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23장. 태양의 눈(6)
“자뎅을 만났다고?”
“예, 그 말만 남기고 급히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온 헤리스와 메리는 곧장 배정된 방으로 가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방문객들이 문제를 일으킬까 슐츠인들의 통제는 무척이나 엄격했다.
“만났다 해도 문제는 지금부터네.”
방 밖엔 여전히 감시의 눈길이 존재했다.
큰 정보상을 운영하는 자뎅이 이런 곳에 몰래 잠입하기란 불가능할 터.
여관 감시병들을 회유해 들어오는 것까진 가능하더라도 자뎅이 누굴 만났는지 새어나가는 건 막을 수 없어 보였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데 곤란하겠는걸.’
결국 무슨 수를 쓰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였다.
똑똑.
“안에 계십니까?”
낯선 음성에 브라운과 레온이 시선을 마주했다.
용맹한 벨은 침대 위에 번쩍 뛰어올라 궁둥이를 쳐들고 사냥 준비를 마쳤다.
“접니다, 자뎅.”
뭐라고?
브라운이 잘못 들었나 싶어 두 눈을 깜빡거릴 때였다.
문밖이 조금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리스, 오랜만이군.”
“자뎅, 너….”
더 이상의 소란은 사절이다.
레온이 재빨리 벌컥 문을 열었다. 그 앞엔 일행 모두가 모여 있었다.
“아주 나 여기 있다고 공개 처형이라도 하지 그래.”
레온이 가장 앞에 있는 헤리스의 팔목부터 붙잡아 끌었다.
뒤이어 모두가 비좁은 방 안에 모여들었다. 모든 일은 순식간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사이에 주변을 파악한 워렌이 재빨리 레온을 안심시켰다.
“그래야만 할 거야.”
레온은 제게 다가오는 자뎅을 매서운 눈길로 바라봤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 숨어들기 위해 감내한 것이 있다.
그 모든 노력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처럼 조심성 없이 행동한 자뎅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공자.”
자뎅이 무언가에 홀린 듯 아름다운 레온의 앞으로 다가와 천천히 로브를 내렸다.
그가 황금빛 로브를 벗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주변이 낯선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여긴 이제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이랍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네모반듯한 공간 안에 영역이 무한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눈에 닿는 곳마다 수많은 공간이 생겨났다.
천장도, 바닥도. 가고자 하는 방향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처럼 빠르게 생성되는 공간 속에서 레온이 자뎅을 바라봤다.
“오래도록 기다려 왔습니다. 주인이신 몬데이어께 드디어 인사드립니다.”
그가 레온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수천 개의 눈이 새겨진 목걸이를 바치며 외쳤다.
“신, 루시오 몬데이어의 눈이자 몬데이어 공작가의 술사.”
그리고 앞으로 레온의 눈이 되어줄.
“자뎅, 인사드립니다.”
***
“네 경지가 이 정도까지 올랐다면 진작 도와주지 그랬냐. …이건 완전 마법 수준인데.”
“눈앞에 있어야 가능한 술법을 도대체 무슨 수로.”
“찾아오는 건 못 하는 거냐, 자뎅? 갑자기 눈앞에 막 나타나고 그러는 거.”
“가능했으면 진즉에 했겠지, 이 멍청아.”
평생지기 오래된 친구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는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흠흠, 브라운의 헛기침에 자뎅과 헤리스가 제정신을 되찾고 레온을 살폈다.
“아버지의 눈이 되어주었다고 했나, 자뎅?”
자뎅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이 얼마나 루시오를 빼닮았는지 생각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예, 공자. 술법을 통해 정보를 모으고 루시오의 명을 수행해 왔습니다.”
자뎅이 손안에 힘을 쥐어댈 때마다 빈 공간이었던 주변은 열대우림 한가운데가 되기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협 한가운데가 되기도 했다.
레온은 머리 위에 내려치는 벼락을 보며 술사의 힘이 제가 찾던 해답임을 알게 되었다.
‘독 향료가 아니었어.’
