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화 > 백사파(白楙둥)
백우진은 쓰러져 있는 왕종구를 질질 끌고 백모사에게 다가갔다.
백모사가 흉흉한 기세로 백우진을 노려보았다.
“대체…, 대체 왜 그런것이냐.”
분노와 살기 가 꾹꾹 눌러 담긴 목소리 였다.
“네놈이 바라는모든 걸 약조했거늘,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인 거냐! 왜!”
이놈이나, 저놈이나왜 저렇게 뻔뻔한지.
절규를 안주삼아 술 한 모금 더 들이 킨 백우진 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 며 대답했다.
“내가어제 좀취해서 심신미약 상태였거든.”
“시,심신미약?”
“그래.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백우진은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 백모사에게 보여주었다.
이 세 상 누구도 알지 못할, 오로지 자신만이 알고 있는 모욕감 가득한 손 짓.
“술에 취한사람말은 믿어선 안된다고,등신아.”
그게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으면 안 돼.
주정뱅 이 가 뭐 라 지껄 이 건 다음 날에 기 억 이 나 할 것 같냐.
“이,이…!”
백우진이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에 혈압이 치솟아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이 었다.
굳게 닫혀 있던 백사파의 대문이 부서져 나가고, 별안간 관군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수십의 관군들이 고통에 겨워하는 백사파 무인들을 둘러쌀 즈음, 중년의 관리 가 안으로 들어 섰다.
흐릿해진 시야로 관리의 얼굴을 확인한 백모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 다.
“혀,현령께서 여긴 왜….”
혹시나하는 희망이 그를 잠식했다.
현령은 지금까지 자신들에게 수많은 뇌물을 받아온 탐관오리 였다. 이미 돈맛을 알아버린 그에게 이만한 돈줄은 없을 터,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온 것 은 아닐까 하고 생 각했다.
하지 만 그것은 착각이 었다.
백모사의 얼굴을 일별한 현령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눈앞에 둔 것처럼 이 를 바득바득 갈더 니 포졸들을 향해 소리 쳤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극악무도한흑도의 무리들이다! 모두 포박하 라!”
“예!”
구해주러 온 게 아니라마무리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억…!”
치명타를 입은 백모사는 결국 치솟는 혈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신예화가 장부를 찾고, 백우진이 칼부림을 하고 있을 때.
제갈연지는 원령현의 관아에 도착하여 현령을 겁박하고 있었다.
“제갈가의 여식이 내게 무슨 일인가.”
“부탁을 하나 들어주십사 찾아오게 되 었어요.”
“무림세가의 여식이 조정의 관리에게 부탁이라…?”
현령이 의아한표정을 짓자 제갈연지는 살포시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양리 에 있는 백 사파라는 흑도 무리 를 아시는지 요?”
그녀의 물음에 현령의 얼굴이 살짝굳어졌다. 허나, 금세 회복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으음…! 백사파라, 내 들어보기는 한 것 같군.”
“안다고 하시니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저와 동료들이 수양리의 주민들에 게 폭거를 일삼는 백사파의 무리들을 퇴치하려 하는데, 도움을 주실 수 있으 실까요?”
현령은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손을 휘저었다.
“자네는 관무불가침의 뜻을 모르는가?”
관무불가침(官武不可侵).
관과무림은 서로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불문율이었다.
“잘 알지요.”
“그걸 알면서 내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는 겐가?”
제 갈세 가의 여식 인 그녀 가 백 사파를 퇴 치 한다는 건 결국 무림 세 력 간의 다툼을 의미했다. 이 전투를통해 백성들이 크게 피해를 입는다면 모를까,그 런 상황이 아니라면 관부에서 나설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백사파는 현령 나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 아니 었던가요?”
간섭할 명분은 충분하실 텐데요.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왔다는 듯, 유유한 눈동자가 현령을 지그시 바라보 고 있었다.
현령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감히 흑도 방파 따위와 나를 엮으려 들다니,네년이 정녕 …!”
“7월 초하루, 수양리 기루, 원령현 현령에게 은자 300냥.”
불호령을 내리려던 현령의 입이 다물어졌다.
“8월 보름날, 수양리 인근호숫가, 원령현 현령에게 은자 350냥.”
