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3화 (3/215)

< 3화 >빙의 2회 차

백우진이 눈을 뜬 것은 주선의 치료를 받은 뒤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후 였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옆구리의 통증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지난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죽기 직전의 몸에 빙의했겠지.

“••••••.”

몽롱한 시 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빽빽한 나무, 울창하게 자란 수풀, 맑고 청명한 하늘.

보기만해도 상쾌해지는 자연 풍경을 눈에 담은 그의 첫마디는, 쌍욕이었 다.

아, 씨발.

백우진은죽었다.

주선이 확인했던 그때, 그의 영혼은 이미 육신을 벗어나 세상을 떠났다.

빈 육신에 깃든 영혼은 웹소설을 읽다또 한 번 낯선 세상으로 납치된 사내 의 것이었다.

“인생진짜스펙타클하다, 응.”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정말 억울했다.

백 번 양보해서 첫 번째 빙의는 자신의 업보라고 칠 수 있다. 5,700자나 되 는 무지 막지 한 쌍욕을 무지 성으로 갈겨 버 렸으니 상대 방이 기분 나쁠 수 있 다.

“근데 이건 진짜아니지.”

속마음으로 욕했다. 쌍욕도 아니고, 그냥 하도 현재 상위 랭킹을 차지하 고 있는 작품들에 편승해 인기 좀 얻어 보겠다고 있지도 않은 태그를 집어넣 으려는 작가의 무리한 드리프트 때문에 몰입력이 떨어져서 못 읽겠다고, 딱 그렇게 만 생 각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이다.

“빙의를 시켜서 없던 몰입감을 만들어주네.허허, 개새끼.”

몰입도? 아주 확 올라갔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일이 되었으니 몰입을 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작가명을 확인했어야지, 이 병신아….”

하다못해 읽기 전에 작가명이 라도 확인했다면 아예 소설 사이트를 탈퇴 해버렸을텐데.

“후우

깊은 숨을 몰아쉬 며 마음을 다잡는다.

자책과 좌절은 사람의 마음을 밑바닥 없는 수렁으로 이끈다. 적당한 선에 서 멈추면 반성이 되지만, 멈추지 못하면 독이 된다.

이곳은 무림(武林). 객잔에서 고수와 시비만 잘못 붙어도 모가지가 뎅겅 하고 잘려나가고 산을 타면 산적, 배를 타면 수적을 만나 목숨을 위협 받는 무서운 세상이다.

그런 세상이 현실이 된 이상후회와좌절보단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강구 해야할때다.

‘지금이어느시점이지?’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머릿속 한쪽 구석으로 밀어두었던 백우진의 기억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약혼녀를 시작으로 이어진 히로인들의 이탈 릴레이, 그 와중에 떨어진 삼 류 수준의 산적 토벌 임무, 처참한 패배와도주.

꼴사나운 모습들이 연속해서 지나갔다.

“ 아.”

기억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이 부분이 초반부에서 가장 볼만 하게 아니, 앞으로를 기대하게 만드는 부분이었으니.

‘분명 정신을 잃고 쓰러진 주인공을 신선이 구했었지.’

소설 속에 서 정신없이 도망치 다 쓰러진 주인공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하 계에 잠시 내려온 신선이었다.

그는 수백 년 전 검 하나만으로 선계에 다다른 검선이었는데, 무슨무슨 이 유로 하계에 내려왔는진 몰라도 죽기 직전인 주인공을 가까스로 살려내게 되고, 몇마디 대화를통해 주인공의 올바른 심성에 감동하여 부디 올바른 일 에 사용하길 바란다며 무공을 전수해준뒤, 다시 선계로 떠나간다.

“아마 그렇게 해서 히로인들을 후회와 집착으로 빠트리려는 속셈이었겠 지.”

하루아침에 강해진 주인공. 그를 보며 후회하기 시작하는 히로인. 요즘 불 티나게 팔리는 후회와 집착, 피폐로 가기 위한 복선이 었다.

“지랄하네, 정말.”

애초에 이 소설의 시작은 하렘과 순애였다. 약하지만 정의로운 주인공의 등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정실을 두고 다투는 약혼녀와 소꿉친구 그리고 그 외의 히로인들이 마음을 치유해주고 서서히 강해지기 시작하는 성장형 먼 치킨을 우직하게 써나갔다면 최소한 하렘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제법 먹 혔을 텐데,굳이 鉈후회, #집착을슬쩍 끼워 넣는멍청한짓 때문에 그나마 있 던 독자들도 다 떨어져 나갔다.

“어휴,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부터 주인공은 자신이 다. 작가의 의 도대로 움직 여줄 생각은 1 도 없으니 굳이 발암 가득한 소설 내용을 떠 올려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 이 유는 없다.

“그래도 기연은 챙겨야지.”

주인공 ‘백우진’은 태어날 때 근골이 뛰어나 형과 함께 가문을 부흥시킬 무재로 칭송받았다. 그런 그가 지금까지 이류 수준도 못 벗어나고 허덕이는 이유는단하나, 가문의 무공이 그와상극의 무공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상극인 거야?”

