 준비해준 신원 확인서도 있고, 또 길라의 유명 정보상에게 자유인 보증까지 끝마쳤으니 문제없을 거예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게다가 입항하는 목적도 뚜렷하고.”

브라운이 꼼꼼하게 신원 확인서와 두 사람의 보증서를 내밀었다.

헤리스 타린이 그것을 받아들고 매서운 눈으로 다시 한번 제대로 살폈다.

‘웨인 가문이라….’

이 서대륙 내에 가장 널리 퍼진 가문을 꼽으라면 그들일 것이다.

헤리스와 메리는 웨인 가문의 나이 많은 노부부로, 워렌과 에드먼드는 그들의 자식으로 신원 확인서를 얻었다.

슐츠에 검술 유학을 왔던 적이 있는 이들이라 의심을 피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저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흠흠.”

남자치곤 낮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입은 다무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브라운이 스스로 입을 걸어 잠그고 레온을 바라봤다.

배운 것 없고 한평생 노부부와 함께 시골 생활을 한 마다비아의 자유인 자매 역할이었으므로 레온도 멍청한 척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근데 우리는 보증서만으로 괜찮은 거야?”

곧 있으면 일행들의 검문 차례였다.

레온이 옆에 얌전히 앉은 브라운의 얇은 허리를 쿡, 찔렀다.

“옙, 길라의 정보상이 우리 신원을 확인해준단 보증서를 써 주었으니까요. 만일 우리가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그자가 우리 대신 죗값을 치르게 됩니다.”

큰돈을 받고 보증을 서주었으니 입항 자체가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마다비아의 자유인은 서대륙 어딜 가도 문제의 원인으로 손가락질 받는 최하위 계급이었다.

“배를 멈추시오.”

아니나 다를까, 슐츠의 검문 병사 역시 레온 일행의 배를 멈춰 세웠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마주하는 웨인 가문의 나부랭이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이 배엔 자유인이 타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이 자유인이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함께한 지는 벌써 스무 번의 절기나 지났다오. 출신만 그렇다 뿐이지 내 식구나 다름없소.”

헤리스가 걱정과 긴장을 감추고 검문 병사를 향해 준비해 두었던 이야길 술술 내뱉었다.

그들이 얌전히 앉아 있는 브라운과 레온을 살폈다.

마다비아 출신이란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들은 무척이나 얇은 뼈대에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복장 역시 눈에 익은 자유인 차림새였다.

“좀 일어나 보시겠소. 확인할 게 있어서.”

한참 두 사람을 살피던 병사가 레온을 콕 짚어 가리켰다.

꼭 저만 한 체구의 사람을 예의 주시하라는 명이 내려와 있었다.

서대륙의 주적, 레온 몬데이어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습을 뒤바꾼다는 소문을 매달고서 말이다.

“확인을 생략할 수는 없지.”

맹인인 것 같지만 그게 오히려 수상했다.

레온 몬데이어의 눈동자는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벽안이었다.

이 서대륙 내에 그런 눈동자를 가진 이는 흔치 않았다.

“저 사람은 내 여인이야.”

그때 삐딱하게 서 있던 에드먼드가 단검의 날붙이를 가다듬으며 읊조렸다.

“뭐?”

검문 병사의 표정이 일순 험악해졌다.

에드먼드가 곧장 표정을 뒤바꾸곤 미소와 함께 그자를 향해 은 한 닢을 툭, 던졌다.

“내 여인이니 좀 봐주시오. 들어가 꽃을 선물하기로 했거든.”

지금 뭐라는 거야?

레온은 이상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축제에서 청혼을 할 생각인데 좀 도와주시오. 나도 장가는 가야 할 것 아니야?”

“아니….”

“그녀는 자유인이라 내 가문의 이름도 줄 수 없지… 사랑하는 여인을 이런 수모까지 겪게 내버려둘 순 없지 않겠어?”

일행 모두가 에드먼드의 능청에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

어디서 저런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건지.

“내가 이날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모르겠지? 원한다면 우리의 이야길 해줄 생각도 있어.”

에드먼드는 진정 검문 병사에게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하루 종일 떠들어댈 기세였다.

그가 레온의 아름다움에 대해 줄줄 설명할 때였다.

“아, 됐소, 됐어!”

그 말도 안 되는 질척거림에 검문 병사가 더는 필요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저 그런 가문의 혼사 문제 따위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버틴 이유가 여기 있었구만. 아주 돌아버렸어. 궁금하지 않으니 어서 들어들 가시오.”

“고맙소. 오늘 청혼에 성공하면 우리 결혼식에 꼭 초대하지.”

“됐다는 데도!”

어차피 수상한 자는 슐츠 내에서 반드시 붙잡히게 되어 있다.

검문 병사가 질색하며 일행들을 서둘러 다음 수색으로 넘겨버렸다.

“나 잘했지?”

에드먼드가 고개 돌려 레온에게 눈을 찡긋거리는 동안 워렌이 불편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눈동자를 들킬 수 없는 건 워렌 역시 마찬가지다. 나서서 공자를 지키지 못했단 생각에 쓸모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다음은 벨, 네 차례야.”

아무것도 모르는 레온이 포대 자루 안에 웅크리고 있을 벨을 쓰다듬었다.

앙칼진 반응이 손가락을 할퀸 것 같긴 하지만 지금은 혼낼 정신이 아니었다.

“너, …얌전히 있어.”

아직 입항은 끝나지 않았다.

레온이 긴장 어린 표정으로 벨의 등을 못살게 구는 동안 배가 움직였다. 짐 수색을 위해서였다.

