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 백사파(白楙둥)
때는 백우진이 찌른 놈과 찔린 놈의 안내를 받아 백사파에 당도했을 무렵.
‘어,시발.’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백사파 본거지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안으로 들어선 그를 맞이한 것은 이 마을에 군림하는 백 사파의 두목 왕종 구와 부두목 백 모사였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의 연약한 머리숱과 이에 대비되는 강인하고 흉 흉한 기세를 흩뿌리며 다가온 그는 백우진의 앞에 당도하여 고개를 숙였다.
“이거 정말송구하게 됐습니다!”
“이?”
“고인을 몰라 뵙고 제 부하들이 큰 실례를 범했다지요!”
“아,그건 맞기는 한데….
애초에 그걸 따지고 들기 위해 찾아온 건 맞았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저자 세로 나오면 속이나 한 번 살살 긁어보려고 했는데.
‘딱 봐도 안되겠네.’
여유작작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는 놈을 보고 깨달았다.
웬만한 정도로는 놈의 성질머리를 보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내가누구인지 아는가?”
설마 하는 마음에 묻자 왕종구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지요. 허나, 고수시라는 것 정도는 알겠습니다.”
백우진의 기도는 지극히 평범했다.
음주선공의 묘리 자체 가 독특한데 다 매번 술을 마시는 탓에 본디 뿜어내 야 할 기세 가 한 층 더 누그러져 평범한 취 객과 다를 바 없게 꾸며 낸다.
그럼에도 왕종구가 이토록 저자세로 나온다는 것은 딱 하나였다.
‘눈치가 빠르구만.’
수많은 눈치 중에서도 어떤 사람인지 계산하는 쪽으로 아주 특출 난 인물 이었다.
“자아, 이러실 게 아니라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제 사과를 받아주시는 건 어떠 십니까?”
“술?
“예 ! 좋은 술이 제게 아주 많습니다.”
허허허.
술자리는 그제 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 번 자리를 붙이고 마시기 시작하자 왕종구는 기다렸다는 듯, 온갖 진수 성찬과 더불어 인근 기루에서 가장 지명도 높은 기녀들을 데려다 앉혀주고 예 기들을 불러다 흥이 펄펄 나는 음률을 읊게 했다.
‘이러니까완전히 뻑이 갔겠구만.’
이토록 극진히 모셔주니 황궁 안의 황제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이따금 씩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는 고수들의 마음이 개미 다리에 붙은 먼지 만큼은 이해가 됐다.
“형님!”
이때부터 형님, 아우까지 하게 됐다. 액면가로보나실제 나이로봐도 어마 어 마한 차이 가 있는 두 사람이 지 만 왕종구와 더불어 부두목인 백 모사까지 스스로 아우를 자처하니 백우진은 형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런. 동료들이 객잔에서 기다릴 텐데.”
시 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아제 끼 다 신예 화와 제 갈연지 의 존재 가 생 각난 백우진이 말하자 왕종구가 곧장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형님! 그냥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지요! 동료 분들은 제 부하를 시켜 모셔 오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 그럴까?”
그렇게, 잽싸게 생긴 족제비가 신예화와 제갈연지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 고, 두 사람이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한채 굳어버린 것이다.
“오,예화! 연 소저! 어서들 와.”
백우진이 두 사람을 반기자왕종구와 백모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형님! 저분은….”
왕종구와 백모사의 시선이 꽂힌 곳은 바로 신예화의 얼굴이었다.
무복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굴곡진 몸매, 보기만 해도 미소 짓게 만드는 발 랄한얼굴.
이런 마을은 물론이고, 대도시를 이 잡듯 뒤져도 보기 힘들 미인이 나타났 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 었다.
“흐흐, 예쁘지?”
“예, 예. 참으로 예쁘십니다.”
“그래도홀리진 말라고. 예화는….”
속닥속닥!
백 우진 이 두 사람의 귀 에 다 대고 뭐 라 속삭였다. 그러 자 두 사람의 시 선 이 곧장 신예화에게서 멀어졌다.
“그런 사이셨군요!”
“감축드립니다, 형님!”
“에,에?”
대체 무슨 사인데 ?!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 만 괜스레 부끄러워 진 신예화가 얼굴을 붉혔다.
“자아, 이쪽은 내가 이번에 새로사귄 동생들이야! 인사들 나누도록해.”
왕종구와 백 모사가 사뭇 정 중한 태 도로 포권 을 취 하며 자기 소개 를 하자 두 사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사를 받아들이며 제 소개를 했다.
“신예화예요.”
“연 •••지라고 합니다.”
마지못한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말을 받았다.
“흐흐, 이쯤되니까하는 말인데 말야.”
백우진이 왕종구와백모사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말을 이었다.
“사실 내가 바로 섬서백가의 차남이야, 동생들.”
“허억! 서, 섬서백가!”
백 우진을 제 외 한 네 사람 모두가 놀랐다.
백 사파의 둘은 그가 생 각보다 더 거 물이 라 놀랐고, 두 여 인은 설 마 백 우진 이 제 신분까지 드러낼 줄은 몰라 놀랐다.
“굳이 밝히진 않겠지만 저 두 사람도 나 못잖게 대단한 가문이니 잘 대해 줘야해.
“여,여부가 있겠습니까!”
암요!”
프흐흐흐
백우진이 웃으며 술잔을 들었고, 연회는 다시 이어졌다.