검은 사냥개 놈들이 인어를 사냥하며 주변을 통제한 건 그깟 향료 따위가 아니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술사의 술법. 그게 바로 해답이었다.
“루시오와 헤리스가 전장을 누빌 때 저라고 슐츠에서 놀고먹었던 건 아니거든요.”
자뎅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레온에게 사실을 전해주었다.
“전 트레톨라 왕가의 소속이었던 견습 술사였습니다.”
“트레톨라 왕가?”
왕가의 이야기가 나오자 경청하고 있던 에드먼드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졌다.
“당시 트레톨라 왕가에선 술법을 다룰 수 있는 술사들을 가르치고 키워왔는데, 그곳에 모인 이들을 통칭해 글레어라고 불렀습니다.”
누구나 힘을 선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자질이 있는 자를 선별하고 교육시키는 글레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모른다.
또한 술사가 되려면 이전의 기억은 모두 소멸시켜야 했는데, 불행히도 자뎅은 기억을 잃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더 이상 남아 있는 자질이 없다는 이유였죠.”
어깨를 으쓱해 보이긴 했지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슐츠로 오게 된 거였군.”
“그래, 헤리스. 이곳이라면 검술이라도 배워 살 방도를 다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잠시 추억에 젖어 있던 자뎅이 시선을 돌렸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레온의 눈엔 여전히 그리운 몬데이어가 남아 있었다.
그 눈을 보자 전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그때 이곳 슐츠에서 루시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폰네시의 몬데이어 공작과 그의 후계자가 검술 훈련을 위해 타린 가문의 후계자를 만나러 오던 길이었다.
선대 몬데이어 공작은 헤리스 타린과 루시오가 좋은 경쟁 상대가 될 수 있을 거라 여겼고, 타린 가문에 허락을 받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그렇게 슐츠에서 세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루시오는 적어도 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만이라도 술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고, 그 경지에 오르기까지 절 후원해 주었습니다.”
견습 술사였으나 이미 글레어들에게 기본 교육을 받은 상태였다.
루시오는 그들이 빼앗아간 친구의 기억을 아까워했다.
“그 안에 얼마나 소중한 기억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면서….”
루시오는 아낌없이 투자하여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고, 자뎅이 술사의 길을 포기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수소문 끝에 대단한 스승도 붙여주었다.
“그리고 저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언젠가 공자께 전해야 할 이 비밀을요.”
자뎅이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과 함께 손을 모았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빠른 속도로 주문을 쏟아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붙잡아 두었던 기억이 새어나왔다.
“…아버지의 기억인가?”
“정확히는 루시오와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제 기억이지요.”
전해야 할 모든 것은 이곳에 있다. 자뎅이 제 손안에 들어온 기억을 움켜쥐고 레온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하지만, 이 기억은 오직 공자께서만 볼 수 있습니다.”
“나만?”
“예, 그 누구도 안 됩니다. 절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순식간에 레온의 주변으로 결계가 쳐지기 시작했다.
그건 누구도 레온에게 접근할 수 없는 가로막이었다.
점차 자뎅과 레온, 두 사람이 서 있는 바닥 주변이 무너지며 일행들이 서 있는 곳과 균열이 생겨났다.
“안 돼. 공자님!”
워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이미 공간의 틈이 벌어지며 레온이 머무르는 곳과 멀어졌지만 그냥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그곳을 넘어오면 영영 이 안에 갇히게 될 텐데.”
자뎅이 경고했다.
“술사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어째서 공자님을….”
브라운이 그런 워렌을 급하게 제지하자, 그의 입에서 분노를 담은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기억을 엿보기 위해선 주변 그 누구의 기운도 얽혀선 안 될 일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네.”
“헤리스, 보고만 있을 겁니까?”
워렌은 화가 나서 헤리스를 독촉했다.
자뎅이란 자가 누구이고 과거에 어떤 관계로 루시오와 엮였건, 일행들에겐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레온과 단둘이, 그것도 알 수 없는 술법에 갇혀 있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확실히 저건 선을 넘는 행동이지. 예고도 없이.”
에드먼드가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자뎅을 위협할 모습이었다.
