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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문가의 지표자-131화 (131/133)

131화

23장. 태양의 눈(4)

지금껏 항해는 순항이었다.

마다비아에서 나고 자란 데칸이 워낙 물길을 잘 아는 덕도 있었고, 정보가 뛰어나 엔드해의 급변하는 날씨를 예측 가능한 피타의 덕도 크게 봤다.

케인이 선수에 편히 기대앉았다.

내리쬐는 태양은 뜨겁고, 불어오는 해풍은 서늘했다.

뜨거워진 몸을 금세 식힐 수 있는 시원함에 케인이 고스란히 눈을 감고 자연을 느꼈다.

“서대륙 주변 해역은 벗어났어.”

“데칸, 오셨어요?”

“그래. 이제 해류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고비는 넘긴 거지.”

“잘됐네요.”

규모 있는 배는 아니었지만 르테르 섬까지 갈 수 있을 정도의 동력은 갖추고 있었다.

케인과 일행들은 그곳에서 동대륙의 본토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들떠 보이진 않는구먼.”

“에이, 아니에요. 저 무척 신났는데.”

“거짓말도, 원.”

데칸이 케인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케인의 고향 섬이 목적지인 만큼 기대되기도, 한편으론 더 긴장되기도 했다.

“알아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워낙에 쥐 죽은 듯 살았거든요.”

그렇게 말하는 케인의 목소리에선 씁쓸함이 묻어났다.

데칸이 쏟아지는 강렬한 빛에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연 있어 보이는 그 목소리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의 곁은 왜 떠난 거냐?”

짧은 일정이었지만 데칸도 그들과 함께하며 일행들이 레온을 어떻게 대하는지 모두 지켜봤다.

늘 곁을 지키는 늙은 유모나 부집사는 물론이고, 그 무뚝뚝한 워렌과 케인, 두 기사 녀석들의 시선은 늘 레온에게 닿아 있었다.

“곁을 지키는 선택을 했을 수도 있잖아. 어째서 동대륙 행을 결정한 거지?”

“뭐… 비슷한 이유죠, 데칸이랑.”

“비슷한 이유?”

그렇게 말하는 케인이 훌쩍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봤다.

이제 두 사람의 시선 끝엔 린과 제노가 있었다.

“데칸이야말로 마다비아에 남아 반란군과 함께할 수도 있잖아요. 대장도 그걸 원했고요.”

“나야…. 다수의 목표를 좇는 삶은 지겨워. 가이아 왕조를 복위시키고픈 큰 뜻도 없고.”

데칸이 아닌 척 불퉁하게 말을 내뱉었다.

반란군 대장 제이드가 함께 남아 군에 힘을 보태주길 바랐으나 데칸은 그 마음을 애써 외면했다.

어딘가에 속하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그 즐거움이 얼마나 큰 삶의 원동력이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더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감옥에 갇혀 너무도 많은 세월을 떠나보냈다.

“남은 삶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하니까….”

연약한 린을 보며 어려서 잃은 제 자식이 떠오르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녀석들이 어떤 고난을 겪었고, 왜 그런 일을 당해야만 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린과 제노, 두 아이의 보호자가 되길 자처한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저도 뭐, 그런 이유예요.”

케인이 늘 매달고 있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데칸은 입을 뻐끔거렸다. 자세한 이유를 묻고 싶었으나 케인의 표정이 너무도 우울했다.

늘 생각 없이 힘만 쓰는 긍정적인 놈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케인의 어두운 표정은 절로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게다가 공자님 곁엔 워렌 경도 있고요. 제가 아니라도 공자님은 안전하실 거예요.”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레온의 비밀을 알아차렸다고 우쭐한 마음에 공자를 지켜주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게 레온에게 도움이 되는 길은 아니었다.

“전 착하지만 조심성이 없고 실수가 잦아서 잠시 떨어져 있을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본인 입으로 그렇게 말하는 놈은 또 처음 본다.”

“아, 그건. 부집사께서 매일같이 일깨워 주셔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라 그래요.”

“그러고도 그렇게 붙어 다녔다고? 하여간 이상한 무리야.”

