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화 > 백사파(白楙둥)
흑도(黑道).
어쭙잖게 배운 무공으로 마을 주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사는 시정 잡배들이 모여 일군 세력을 일컫는다.
“그런 흑도 놈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백우진의 물음에 두 사람은 생 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 답했다.
“쓰레기?”
“이,인간이하…?”
어…, 그것도 일단 맞기는 한데.
전혀 예상치 못한 매운맛 답변에 얼얼함을 느낀 백우진의 혀가 잠시 멈췄 다가 다시 움직였다.
“•••놈들이 기회주의적이고, 탐욕주의적이라는 거야.”
아무리 그럴싸한 이름을 붙이고, 제 자신을 그럴 듯한 직책에 올려놓는다 한들 그들의 근본은 여전히 마을 뒷골목에서 만만한 사람들 주머니나 털어 먹는시정잡배에 지나지 않는다.
놈들은 기회주의자다. 기회가오면 마다하지 않고, 동시에 한 번 털어먹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저지르고 보는 탐욕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러한 성향은 옷을 바꿔 입고, 직책을 달고, 소속을 갈아치우는 정도로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뼈를 깎고, 도려내야만 없앨 수 있는 성질의 것인데, 흑도들에게 그런 독심이 있을 리가.
“난 이 부분을 건드릴 생각이야.”
“어떻게?”
“아까 우리와 함께 술을 마신 두 놈.”
왕종구와 백모사.
백사파의 두목과 부두목.
1인자와 2인자.
백우진은 손뼉 치듯 마주한 두 손바닥을 떼어놓으며 말을 이 었다.
“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거지.”
백우진이 보아온세상의 ‘부’들은그랬다. 일단직책 앞에 ‘부’라는글자를 달고, 제 앞에 상관을 하나 두고 있는 놈들은 극소수를 제 외 하고 하나 같이 역천을 꿈꾸는 반골들이 었다.
모두가 제 앞에 있는 이가고꾸라지길 원했고, 성격이 지독한 이들은 직접 손을 써서 그들이 자리에서 내 려오도록 만들었다.
왜냐고? 당연히 자기가 1인자가되기 위해서, 부’라는멋없는글자를지 워버리기 위해서다.
백 모사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분명 보았다. 제 의형인 왕종구를 깍듯이 모시는 듯하면서도 차마 숨기지 못한 탐욕이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백모사의 두 눈을.
“언제든 뒤통수칠 준비가되어 있는놈이야.”
그런 놈이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단순히 제 힘이 왕종구 가 지닌 힘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일 터.
“그러니까우리가 녀석의 힘이 되어주는 거지.”
그 와중에 찾아온 백 우진은 최 고의 패 가 될 수 있다. 섬서백 가의 차남이 자 그 스스로도 고수로 보이는 이가 백모사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나선다면, 그 로 인해 방주의 세력을 밀어낼 수 있는 확신이 선다면.
“절대 가만히 안 있을걸.”
백모사가 방주에 대한욕심을 지니고 있는 한,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다. 백우진은 이를 앞당겨 두 세력을 충돌시켜 공멸하게 만들 셈이 었다.
그야말로 손 안대고 코를 풀 요량이 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잘될까?”
“부방주가 조금만 새, 생 각이 라는 걸 한다면 •••,안 넘어올 수도 있어요….”
신 예 화와 제 갈연 지 가 조심 스러 운 말투로 걱 정 을 내 비 췄 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아무리 백우진이 도와주겠다고 한들, 두 파벌 이 부딪치는 순간 죽고 다치는 이들은 생길 테고 그것은 곧 세력의 약화로 이 어질 터.
마을을 꽉 잡고 있기 위해선 압도적인 무력이 필수인데, 이를 염려한 백모 사가 제안을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법한그림이었다.
허나 백우진은 자신이 있었다.
“넘어올 수밖에 없게 만들어야지.”
앞서 말했듯, 흑도 놈들은 기회가 오면 그것을 놓지 않으려 애를 쓴다.
백 모사는 흑도 놈들 중에선 그나마 인내심 이 며 생 각이 깊어 보였지 만 그 래 봤자 흑도였다.
살랑살랑 흔드는 떡밥에 넘어오지 않는다면? 그보다 큰 떡밥을 만들어 던져주면 된다.
생 각을 마친 백우진이 조금 전보다 생 기 있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 는 두 사람을 향해 의 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출발하기 전에 내가두사람에게 했던 말, 기억하지?”
임무 수행 중 내 가 하는 말은 곧 법 이 라는 거.
“그,그랬지.”
“네에….”
두 사람의 얼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
기 세 좋게 작전을 수립하긴 했지 만 밥을 익히 기 위해선 뜸을 들여 야 하듯, 계획을 시작하는 데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하하! 기분이 너무 좋구만 그래.”
“저도 그렇습니다!”
친밀도를 높일 시 간이 말이 다.
거나하게 취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백우진이 특유의 몽롱한 시선으 로 백모사를 바라보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왕 아우도 참 좋은 동생 이지만, 나는 개 인적으로 자네 가 조금 더 마음에 들어.”
“그,그렇습니까?”
마냥 좋아할 수 없어 억지로 입꼬리를 적당히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우리 가문 사람이 아니어도 백 씨 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뭐랄까…, 내적 친밀감? 그런 게 자연스럽게 생기더란말이야.”
