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빙의 2회 차
“천벌받아 마땅한 것들!”
천인공노할그들의 행태에 분노하는 주선을 따라 화를 내는 건 하책 중의 하책.
“고정하십시오, 어르신.”
백우진은 줄줄 뽑아낸 눈물을 소매로 닦아내며 말했다.
“어찌 그들의 탓을 하겠습니까. 모든 것이 제가 무능하여 벌어진 일 아니 겠습니까…, 크흑!”
상책은 그들을 두둔하며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거다.
“허 어, 어찌 그리 미련하단 말이냐.”
분노어린 시선은 어느덧 연민으로 바뀌어 백우진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 다.
“전 언제나 그녀들에게 폐를 끼치기 일쑤였지요. 이번 임무만보아도 그렇 습니다. 산적조차 제대로 토벌하지 못하고 이토록 죽을 위기에 몰리지 않 았습니까.”
으허허헝!
재차 눈물을 터뜨리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주선은 무언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으로 그의 두 팔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눈물을 거두거라. 본선이 너를 도울 것인즉.”
“어,어르신….”
한 번 선계 에 오른 신선은 더 이 상 하계 에 어 떠 한 영 향력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유인즉, 신선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하는 것이 속세와의 인연을 모두 끊어내는 것이 기 때문이 다.
주선 또한 마찬가지였다. 수백 년 전 신선에 오르기로 마음먹었을 때 이미 모든 인연의 끈은 청산한채 선계에 올랐다. 헌데, 눈앞의 청년에게서 나온 인연의 끈 한 가닥이 분명 자신에게로 이어져 있었다.
“본디 신선은속세와의 연을 끊어 하계의 인간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없 음이나.”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어 의 아했지 만 주선은 이 모든 것을 운명이 라 여기 기로 했다.
하필 자신이 하계로 내 려오는 공터에 그가 쓰러져 있던 것도, 영문 모를 인 연의 끈이 이어져 있는 것도 모두 실의에 빠진 그를 도우라고 원시천존께서 맺어준 것이라고.
“너와는무슨 영문인지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어 도움을 줄수 있을 듯하구 나.”
“어르신…!”
감격에 찬 목소리로 외쳤으나 백우진의 마음속에선 여전히 의문이 남았 다.
주선에게서 자신이 배울수있는게 뭐가있을까.
“내 너에게 무공을 알려주도록하마.”
“무공을… 말입니까?”
“그러하다. 본선의 무공이 다른 무선(武仙)들에 비하면 부족한 것은 사실 이나, 하계의 그 어떤 무공과 견주어도부족함이 없을 터.”
백우진의 눈이 휘둥그레 졌다.
기분 좋은 오산이 었다. 그가 약체 인 것은 어 디 까지 나 다른 신선과 비교했 을 때지, 인간에 비해선 안되는 것이었는데.
기대 어린 표정으로바라보자,주선의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너에게 본선의 절기인 음주선공(飮酒仙功)을 알려주마!”
“•••예?”
“음주선공이니라.”
“••••••.”
어째 무공 이름이 심상치가 않다.
…
백우진의 옆구리에 난 상처는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본래 였으면 열흘 정 도는 꼼짝없이 의방 신세를 져야 했으나, 신선의 치료술은 이를 사흘이 면 충 분케 했다.
말끔히 털고 일어난 그가 주선에게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산 곳곳을 돌아 다니며 몸에 좋은 약초들의 모양을 두 눈으로 직접 새기고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뽑아내는 일이었다.
“어허,그렇게 마구잡이로흙을 파면 약초의 뿌리가상한대도!”
“••••••.”
엄격한 지도하에 이루어진 약초 뽑기는 대략 열흘 정도 이 어졌다.
백우진은 전문 약초꾼 뺨치는 실력을 얻었다.
그 다음으로 직접 뽑은 약초를 이용해 술을 빚는 방법을 배웠는데, 이 과정에서 백우진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주선은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작은 호리병을 꺼 내들었다.
“이것은본선이 다른신선에게 부탁하여 만든보패니라.”
겉보기엔 볼품없어 보이는 이 호리병에는 말도 안 되는 기능이 숨어 있었 는데, 첫 번째는 주선이 선계에 만든 술 창고와 호리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었다.
풀어 말하면 선계에 있는주선의 술 창고가 마르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술 이 보충된다는 말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선은 호리병의 마개를 열어 술을 바닥에 쏟아냈는 데, 그것이 끝도 없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며 백우진은 평생 마실 술값이 굳었 다며 쾌재를 불렀다.
보패의 놀라운 두 번째 기능은 약주를 만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획기적 으로 단축시 키는 것이 었다.
“자, 보거라. 이 호리병에 직접 채집한 약초를 잘라 넣고 흔들면 • • •.”
보통 약주를 만드는 데에는 제법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술에 담가둔 약 초의 기운이 풀려나와술에 섞이고숙성되기까지 작게는석 달,길게는육개 월에서 일 년 가까이 걸린다.
호리병 에 담긴 술을 마신 백우진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크게 놀랄 수밖 에 없었다. 약초가 담기 기 전까지 만 해도 맑은 청주에 불과했던 술이 어느덧 싱그러운 풀내음을 가득 머금은 약주가 되 어 있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이 호리병은 흔들어주기만하면 약초의 기운과술의 기운을 자연스럽게 섞어주니라.”