머릿속에 떠오른 섬서백가의 무공은 극쾌에 중점을 둔 백 섬검결(白쪅劍結). 무공은 처음이지만 판타지 세계에서 굴러온 짬밥으로 검식을 살펴보건대, 검법이나 심법 자체에는 절맥과 같이 무공을 익히는 것 자체가힘든 특이체질이 아닌 이상 상극이 될 만한요소는 없었다.

“작가편의적인 새끼.”

딱봐도 새롭고, 주인공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을 익히게 하려고 집어넣은 설정임에 틀림 없었다.

영혼이 달라진 지금, 그러한 설정은 이미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머릿속 에서 백섬검결의 초식 몇 가지를 떠올리며 시뮬레이션 해봐도 아무런 문 제없이 능숙하게 사용할수 있단생각밖에는들지 않았다.

“그래도 뭐, 다다익선이니까.”

손에 쥔 패 는 많을수록 좋은 법 이 다. 섬 서백 가의 무공 또한 무림 에 서 뛰 어 난무공으로손꼽히지만 검 하나로 선계에 다다른 신선의 무공에 비할수는 없을 터.

생각을 정리해 나가고 있던 그때, 수풀 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 가 들려 왔다.

수풀을 헤치는소리.분명 동물이 아닌 사람의 것이었다.

왔다.’

사내,백 우진은 이 제 야 눈을 뜬 사람처 럼 몽롱한 눈빛으로 소리 가 들려온 방향으로 시 선을 돌렸다.

‘묘사에 따르면 백색 무복을 입은 선풍도골의 노인이 ….’

수풀을 헤치고 나온 이는 노인이 맞았다. 그런데 묘사하고는 전혀 다른 노 인이 나타났다.

흙이 잔뜩 묻은 꾀 죄 죄 한 복색 에 제 몸보다 커 다란 망태 기를 짊 어 지고 걸 어오는 모습은 검선이 아니라 먹고 살기 빠듯한 약초꾼에 가까워 보였다.

“깨어났느냐?”

사내, 백우진은 소설 속 주인공이 했던 대답을 떠올리며 그대로 입에 담았 다.

“어…, 어르신께서 저를 구해주신 겁니까?”

“그래.

말투 또한 묘사와는 달랐다. 분명 소설에선 천하를 굽어볼 듯 웅장하고 웅 혼한 기 색 이 돋보이 는 목소리 라고 했는데 , 지 금 노인의 얄팍한 목소리 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구명 지은을 입 었습니 다. 실례 지 만 은인의 존함을 여쭤도 되 겠습니 까.”

“험험, 내 하계의 인간에게는 정체를 누설하면 안 되지만 자네에게만 특 별히 알려줌세.”

노인은 꾀죄죄한 몰골에 맞지 않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 다.

“본선은 주선(酒仙),선계의 신선이니라.”

“••••••.”

“술을 빚는 데 에 꼭 필요한 약초를 발견하여 잠시 하계 에 내 려왔다가 자 네를 보게 되었지.”

아니, 시발.

뭔 가 틀어져도 한참 틀어졌다.

소설 속 신선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유일하게 등장했던 검선 또한 주 인공에게 무공을 알려주고 선계로돌아간뒤 한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 으니까.

그러나, 그들 모두가 인간의 몸으로 육신을 벗어던지고 선계로 올라선 이 들이 다. 신선에 게는 선술이 라는 기 이한 술법 이 있고, 보패 라 불리는 술법 에 의해 태 어 난 신비로운 도구 또한 존재 한다.

눈앞의 신선이 검선이 아니라는 데에, 신선이라기엔 너무나도 볼품없는 모양새 에 실망했으나 그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신선은 신선이지.’

.

!.

..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가진 바 재주가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여 선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무엇이든 배워두면 이 세상 살아가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어찌하여 이 숲속에서 죽어가고 있었냐는 물음에 다짜고짜 눈 물부터 짜냈다. 그리고 원통함이 가득 서린 목소리로 자신 이전의 주인공 ‘백우진’에게 벌어졌던 일들을 제 자신이 겪은 일인 것마냥토해내기 시작했 다.

“허어, 약혼자가 다른 남자와 밀회를?”

다른 남자와 미래를 약속하던 약혼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정사까지 빈번 하게 치른 악독한 여자가 되 었고.

“아니,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소꿉친구가 널 이용했단 말이냐?!”

소꿉친 구는 형 인 백무혁과 이 어지 기 위해 온갖 방식 으로 자신 을 핍 박하 고, 이용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가되 었다.

‘너무 갔나?’

있는 대로 술술 내 뱉 었더 니 좀 너무 가지 않았나 하는 생 각도 들었으나 뭐 어쩌겠나.

‘자극적이어야 제대로 먹히지.’

자극적인 이야기일수록 집중력은 올라간다.

막장 드라마를 보는 아줌마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 다. 드라마 속에 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행태에 분노하면서도 드라마를 그만 봐야겠단 생 각은 못하고 끝까지 따라가지 않던가.

‘선계면 얼마나고리타분하겠어.’

신선놀음이나 하기 좋은 곳에서 이런 개막장 스토리를 어디서 들어봤겠나

“이,이 …! 천하에 나쁜 것들을 보았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에 백우진은 바닥에 엎드린 채 꺼이꺼이 울면서 속으로는 쾌재를불렀다.

‘모든것은 계획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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