흑도 놈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핵심을 꿰뚫는 말을 했다간 겨우 좁혀둔 거리가 단숨에 멀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암시를 걸듯 계속해서 이야기를 꺼내며 핵심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언제든 이 형님의 힘이 필요하면 얘기하도록해! 내 발벗고나서줄테니.”
형제 좋다는 게 다그런 거지. 안그런가?
하서하하하!
“이 아우, 말씀만으로도 정말큰힘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곤 백우진을 따라 웃는 백모사의 얼굴에는 미처 숨기지 못 한 욕망이 잔불처럼 남아 요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백우진이 백모사와 단 둘만의 술자리를 가지며 친목을 다지고 있을 때, 신 예 화와 제 갈연 지 는 왕종구와 함께 다과 시 간을 즐기 는 중이 었다.
“하하하! 이거, 어여쁜두소저와함께 차를마시니 기브브기 한량없습니다.”
“호호, 저희도 왕방주님처럼 호탕하신 분과 함께 해서 좋네요.”
“그렇습니까! 하하!”
웃을 때마다 방 내부가 쩌렁쩌렁 울리는 탓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눈 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백 형님께선 두분을두고 어디를 가신 겁니까?”
“아…, 백 공자는 백 부방주와 함께 기루에 간다고 들었어요. 맞죠, 제… 아니, 연소저?”
“네,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제갈연지의 싸늘한 시선이 신예화에게로 향했다.
연기를 그런 식으로밖에 못하냐는 핀잔어린 시선에 신예화는 불퉁한 시선으로 맞대응하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왕종구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으음, 이거 참….백 형님께서 부방주만데리고 갔단말입니까.”
어째서 자신을 놔두고 둘이서만 기루에 갔을까.
온갖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어졌다.
...
....
.....
흑도에 게 방심과 신뢰 는 죽음과 같다.
왕종구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백사파 설립 이전부터 함께 해온 백 모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백모사가 자신의 자리를 호시 탐탐 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백사파가 조금 더 커지기 위해선 그의 뛰어난 수완이 필요했기에 은 밀한 감시 속에 놔두고 있을 뿐이 었다.
언제고 때가 되면 녀석의 숨통을 죄 어놓을 생각이 었건만, 분위기가 묘해 졌다.
‘좋지 않군.’
왕종구는 처음으로 머릿속에 경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만약 백모사가 백우진을 구워 삶아 제 편으로 삼아 자신을 축출하려 한다 면? 과연 버틸수 있을까.
‘절대안된다.’
무려 섬서백가다.오대세가에 끼진 못했지만그들 중하나의 세력이 약해 지면 언제든 그 자리를 차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문.
그런 이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간과 쓸개를 밖으로 내놓고 다니는 것과 진 배없는 일이었다.
“저어…, 두 소저께서는 혹시 백 형님과우리 부방주가왜 따로 나갔는지 아시는 바가 있으십 니 까?”
그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제갈연지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 리며 대답했다.
“글쎄요? 단순히 친목을 다지러 나가신 게 아닐까요. 함께 나가시는두 분 이 굉장히 친해 보였거든요.”
“으음…, 그렇습니까.”
좋지 않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날카로운 비수가 이쪽을 향해 서서히 조여오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그의 몸을 일으켰다.
이러다 내일 당장에라도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불안함 을 더욱 자극시 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두 사람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인 그 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분! 잊고 있었던 급한 일이 떠올라 가봐야겠습니다.”
“아! 저희 가 바쁜 분을 붙잡고 있었네요.”
“얼른가서일 보세요.”
“감사합니다, 이 무례는 다음에 자리를 따로 만들어 벌충하도록 하겠습니 다!”
그럼 이만.
애써 점잖은 척 여유 있게 나가는듯했지만문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빨라지는 왕종구의 뒷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연기가 제대로 먹혔 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파(氣波)를 이용하여 왕종구가 저 멀리 떠나갔음을 인지한 제갈연지가 입을 열었다.
“신 소저, 연기를그렇게 어색하게 해야겠어요?”
“처,처음인 걸 어떡해요 그럼!”
“적어도 연습 정도는 하셨어 야죠.”
신예화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하,한거거든요?!”
“어머, 더 최악이네요.”
“이 잇…!”
뭐라고 한소리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자신의 연기가 어색한 건 사실이었고, 반대로 그녀는 무척이나능숙하게 대사를 읊었으니.
“그런데 정말이걸로계획이 성공할까요.”
화제도 돌릴 겸, 우려하고 있던 문제를 화두로 던지자 제갈연지 가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도요.”
실제로 왕종구는 벌써부터 긴장하여 찻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부하들을 단속하기 위해 별채를 나서지 않았던가.
“위 기를 느낀 왕종구는 대놓고 백모사를 견제하기 시작할 거예요. 그리고 그 견제를 느낀 백모사는 위 기 감을 느끼 겠죠.”
이대로 가면 자신이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 기감에 사로잡힌 백모사가 취 할수 있는 최선의 수는 단하나.
자신에게 호의 적으로 다가온 백우진을 끌어들여 부족한 힘을 충당한 뒤 , 자신이 당하기 전에 왕종구를 먼저 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두 개의 파벌로 나뉜 백사파는…,무너지게 되겠죠.”
어느 쪽이 승리하든 말이에요.
제갈연지가 내뱉은 마지막 말에 신예화의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