현령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제 갈연지 가 지금 읊고 있는 것은 분명 최 근 자신이 백 사파로부터 뇌 물을 받은 날짜와 장소, 금액 이 었다.
‘저 년이 대체 어찌…!’
오로지 백사파의 방주와 부방주, 그리고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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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읊을까요?”
세세하고 정확했다.
시치미를 떼고 싶어도 불가능함을 깨달은 현령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 정보는 어디서 들었나.”
“백 사파에 있는 비 밀 장부를 살짝 들춰 보았을 뿐이 에 요.”
사실은 아니었다. 현령을 겁박할 빌미를 만들기 위해 백모사에게 가장 최 근에 현령에게 뇌물을 건넨 날짜와 장소 등을 간략하게나마 들었을 뿐이었 다.
“이 빌어먹을놈들이…!”
현령이 분노했다.
비 밀 장부 따위 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대체 어떻 게 관리했기에 외부인의 손에 들어가도록둔단말인가.
승부는 이미 기울어졌다.
패배를 인정한 현령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후우….원하는 걸 말해보게.”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들은 제갈연지가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관군을 좀 빌려주셔야겠어요.”
우리 백 공자를 위해서.
백사파내부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전투가 모두 끝난 이후에 도착한 현령이 쓰러져 있는 백사파 소속 무사들 을 모조리 포박하여 끌고 나가버 렸기 때문이 었다.
왕종구가 눈을 뜬 것은 가장 마지 막으로 포박된 부하들이 포졸들의 손에 백 사파 밖으로 끌려 나갈 무렵 이 었다.
“과,관군이 갑자기 왜….”
바삐 움직이는 포졸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왕종구가 소리쳤 다.
“현령나리!”
기 절한 사이 팔과 다리 가 포승줄에 꽁꽁 묶인 왕종구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현령 앞으로 나아갔다.
“현령 나리! 어찌 이러십니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현령은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이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에 화가 난 왕종구는 얼마 남지도 않은 내 기를 무 리하게 운용하여 제 손과 발에 묶여 있던 포승줄을 강제로 끊어냈다.
“쿨럭!”
과도한 내기 사용으로 인해 피를 울컥 토해낸 왕종구가 달려드는 포졸들 을 피하며 제 침소를 향해 달려갔다.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침상 밑에 숨겨둔 금고에서 비밀 장부를 꺼내어 현령을 겁박하여 이 상황 을 타개해볼요령이었다.
광기에 물든 눈으로 침상을 밀어내고 장판을 뜯어낸 왕종구는 금고가 있 어야 할 자리에 텅 빈 공간을 맞이하고선 아연실색한 얼굴을 한 채 뒤로 자빠 지고 말았다.
“그,금고.금고가대체어디에…!”
뒤통수를 조여오는 쌔한 기분에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 눈동자를 데룩데 룩 굴려 백우진을 찾았다.
현령에 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그는, 자신의 침소에 있어 야 할 금고 위 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느1 -느1 ”
아, 아아….
어느새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 신예화와 제 갈연지 가 보였다.
“고작 세 사람에게 지독하게도 졌구나.”
뼛속 깊은 패배감에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어버린 왕종구는 피를 토하며 쓰 러 졌다.
…
정리가 얼추 끝나자 백우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현령에게서 빌린 관군들 을 이용하여 백 사파 내부와 백 사파에 속한 무인들의 집 에 숨겨져 있는 재 산 을 전부 터는 것이 었다.
“와…, 이게 다 얼마야.”
수레에 가득 실린 은자와온갖 보석들이 태양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이 모든 것들이 마을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거라 생각하니 신예화와 제갈연지는 다시 한번 열이 솟구쳤다.
“천하에 다시 없을 쓰레 기들 같으니!”
“망종들….”
신랄한 욕지 거리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씨 익 미소 지은 백 우진은 하루 종 일 쏘다니느라 기진맥 진한 관군들에 게 마지막 명령을 하달했다.
“자아, 수레들 끌고 마을 중앙으로 집합!”
관군들이 야유를 내뱉으며 일어나 수레를 끌고 하나둘씩 나가기 시작했 다.
백 우진은 한쪽 구석 에 넋을 놓고 있는 왕종구와 백 모사를 줄에 묶어 이 끌 었다.
“제대로 안 걸으면 다리를 확 분질러버린다.”
