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23장. 태양의 눈(5)
“밴디록스라면, 이 서대륙의 최대 상단 가문을 말하는 거지?”
“예, 맞습니다, 공자님.”
그들에 대해선 레온도 몇 가지 알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보잘것없는 가문이 이 서대륙 내에서 부를 쌓고 점차 세력을 늘려나간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떠드는 그들에 관한 소식이 바다에도 가라앉곤 했다.
“적어도 이 서대륙 내에서 독 향료를 취급할 수 있는 곳은 밴디록스 상단뿐입니다. 그들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 역시 꽉 잡고 있으니까요.”
독 향료는 동대륙에서 재료를 얻어 만들어낼 수 있는 위험천만한 독초였다.
아직 미지의 생물이 많이 남아 있는 동대륙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이 서대륙 내에 그와 같은 효과를 내는 재료는 없다.
즉, 그들이 동대륙에서 가져와 거래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추적하고자 한다면 그쪽을 살피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이그리아에 거처가 있지?”
“예, 다행히도 목적지가 일치합니다.”
자뎅을 만난 뒤 일행들은 트레톨라 왕가의 비밀이 묻혀 있는 이그리아로 향할 예정이었다.
그곳에 상단의 본거지가 있다.
검은 사냥개 놈들이 독 향료를 통해 인어 사냥을 준비하고 있다면 움직임이 있을 터.
근거리에서 놈들의 계획을 망칠 수 있는 기회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참, 제니레이 아가씨 말이 나와서 말인데요, 공자님.”
어느덧 고롱고롱 잠들었던 벨이 통통한 몸을 위아래로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켜댔다.
끔뻑거리는 파란 눈동자는 아직 잠에 취해 있었다.
브라운이 흘긋, 잠에 취해 꾸물거리는 녀석을 내려두고 레온에게 다가왔다.
“타세트의 항해단 쪽 정보도 도움이 될까 해서 말씀드려요.”
브라운은 제니레이가 월랜드에 안전하게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소하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짓고 다시 그녀의 자취를 찾았다.
다만, 월랜드가 데로니스 놈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그쪽으로 정보원을 보내기가 어려워졌고, 제니레이를 특정하여 상황을 살피는 건 그녀에게도 위험한 일이었다.
그래서 브라운은 타세트의 항해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아직까지 제니레이를 추적하는지, 혹은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취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폰네시를 떠난 후 그들은 웨스트 아리아로 넘어갔어요.”
“웨스트 아리아라고?”
그곳은 현재 데로니스 놈들의 해상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설마, 다시 손을 잡은 거야?”
북부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며 놈들의 관계가 어그러졌다.
동맹은 확실히 깨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닐 거예요. 데로니스의 해상 병력이 그곳에 집중된 것도 타세트의 항해단을 경계하기 위해서로 보이거든요.”
“서로 대치 중인 건가?”
“예, 전쟁을 벌이진 않지만 좋은 관계라고 판단되진 않습니다.”
레온이 조금 더 인상을 찌푸리며 접혀 있는 기록지를 흘긋, 살폈다.
바다의 기억 속엔 분명 타세트의 항해단이 신대륙을 찾는다고 되어 있었다.
‘타세트 놈은 한평생 정착할 땅을 찾아다녔지.’
놈들이 웨스트 아리아 쪽을 살피는 게 영 수상했다.
정말 신대륙을 발견한 걸까?
만일 그런 거라면 데로니스 놈들도 눈여겨볼 상황이었다.
더는 데로니스 놈들이 몸집을 부풀려선 안 되지.
“브라운, 혹시 모르니 놈들에 대해 좀 더 살펴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집요하지만 선은 넘지 않는 것.
레온의 명 한마디에 브라운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공자가 쭉 바라보고 있는, 저 낡은 기록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했지만.
***
“출품 신청을 마친 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시오!”
슐츠의 관리병이 목청을 높여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특별 농작물 대회를 위해 감자 출품 신청을 마친 헤리스와 메리도 진즉에 대기 줄에 뒤섞였다.
정말 정신없이 많은 인파였다. 오늘 내로 신청을 끝마칠 수 있을까 우려될 정도였다.
“태양이 굉장하네요.”
모두 함께 이동해야 하기에 얼마간 더 대기하라는 공지가 내려졌다.
긴긴 줄에 뒤섞여 있던 메리가 땀을 닦아내며 헤리스에게 말했다.