“친할수록 내가 모르는 진짜 내 모습을 잘 찾아주는 거 아니겠어요? 전 그렇게 생각하는 걸요.”

“뭐, 그럴 수도 있겠네.”

함께하다 보면 알지 못한 이야기도 서로 털어놓게 되겠지.

데칸이 벌렁, 하늘을 보고 뒤로 누웠다. 거대한 구름이 느릿느릿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예전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케인.”

“예?”

“그놈 말이야, 워렌.”

놈은 늘 잿빛 먼지 사이에 파묻혀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그토록 맑은 하늘에 혼자만 버려진 쓰레기처럼.

“그간… 놈이 어떻게 지냈는지 알고 있나? 듣자 하니 같은 폰네시 기사단 소속이었다던데.”

이젠 케인도 그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좋지 않은 일로 엮였단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물론 죄를 지은 쪽은 데칸인 게 분명했다. 그걸 묻는 사람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으니 말이다.

“글쎄요. 입단하고 같이 지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미 케인이 입단할 무렵부터 워렌은 침묵의 기사단 내에 소문난 자였다.

“검술 실력은 최강이라고 기사들 사이에서도 말이 많았거든요. 영광의 노기사들이 모두 패했다던가?”

“그래?”

“예, 모두 뜬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노기사들의 태도를 보면 거짓말이라고 보긴 어려웠어요.”

그들은 젊은 기사의 실력을 지나치게 깎아내렸다.

루시오 공작에게 기사단 내 위계와 질서가 깨지니 놈을 내보내라는 요청을 수시로 해댈 정도였다.

“늙은 놈들이 젊은 사람 하나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구만!”

데칸이 열 받은 듯 벌떡 일어나 바그르르 성질을 부렸다. 그러자 케인이 키득거렸다.

“말도 마세요. 그 일로 기사단장께서 부끄러운 줄 알라고 제대로 면박을 주셨다니까요.”

“뭐? …헤리스 그자가?”

“예, 가뜩이나 슐츠에서 숨겨온 자식이다, 하나뿐인 아들을 몰래 영주님께 부탁해 빼돌린 거다, 하는 말이 많았는데 그 소문에 불만 붙였죠.”

폰네시 기사들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갑자기 나타난 워렌을 헤리스의 아들로 생각했다.

“생긴 게 다를 텐데.”

그 얼굴에 그 얼굴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불가능해.”

데칸의 진지한 대꾸에 케인도 웃음을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라도 부정하고 싶었던 거죠. 워낙에 특별 대우를 받았으니까요.”

“특별 대우를 받았다고?”

“예, 훈련도 함께 받지 않았고, 작전이나 수행도 단독이었어요. 오직 워렌 경 한 분만을 위한 검술 훈련장이 따로 있었다니까요.”

“그렇게까지 놈이 대우를 받았다고?”

놀라운 사실은 더 있었다.

“심부름 가다가 본 건데 글쎄… 영주님께서 직접 대련 상대가 되어 주셨다니까요.”

몬데이어의 검술은 이 서대륙 내에서도 대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루시오 몬데이어도 전쟁이 살벌하던 시기엔 이름난 무신이었다.

그의 아버지였던 선대 몬데이어 공작이 북부대검 재스퍼 밋치와 루시오, 그리고 헤리스 타린의 스승이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대우받지 못하고 산 건 아닌 모양이구먼.”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던 데칸이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간 놈을 팔아넘기고 속이 편안했던 건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다가오는 모두에게서 스스로 벽을 쌓고 숨어 지내던 놈이 유일하게 마음을 내보인 게 바로 자신이었다.

제게 느낀 배반감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숨이 턱턱 막혔다.

“그런 걱정이라면 마세요. 적어도 제가 아는 우리 폰네시 기사들은 전부 존중받고 살았거든요.”

“그러냐?”

“예, 근데 그나저나….”

두 팔을 베고 느긋하게 누워 있던 케인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하늘을 살폈다.

새카맣고 거대한 비구름이 가까운 거리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데칸도 심상찮은 그 표정에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이런, 비구름이 몰려오는데?”