살기등등한 말투에 놈들은 비척거리면서도 백우진의 뒤를 따라 걸었다.
마을 외곽에서 중앙으로 향하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줄에 묶인 왕종구 와 백모사를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저거백사파놈들이잖여.”
“저놈들이 왜…?”
의아함을느낀 마을주민들이 하나둘씩 뭐에 홀린 사람처럼 백우진의 뒤 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을의 중앙에 다다른 그는 수레 앞에 왕종구와 백모사를 무릎 꿇린 뒤 , 현령을 겁박하는 데에 잘 이용하고 있는 비밀 장부를 돌돌 말아 입에 가져다 대고 소리쳤다.
“아아. 마을 주민 분들께 전합니다. 수양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온갖폭거 를 일삼았던 백사파의 무리가 오늘부로 해체되었음을 알립니다.”
웅성 거 리는 주민들 사이로 흘러 간 음성 이 어 마어 마한 파장을 일으켰다.
“지금…, 내가잘못들은거여?”
“백사파가 해체?”
거짓말이라기엔 밧줄에 꽁꽁 묶인 왕종구와 백모사가 증거처럼 떡하니 눈앞에 있었다.
잘 먹고, 잘 마셔서 언제나 반질반질했던 피부가 폭삭 늙어버리긴 했지만 분명 놈들이었다.
“저,정말로 백사파가 해체된겁니까?”
누군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고, 모두가 이에 대한 대답을 원했 다.
백우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예,백사파 놈들 싹 다 잡혔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자윱니다.”
그간 억눌려 있던 주민들의 울분이, 백우진이 흘린 한마디에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앗!”
“드디어 이 빌어먹을놈들이 잡혔구나!”
“으하하하학! 콜록콜록!”
웃다 지치고, 사레들려 기침하기를 반복하면서 주민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백우진은 그 눈물 속에서 그들이 보내온 수치의 나날들이 보였다.
주민들 중 하나가 화를 이 기 지 못하고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왕 종구에게 집어던졌다.
퍼억
“크헉!”
강렬한 통증에 왕종구가 비명을 내지르자 마을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돌을주워 놈들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에라이, 죽어라!”
날아가는 돌덩 이의 개 수가 많아지 자 백우진 이 앞을 가로막으며 그들을 제지했다.
“자자, 여러분.”
울분에 찬시선이 그에게로향했다.
“이놈들한테 아직 빼앗을 재산이 많습니다.그러니 죽지 않게 되도록이면 팔과 다리 쪽을 중심으로 던지십쇼.”
“와아아아!”
백우진이 비켜서기가 무섭게 돌팔매질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모든 돌덩이들이 꽉찬 제구력을 선보이며 놈들이 죽지 않을 자리만을 골라서 찾 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돌팔매질에 열광하던 이들이 숨을 헐떡 이며 백우진에게로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대협!”
“대협께선 우리 마을의 은인이십니다!”
대협! 대협!
마을을 쩌렁쩌렁 울리는 환호성에 백우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 모습을 보며 제 일처럼 기뻐하고 있던 신예화가 별안간 앞으로 튀어나 와 소리쳤다.
“이 친구 이름은 백우진이에요!”
그러자 마을 주민들이 백우진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슬슬 부담을 느낀 그는 손을 들어 그들의 목소리를 잠재웠다.
“자자, 일단 거기까지들 하시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장내 가 조용해지 자 백 우진은 말을 이 었다.
“이곳 수레에 있는 재물들은 모두 주민들의 것이니 균등하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각기 빼앗은 양이 다른데 왜 똑같이 나눠 주냐는 식의 항의는 없었다. 그들은 백사파에게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뻐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주민들이 줄지어 서서 은자를 나누어 받기 시작했다.
백우진은 그들 중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처음 마을에 들렀을 때 찾은 객 잔에서 이 런저런 정보들을 알려준 점소이 였다.
“이봐, 점소이.”
“아! 대협!”
은자를 한 움큼 손에 쥔 점소이 가 헐레 벌떡 달려왔다.
백 우진은 그런 소년을 향해 물었다.
“어 떻게 , 진정 협 객 이 라 부를 만한 사람이 마을을 다녀간 것 같나?”
며칠 전 객잔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 점소이가 얼굴을 환하게 물들 이며 소리쳤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