“괜히 태양의 땅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선 물부터 좀 드시오.”
헤리스가 그녀에게 깨끗한 식수를 건네주었다.
황금 축제가 며칠 앞으로 다가온 슐츠의 광장은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이 내뿜는 체온이 태양의 열기와 어우러져 숨도 못 쉴 만큼 강하게 목을 틀어쥐었다.
“정말… 많이 발전했군.”
헤리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제 고향 땅을 눈에 담았다.
오래전 이곳을 떠났을 때보다 과연 얼마만큼의 발전을 했는지 가늠도 할 수 없을 정도다.
메리도 그의 목소리에 생기 넘치고 밝은 기운이 가득한 영지를 눈에 담았다.
“그건 그렇고….”
어느덧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시간이 됐다.
빛을 가려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광장 한가운데 서 있던 이들이 모두 더위에 나자빠지기 시작할 때였다.
“공자께서 모르시는 것 같던데.”
헤리스가 메리만 들릴 만큼 조용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메리는 혹시 몰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척 정면을 바라보고 되물었다.
“모르시다니요… 무엇을요?”
“당신이 일리아, 그러니까 공작 부인의 유모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여기서 다시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메리가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돌렸다가 이내 표정을 숨겼다.
“음, 글쎄요….”
숨긴 적은 없지만 레온이 묻지 않으니 알려줄 만한 이야기도 없다고 여겼다.
무엇보다 그런 일을 먼저 입에 올릴 만큼 메리는 심성이 단단하지 못했다.
“…도련님께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으세요.”
“전혀 말이오?”
“예, 아마 충격으로 모두 잊으신 것 같아요.”
그런 레온의 아픈 상처를 괜히 먼저 입에 올려 헤집어대고 싶진 않았다.
“제가 메워줄 수 있는 상처가 아니잖아요?”
“그건….”
“어머니의 부재니까요. 그걸 무슨 수로 위로해 주겠어요?”
이제 그런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메리뿐이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헤리스는 결국 말을 아꼈다.
두 사람 사이의 중요한 일을 타인이 멋대로 입에 올리는 건 기사로서의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인은 정말 좋은 분이셨죠. 아름다운 분이기도 했고요.”
말이 나온 김에 메리가 오랜만에 일리아를 떠올렸다.
그녀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주변 모두를 아끼고 애정하며 그 마음을 숨김없이 꺼내 보여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분이 지키려 했던 폰네시를… 저도 그래서 사랑하게 됐고요.”
헤리스도 오랜만에 마음껏 그녀를 떠올렸다.
“아직도 잊히지 않소. 처음 봤던 날 원체 충격을 받아서.”
“어머, 그러셨어요?”
어린 시절 검술 훈련을 위해 처음 폰네시를 찾았을 때, 헤리스는 그곳에 머무르던 아름다운 여인을 아직도 기억했다.
놀람이란 감정으론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충격이었다. 그의 생애에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만났다.
“참, 궁금한 게 있었소.”
“그러세요?”
“부인께 물었지만 도통 대답해주질 않아서….”
일리아도 대답해주지 않은 것을 메리가 쉽게 입에 올릴 것 같진 않았지만, 이제 그런 걸 답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그녀뿐이었다.
헤리스가 민망함을 뒤로하고 의문에 충실했다.
“일리아는 어째서 폰네시에 있던 것이오? 그곳이 고향이 아닌 것 같았는데.”
그녀는 새카만 머리칼에 아주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처음 일리아를 만났을 때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오묘한 기운은 꼭 용의 혈족의 것과 비슷했다.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 헤리스는 늘 그녀를 그런 존재라고 믿어왔다.
어쩌면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져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음… 글쎄요? 아랫것이 무얼 알겠어요. 전 그저 부인을 돌보기 위해 따라왔을 뿐이랍니다.”
잠시 감정에 빠져 있는 사이 메리가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마무리했다.
어색한 미소가 짙은 주름 사이에 자리 잡았다. 무언가를 숨기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지?’
헤리스가 메리를 유심히 살피는 동안 큰 광장의 뒤편이 사람들의 소란으로 떠들썩하게 물들었다.
찰그락거리는 갑옷 소리가 인파 사이를 갈랐다.
헤리스가 눈을 좁게 뜨고 다가오는 이를 살피기 위해 집중할 때였다.