그야말로 술의 신선이 들고 다니는 보패에 걸맞는 기능들이었다.
주선은 약주가담긴 호리병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약주가 앞으로 너의 내공이다.”
“예 ?”
“음주선공은 약주에 담긴 기운을 뽑아내 어 내공으로 전환시 키는 운기법 이니라.”
“•••그럼 술을 마시면 내공이 쌓인단말입니까?”
“그러하다.”
“와….”
개꿀.
…
“끄응....”
주선이 하계 에 머무른지 도 어느덧 한 달이 라는 시 간이 흘렀다.
그시간동안 그는 백우진에게 자신이 가르칠수 있는 모든것을 가르쳤다.
좋은 약초를 알아보는 법부터 상처 없이 채집하는 법, 맛있는 술을 빚어내 는 법, 음주선공을 운기하는 법을 넘어 검선이 주선을 위해 직접 창안한 검법 인 주선검결(酒仙劍蕡)부터 보법인 취선보(醉仙步)까지.
‘놀라운 무재로다.’
스스로가 무능력하다고 말했던 것과는 달리, 백우진은 주선의 상상을 아 득히 뛰 어넘는 무재였다.
‘내 가속은 겐가?’
심지어 자신이 저 영악한 녀석의 말재간에 속아넘어간 게 아닐까싶을 정 도로.
무엇이든 한 번을 보여주면 금세 따라했고, 신선들의 보법 중에서도 난해 하기 론 1, 2위를 다투는 취 선보 또한 어렵지 않게 습득하며 그를 크게 놀라 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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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허.”
설령 속았다고 한들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이유야 어쨌든 백우진에게서 뻗어나온 인연의 끈이 자신과 닿아 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하루하루 성장해 가는 백우진의 모습은 주선을 흐뭇하게 만들기에 충분 했으나, 그들 사이 가 마냥 순탄한 것은 아니 었다.
“영감님, 이제 다 배운 거 아뇨?”
고작 보름 전까지만 해도 어르신, 어르신 하고 꼬박꼬박 말을 올리던 녀석 이 어느새 영감님이라부르기 시작하더니 말투도 삐딱해지기 시작했다.
“이놈아, 술좀적당히 마시거라.”
다 그놈의 술이 문제 였다.
“아이, 걱정 마시라니까요.다조절해서 마시는중입니다.히끅!”
“……아이고.”
안 취했다고 말하는 놈들 중 진짜 안 취한 놈이 없다는 걸 주선은 잘 알고 있다.
“적당히하고 앉아보거라.”
“뉘 예.”
백우진이 비틀거리며 걸어와 털썩 주저앉자 흙먼지가 살포시 피어올랐다.
“네 가 말했듯, 내가 너에 게 가르칠 수 있는 건 모두 가르쳤다.”
무공의 기본은 이미 완성되었다. 앞으로는 홀로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충 분히 성취를 이룰 수 있을 터.
“이제 슬슬 선계로 돌아갈 때가된 것 같구나.”
“•••영감님.
99
백우진이 붉어진 눈시울로 주선을 바라보았다.
“허허, 수백 년 전에 모두 끊어냈다고 생각했건만 인연이란 참으로 야속하 구나.”
먼 옛날, 손자들과함께 지냈던 나날들이 이러했던가. 이제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여 그윽한향수를느꼈다.
“우진아.”
“예.”
“자신감을 갖거라. 지난 한 달간 봐온 너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무재를 지 니고 있었느니라.”
“•••알겠습니다.”
백우진에게서 뻗어져 나온 인연의 끈이 서서히 풀려감을 느꼈다. 그와동 시에 주선의 몸이 환한 빛으로 물들어가기 시 작했다.
“선계까지 네 이름이 들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마.”
마지막 말을 마친 주선의 몸이 완전히 빛에 휩싸여 이내 온데간데 없이 사 라졌다.
“영감님….”
씁쓸한 표정으로 나지 막이 되 뇌 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기를 잠시.
“•••갔나?”
이윽고 고개를 든 백우진의 얼굴은 앓던 이가 빠진 듯 속 시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휴, 한달동안더럽게 힘들었네.”
무공을 배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되도 않는 연기를 하는 게 참으로 힘겨웠다.
“컨셉을 잘못 잡았었지,음.”
신선이 라고 너무 깍듯하게 대한 것도 문제였고, 히로인들을 너무 나쁜년 들도 만든 것도 조금 문제 가 있었다.
실제로 주선은 원한다면 선계로 가그녀들에게 천벌 비슷한 거라도 내릴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아찔했지.”
아마그게 현실이 됐다면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게 되지 않았을까싶다.
끄응차.
자리를 털고 일어난 백우진은 사람이 머문 흔적이 가득해진 공터를 바라 보았다.
“슬슬여기도떠날때가됐나.”
한 달이라는 시간은 소설 속 백우진’이 검선에게서 무공을 사사한 시간이 기도 했다. 일부러 맞출 생각은 없었지만 시간이 무척 공교로웠다.
“궁금하네.”
일러스트로만보았던 유연화, 신예화. 그 외의 히로인들. 그들의 실제 모 습은 과연 어떨지 궁금해졌다.
“그럼 가서 봐야지.”
한 달간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