“이런….”
헤리스도 상황이 난감했다.
그간 자뎅이 이런 경지까지 실력을 키웠는지도 모르고 지냈거니와, 그가 어째서 레온과 일행들의 사이를 떨어뜨려 놓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봐, 자뎅.”
“예, 공자.”
“기억을 엿보기 위해 다른 이들의 기운이 얽혀선 안 된다고 했지?”
“예, 그들의 기운이 얽히면 보고자 하는 기억 속에 혼란이 생기고 정작 봐야 할 것을 놓치는 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처럼 공간을 분리해 거리를 두는 방법밖에 없는 건가?”
“모든 존재의 기운은 같은 시간 안에 함께 머무르는 이상 뒤섞이기 마련입니다. 공간을 분리해 저는 이곳의 시간만 조절할 생각입니다.”
결국 시공간을 뒤바꾸어 일행들의 기운이 섞이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소리였다.
“반드시, 공자께서만 봐야 하는 기억입니다.”
이건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누구도 이 기억에 엮여선 안 된다.
자뎅이 일행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미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다 알고 있다.
트레톨라 왕가의 마지막 후계자, 그리고 용의 혈족의 버려진 아이. 또 디카르테 가문의 충실한 부집사와… 일리아의 유모.
메리는 이제 발을 동동 구르고 멀어져가는 레온을 보며 거의 울다시피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워렌, 갈 수 있겠어?”
에드먼드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미 레온은 저 먼 곳까지 흘러가 있었다.
평범한 인간인 자신은 이 공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하지만 용의 혈족, 특별한 힘을 지닌 존재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지금 거리라면 갈 수 있어.”
뛰어넘을 수 있다.
너무도 빠르게 공간이 분리되고 있지만 힘을 쥐어짜 본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확률에 워렌 경을 잃을 순 없습니다.”
브라운이 단호하게 워렌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뎅은 적이 아니다. 물론 그의 행동이 위협이 되는 건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워렌의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자뎅, 당신의 기억이라면 그 안에 헤리스도 있겠지.”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레온이 결국 결정을 내렸다.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늘 그렇듯 레온의 몫이었다.
“아버지와 관련된 기억일 테니 그 안에 분명 헤리스도 함께 있었을 거야.”
“…맞습니다, 공자.”
“그렇다면 헤리스를 이곳으로 데려와. 그의 기억이라면 뒤섞여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는지는 레온보다 자뎅이 더 잘 알았다.
게다가 기억 속 그날들 역시 두 루시오의 곁엔 늘 헤리스가 함께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습니다.”
결국 자뎅이 손을 뻗었다.
순간 헤리스가 서 있는 공간에 붉은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그가 두 사람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공자와 일행들이 고난을 겪고 여기까지 왔다는 걸 내가 너무 가볍게 여겼군.”
이토록 의심받을 줄은 몰랐다.
자뎅의 자조에 헤리스가 곧장 레온의 곁을 지키고 나섰다.
“자뎅, 나와 자네가 나눈 시간은 많지만 공자님과 우리 일행들은 방금 전이 고작 아닌가.”
“그래, 하지만… 이 방법이 모두를 위하는 길이었어.”
의아한 그 말에 레온이 고개를 들어 자뎅의 미묘한 표정을 살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술법은 그저 제가 겪고 느꼈던 기억을 그대로 엿보는 일일 뿐입니다.”
그는 다시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두 사람 앞에 선명한 기억을 꺼내두었다.
“때로는 엿보는 이의 기억이나 감정이 뒤섞이기도 합니다.”
진한 음영으로 뒤덮인 자뎅의 눈길이 헤리스에게 향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드러낼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헤리스가 한평생 숨기고 싶어 했던 그 감정만큼은 레온에게 전해지지 않길 바라며.
“준비되셨습니까?”
자뎅이 두 사람을 살폈다.
헤리스가 긴장으로 축축해진 두 손을 닦아내고 레온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전 준비됐습니다, 공자님.”
“…그래, 헤리스.”
결심과 함께 레온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두 사람은 이미 자뎅의 기억 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