***

한 해 슐츠를 찾는 방문객은 셀 수 없을 정도다.

외부인 유입과 유동 인구가 많으니 자연스레 슐츠의 경제는 살아날 수밖에 없었다.

광장 주변엔 수많은 숙박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방문객들을 위한 각종 요릿집도 즐비했다.

“사람이 많으니 말도 많고 탈도 많을 수밖에요. 경제를 살리고 싶은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정찰단을 구성했습니다.”

그들은 이곳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길 바랐다.

수많은 감시의 눈이 곳곳에 있기에 수상한 짓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또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이름 있는 가문의 종자 노릇은 쉽지도 않고 기회도 없다.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슐츠에서의 유학 생활은 그저 그런 사람들에게 기회의 장이었다.

타린 가문의 검술을 배운 이들은 못해도 용병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처치 곤란한 아들놈들을 붙잡아 유학길에 올려 보내는 돈 많은 부모들이 수없이 많았다.

과연 그들 덕에 슐츠가 이만큼 성장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런 만큼 기사들의 감시 체계도 이미 자리 잡혀 있습니다.”

일행들은 슐츠 내 지정된 여관에 묵어야만 했다.

주변엔 타린 가문의 검술을 배우고 있는 유학생의 숙소가 있었고, 그 맞은편엔 정식 기사단의 훈련장이 자리해 있었다.

당장 무력 동원이 가능한 검을 쥔 기사들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오가는 길목이었다.

“수상한 짓을 했다간 곧장 신고당하겠네.”

“예, 저희도 목적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헤리스가 말을 마치곤 곧장 얼굴을 가려줄 챙 넓은 밀짚모자를 꿰어다 썼다.

메리도 비교적 얇아진 옷가지를 걸치고 바깥에 나설 준비를 모두 끝마쳤다.

“농작물 출품을 위해 신청서를 쓰러 간다고?”

“예, 공자님. 이곳에 머무르는 방문객들이 한 번에 움직인다고 하니, 특별한 짓만 안 한다면 눈에 띄진 않을 겁니다.”

헤리스와 메리가 색을 모두 빼놓은 튼실한 흰 감자 포대를 챙겨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심받지 않기 위한 행동일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나가서 최대한 자뎅의 눈에 들기 위해 애써 보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어? 그의 정보상은 광장 깊은 곳에 있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지만… 아마 제가 이곳에 도착한 걸 이미 알고 있을 거예요.”

“어떻게?”

순수한 레온의 질문에 헤리스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일리아와 똑 닮은 그 아름다운 모습은 가린다고 가려지는 게 아니었다.

“자뎅이 모르는 소식은 없습니다. 적어도 이 슐츠 내에서는요.”

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지는 절친한 친구인 헤리스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 대한 믿음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반드시 나타나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가장 필요한 해답을 들고서.

“다녀올게요, 도련님.”

“몸조심해. 헤리스, 메리를 잘 부탁해.”

“걱정 마십시오. 다녀오겠습니다.”

두 사람이 묵직한 감자 포대를 끌고 여관 밖으로 사라졌다.

레온이 고개를 돌려 더위에 나자빠진 벨과 그런 아기 짐승을 돌보는 브라운을 바라봤다.

둘은 여관 내에서도 가장 어둡고 상태가 좋지 않은 방을 배정받았다.

에드먼드와 워렌은 3층 어딘가에서 서로 어색함을 풀고 있을 것이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벨의 털을 열심히 골라주던 브라운이 고개를 돌렸다.

목을 죌 것 같은 정복을 벗은 브라운은 현재의 자유로운 복장이 꽤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

품이 넓은 치마를 입고 있었어도 말이다.

“난 괜찮아.”

“편히 쉬시게 자리를 비켜드리고 싶지만… 바깥에 감시하는 눈길이 너무 많네요.”

브라운이 레온만 들릴 만큼 아주 조용하게 속삭였다.

그와 한 방을 써야 하는 건 불편한 일이었다.

이 더운 날 꼼짝없이 사슴 가죽에 동여매여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했다.

하지만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

‘브라운은 내가 아는 사람 중 지식이 가장 해박한 사람이야.’

그는 이 서대륙의 역사나 중요한 정보를 모두 알고 있었다.

손에 넣은 바다의 기록 중 지명을 잘 모르는 곳도 있는 만큼 어쩌면 브라운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독 향료에 대해서도 조사했던 적이 있으니 분명 도움이 될 거야.’

타티아나의 기억 속에서도 그랬고, 이번 크라운 캐슬 지하에서도 독 향료와 비슷한 것을 느꼈다.

만일 검은 사냥개 놈들이 독 향료를 통해 사냥을 하는 거라면 유통 경로를 추적해 그들의 덜미를 붙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냥 방식을 확신할 수 있다면 비극을 막을 수 있어.’

인어족의 절반을 잃었던 가장 끔찍한 사냥이 곧 시작된다.

그 전에 그들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다면 그 불행을 막을 수도 있겠지.

“브라운,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예, 공자님. 백 가지를 물으셔도 다 대답하겠습니다.”

그가 생긋 미소 지으며 레온을 바라봤다. 레온의 푸른 눈도 그를 응시했다.

디카르테는 늘 몬데이어에게 해답을 준다. 몬데이어가 필요로 하는 건 전부.

“혹시, 제니레이가 어디 있는지 알아?”

독 향료에 대해서라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나, 그 사람이 필요해.”

삐죽거리는 짧은 갈색머리의 레온이 눈썹을 까딱였다. 이제 브라운이 대답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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