“그래, 몇 명이나 출품을 신청했는가?”
“아이고, 영주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헨리 영주님!”
“어서 오세요! 모두 길을 비켜라! 영주님이시다!”
메리가 흠칫 놀라 헤리스를 돌아보았다.
“헨리라면….”
“…내 동생이오. 이 슐츠의 영주이기도 하고.”
그의 매서운 눈이 잠시 동생에게 향했다.
헨리 타린이 축제 진행 사항을 점검하고 영지민들을 독려하기 위해 광장을 찾았다.
‘제길, 헨리라면 날 알아볼지도 몰라.’
헤리스가 챙 넓은 모자를 조금 더 눌러쓰고 고개를 돌렸다.
슐츠에 들어온 이상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너무 빠른 시기였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정체를 들킬 순 없다.
“어쩌죠? 이쪽으로 와요.”
메리가 불안함을 애써 숨기고 헤리스의 앞을 막아섰다.
그보다 작은 키로 그 덩치를 가려줄 순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번 축제에도 많은 방문객이 우리 슐츠를 찾아주었군.”
“이쪽입니다, 영주님. 이들이 특별 농작물 대회를 위해 방금 전 막 출품 신청을 마쳤습죠.”
헨리 타린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왔다.
그와 헤리스 사이엔 몇몇 방문객들만 서 있을 뿐, 거대한 대기사의 몸을 가려줄 만한 이들은 없었다.
메리가 눈동자만 굴려 영주 쪽을 살폈다.
그도 수많은 인파 속에 우뚝 서 있는 노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이를 어쩐담. 그녀의 심장이 불안함으로 두방망이질 칠 때였다.
“슐츠의 영주를 뵙습니다.”
그때 수많은 수하를 대동하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러자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그만큼 거리가 벌어지자 헤리스가 흘끔, 앞을 가로막은 이의 뒷모습을 살폈다.
“자뎅, 여기서 보니 반갑군.”
“제가 드릴 말씀을 영주께서 해 주시는군요.”
영주보다 더 영주처럼 보이는 화려한 황금빛 로브를 걸친 자뎅이 활짝 웃으며 헨리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타린 공작가와 자뎅의 정보상은 모든 영지민들이 친분을 당연시 여길 정도로 무척 긴밀한 사이였다.
“그렇잖아도 영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정세를 보고 드리려던 참입니다.”
“서대륙 상황에 관한 일인가?”
“그런 것도 있고 더 먼 곳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
그가 영주의 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재정과 관련해 자문을 드릴만한 값어치 있는 정보가 들어왔으니 이 이야기도 들으셔야지요.”
이 영지의 넘치는 활력과 생기는 모두 자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무르익은 이 땅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것 역시 자뎅 덕분이었다.
헨리가 방긋 미소 지었다.
듣고자 하던 정보가 코앞에 있고, 영지민들을 독려하는 일 따위야 내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만 영주성으로 돌아가야겠어. 자뎅, 함께 가도록 하지.”
“그러고 싶지만 저들에게 품목 보관 장소를 안내해 줘야지 않겠습니까?”
“허드렛일까지 맡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
“어차피 가져다 드릴 선물도 챙겨야 하고요. 제 일만 마친 뒤 금세 찾아뵙겠습니다.”
“뭐, 그렇다면.”
자뎅이 헨리를 위해 무엇을 준비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홀로 그 사실을 아는 헨리 타린의 표정은 기쁨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럼 이만 먼저 가보겠네.”
“예, 영주성에서 뵙지요.”
“살펴 오게!”
헨리 타린이 기사단을 거느리며 곧 발길을 돌렸다.
영지민들과 가까이 지내는 편이라 가는 길목도 여전히 수많은 인파로 가로막혀 진전이 없었다.
“자, 그럼.”
그렇게 한참.
헨리 타린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자뎅이 밝은 표정을 숨기고 제 수하들에게 고갯짓했다.
“출품 신청을 마친 품목들을 모두 타워로 옮기도록 해라.”
“예, 마스터.”
“이곳에 모여 있는 이들도 모두 여관으로 돌려보내고.”
“예!”
소란을 좀 잠재워줄 필요가 있었다.
자뎅이 황금빛 로브를 휘날리며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그들 사이에서 멍청히 자신을 바라보는 오랜 친구의 시선을 무시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