가까운 거리에서 새카만 비구름이 아주 거대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그러다 몸집을 더욱 부풀리며 빠른 속도로 하늘을 뒤덮어갔다.

“데칸! 배를 정비해야겠소!”

“방향을 잡을 테니 서두르쇼!”

바다 상인으로 위장한 반란군 몇이 데칸과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이들을 돌보던 피타가 재빨리 린을 안아 들었다.

“제노, 어서 들어가자!”

다급한 그 외침에 제노가 고개를 쭉 내밀고 하늘 위를 살폈다.

오래도록 기억 속에 묻어둔 익숙한 비가 얼굴 위로 퍼부어 내렸다.

“곧 태풍이 밀려올 거예요!”

동대륙에 살 때 자주 보던 악명 높은 검은 구름이다.

어느덧 동대륙 해역과 가까워진 게 분명했다. 이처럼 한 치 앞도 날씨를 예측할 수 없는 걸 보면.

“동쪽으로 조금만 더 나아가면 무인도가 있어요. 그곳에서 비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좋아, 방향을 잡지.”

“제가 도울게요, 데칸!”

피타와 케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데칸은 조종실로 향했다.

제노가 서서히 얼굴에 달라붙는 빗줄기를 느끼며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심장이 쿵쿵 뛴다.

익숙한, 동대륙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

그 시각, 슐츠.

“…….”

레온의 질문에 브라운이 잠시간 공자의 의중을 살폈다.

제니레이라면 오래전 인연이 닿았던 여인이다.

탄일 축제에서 타세트의 항해단과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혼담이 오고 갔던 여인.

“정보원을 통해 쭉 행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폰네시를 나서서 월랜드로 향했습니다.”

“월랜드?”

그녀는 타세트의 항해단을 빠져나와 제가 살던 곳으로 향하길 원했다.

비록 기억을 잃고 어디서 납치되어 언제 배에 올라탔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어도.

“폰네시를 빠져나가 동쪽 숲으로 향하는 걸 확인했습니다. 정보원을 통해 월랜드에 몸을 숨긴 것까지도 살폈고요.”

“지금도 월랜드에 있다는 소리야?”

“얼마간 그곳에 무사히 머무르고 있는 것을 확인하긴 했지만, 그 이후부턴 소식을 파악할 수 없었어요. 센느로 떠나오며 모든 정보원과 연락을 끊었거든요.”

루시오 공작이 레온의 위치를 숨기려 애쓰는 마당에 꼬리가 잡힐 만한 짓은 부집사로서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무리 레온이 살피라 명한 일이었어도 말이다.

“이런… 월랜드라면 제니레이를 만나러 가기가 어려울 텐데.”

“아직 그곳에 있을 거란 확신도 없어요. 그들은 외부인을 그리 반기지 않으니 지금껏 함께하고 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고.”

제니레이라면 환각, 환청, 신경 마비를 일으키는 독 향료의 유통 경로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항해단 내에서 중책을 맡고 있었으니, 거래 방법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한데 그분은 왜 찾으세요, 공자님?”

워렌이 이유 불문하고 명을 따르는 타입이라면, 브라운은 완벽히 레온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답을 찾아내는 타입이었다.

어째서 제니레이를 찾는가. 그건 디카르테에게 있어 파고들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었다.

“독 향료, 혹은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물건을 찾아야 하거든.”

“공자께서 쓰시기 위함입니까?”

“아니, 그걸 이용해 움직이는 자들을 잡기 위해서야.”

“그렇다면….”

브라운이 빠르게 머릿속 정보를 정리해내기 시작했다.

레온의 분노가 향한 곳이 어디인지 떠올린다면 가장 우선하여 조사해야 할 곳이 완벽히 특정되는 법이다.

이 서대륙에 그런 물건을 취급할 수 있을 만한 세력은 많지 않다.

그가 늘 그렇듯 입꼬릴 상냥하게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밴디록스 상단을 살펴보면 원하시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온의 곁엔 모든 걸 알고 있는 디카르테가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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