오로지 한 사람만이 마음 놓고 즐겼던 어색한 연회는 그 한 사람이 술에 취 해 완전히 곯아떨 어진 뒤 에 야 끝을 맺 었다.
:k * *
왕종구는 세 사람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아예 별채를 따로 내주었다 •
처음에는 잘 구슬려 마을 밖으로 내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무려 섬서 백가의 자제라고 하니 마음이 달라졌다.
‘이놈은 기회야!’
술을 함께 마셔본 왕종구는 곧장 알아차렸다. 백우진 이 생 각 이 상으로 망 나니 기질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정파 놈이 사파와 어울린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지.’
그는 정파, 자신은사파.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아니, 섞여선 안될 사 이임에도 이토록 쉽게 어울리는 걸 보면 어쩌면 이미 그의 등에 대롱을 꽂은 사파놈들이 여럿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놈의 혼을 쏙 빼놓아 자신이 그들 중 최고가 되면 남은 놈들은 알아서 나가떨어지지 않겠는가.
왕종구는 이참에 섬서백 가와의 연을 맺어 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 발판 을 마련하리라 다짐했다.
차남에 다 망나니 라 가주가 되 긴 어 렵 겠 지 만 그래 도 섬 서 백 가니 까.
“편히들 쉬십시오.”
“아,네에….”
“고,고마워요.”
부담스럽게 별채까지 직접 안내해준 왕종구가 떠나가고 나서야 두 사람 은 긴장으로 한껏 굳어진 얼굴을 펼 수 있었다.
“하아, 이게 대체 무슨일이람.”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네요….”
두 사람은 넓은 침상에 대(大)자로 뻗어 있는 백우진을 보았다.
그때였다.
“다들 갔지?”
눈을 감고 있던 백우진의 입술이 달싹였다.
“히 익!”
| |....
!..
“힛…!”
백우진이 눈을 뜨자 두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라뒷걸음질쳤다.
“너, 너잠든거아니었어?”
“척이야, 척.”
적의 앞마당에서 누가 마음을 놓고 술을 퍼마시겠냐.
“네가 그랬잖아!”
“어허, 아니래도.”
안 취했으니까 아닌 거다.
“어,어떻게 된거예요…?”
제갈연지가 묻자 백우진은 낮부터 있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설명해주었 다.
“그런 일은 둘째 치고, 왜 의형제까지 맺은 건데?”
“당연히 방심을 유발하기 위해서지.”
왕종구의 제안에 따라 술자리에 앉은 백우진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백사파 의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 었다.
놈과 함께 술을 마시는 동안 기감을 퍼뜨렸고, 뒷간에 간다며 이곳저곳을 맴돌며 이곳에 상주하는 이들의 숫자를 헤아렸다.
“이놈들 숫자가 적어도 오십은 넘어.”
“오,오십명?”
“그래.
직접 돌아다니며 본 녀석들만최소 서른을 훌쩍 넘겼다. 아까 만난찔린 놈 과 찌른 놈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며 수금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녀석들까
지 생각하면 그쯤 된다고 보는 게 옳다.
“한마디로 우리만으론 절대로 불가능한 임무란 거지.”
규모는 제법 컸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진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흑도 방파 였다.
소속된 무인 대다수가 삼류거나 높아봐야 이류에 불과한 자들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숫자 앞에선 장사 없는 법.
더군다나 왕종구와 백모사는 최소 일류 이상의 실력자로 보였다.
“그럼 돌아가야지 !”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데!
그녀 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 치 자 제 갈연지도 동의 하듯 고개 를 주억 거 렸다
맨날 티격태격 하더니 이럴 때만 잘 맞는 모습에 백우진의 심경이 매우 복 잡해 졌다.
“우리가 가면 여기 마을 사람들, 어쩌면 평생 이렇게 등골 빨리며 살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냐.
그 말에 두 사람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변했다.
고민되기 시작한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쳐야되는불가능에 가까운 상 황을 앞에 두고 돌아가는 게 맞는지,아니 면 의와 협 이 라는 기 치를 내 건 정파 의 위상에 부응하여 그들을 징치하는 게 옳은지.
고뇌에 빠진 두사람의 심각한표정을 세세하게 뜯어보며 만끽하고 있던 백우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고민 안해도 돼.”
맑은 음성이 상념에 파묻힌 두 사람을 일깨웠다.
“내가 방법을 좀 찾은 것 같거든.”
셋 이서는 죽어도 불가능한 일을 해결할 방법 이 .
“그게 뭔데?”
신예화가 들뜬 표정으로 되묻자 백우진은 당연하다는 투로 대 답했다.
“적의 숫자는줄이고,우리 편 숫자는늘리면 되지.”
그 말에 그녀의 표정이 곧바로 짜게 식었다.
“하, 학관에 도움 요청을 하실 건가요…?”
동네 무관이나 문파는 백사파에 밀려난 지 오래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 림맹 지부도 이곳에서 며칠은 가야 나온다.
하물며 관군마저 백사파와 한통속인 이상 지원을 얻어내려면 학관에 지 원 요청을 보내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나, 백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허, 지원군이 여기 천지에 널렸는데 무슨.”
“어디요…?”
“여기.”
백우진이 가리 키 는 곳은 그들이 들어서 있는 바로 이곳, 백 사파의 본거 지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