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용봉 비무제 (龍퓒 쩤籌祭)
백우진이 수양리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것은 때마침 마을에 들러 하 루 머물다 떠나는 표국에 부탁하여 지금까지 백사파로부터 현령이 받아먹 은 뇌물 목록이 낱낱이 적혀 있는 비밀 장부를 도찰원으로 보내달라고 부 탁하는 것이었다.
“안돼, 안된단 말이다!”
그것도 현령이 보는 앞에서 직접.
백우진의 손아귀에 붙잡혀 자신의 치부가 담긴 비밀 장부를 싣고 마을을 떠 나는 표행을 바라보는 현령의 얼굴은 절망으로 가득했다.
한참을 엎드린 채 울부짖던 현령이 분기탱천하여 벌떡 일어나더니 백우진 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이놈! 나랑 약조하지 않았느냐! 백사파를 도와주면 장부를 내게 건네기 로 약속하지 않았느냔 말이 다!”
백우진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게 왜 그걸 믿남.”
“가문의 이름까지 걸고맹세까지 하지 않았냔 말이다! 섬서백가의 명예가 그리도 가벼운 것이었더냐!”
명 예를 중시하는 무림 인들은 제 가문에 다 대고 맹 세를 하는 것이 꼭 지 켜 야만 하는 어 떤 의 무로 생 각한다.
그러나, 상대는 백우진이다.
“그럼 우리 가문에 가서 따지시든가.”
아, 이제 곧옥살이 하게 될 텐데 갈시간도 없으려나.
깔깔깔!
분통 터지는 웃음소리에 백우진의 멱살을 쥐고 흔들던 손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나중에 정무학관으로 편지 한 장보내면 술이라도 한 병 보내드릴게.”
힘없이 축 늘어진 현령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백우진 일행 또한 마을을 떠날 채비를 했다.
“대협,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앞날에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마을 주민들 거의 대 다수가 입구에 나와 백우진을 배웅해주었다.
“앞으로 호구 잡히지들 마십쇼. 누가 또 삥 뜯으려고 한다? 그럼 일단 들 이박아요. 모든 싸움은 기세 가 중요하거든.”
“예! 앞으로는 절대 뺏기고 살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죽겠습니다!”
그렇다고 죽진 말고, 이 사람들아….
백우진은 신법을 운용하여 빠르게 마을로부터 멀어졌다. 자신들이 사라 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줄 것 같은주민들에 대한배려였다.
“이제 정말 다끝났구먼.”
“응!,,
“네에.”
현령까지 완벽하게 보내 버렸으니 수양리는 이제 정말로 깨끗해 진 셈 이 다.
앞으로 부임할 현령이 어떤 인물인가에 따라 또 달라지겠지만, 그건 또 그 때 지 나가는 협객이 알아서 처리할 일이다.
백우진은홀가분한 마음으로 수양리를 떠나복귀 길에 올랐다.
…
상위권 생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개인 연무실. 그곳에서 늦게까지 훈련을 하고 나온 유화연은 조금 앞선 곳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나란히 걷는 세 사람.
“야아, 술 그만 마시라고오!”
“아, 신경 끄고 형한테나 가라고!”
“못가겠는 걸 어떡해!”
“왜 못가는데 ?!”
“네가 자꾸 걱정되니까!”
“네가내 엄마냐고….”
언제나와 같이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그럴 때면 언제나 자신이 두 사람을 중재하곤 했었다.
그런데.
“싸,싸우지들마세요오.”
그 자리에, 누군가가 채워져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손을 꼼지락거 리는 모습. 그녀 가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갈연지….’
음침하고, 소심한 성격 탓에 모두가 기피하는 여인. 하지만 그녀는 몇 번인 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다.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좁고, 좀처럼 다가가기 힘든 성격이지만 제갈세가 의 여식과 안면을 트고 있으면 언제가 됐든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먼저 다가갔다.
기 억 속의 그녀는 대화하기 가 참으로 힘든 사람이 었다. 상대 방과 눈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말은 더듬고, 대화를 이어나가기 가장 힘든 단답만 반복했다.
“시,신소저는 걱정 마세요…. 제, 제가 백 공자 챙길게요오.”
말을 더듬는 건 여전했지만 힐끔거리는 식으로라도 눈을 마주치고, 스스 로 하고 싶은 말을 입밖으로 내고 있었다.
“흥,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고 말죠.”
신예화가 핀잔을 주듯 말하자 백우진이 그녀의 머리에 꿀밤을 날렸다.
“아얏!”
“너 인마, 제갈소저한테 왜 자꾸 날을 세워?”
“우으…, 네가속고 있는거라고!”
“속아? 내 가?”
백우진이 허,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가 왕년에 인간 거짓말 탐지 기 라고 해서, 인거탐이 라고 불린 사람이 야. ”
“네 가 언제 그렇게 불렸는데 猌 난 들어본 적 없거든!”
“그…, 네가모르는 과거가있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자식 아.
“아무튼, 너 내 말 명심해. 네가 알고 있는 제갈 소저는 진짜가 아냐.”
그녀가 신신당부하듯 말하자 오른쪽에 있던 제갈연지가 코를 훌쩍 이며 어 깨를 들썩 거 렸다.
“너,너무해요오.”
눈가에 물기가 차오르자 백우진이 익숙하다는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눈가 를 소매로 슥 훔쳐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신예화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너 우리 제갈 소저 그만 울려라.”
“너야말로 나한테 그러는 거 아니야!”
“내가 뭘.”
“너 요즘 나한테 은근히 차갑게 대하거든? 막 밀어내거든?”
신예화가 서러움 가득한 눈동자로 응시하자 백우진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너도 형한테 가서 위로 받으시던가.”
그녀의 말처럼 묘하게 반응이 차가웠다.
“너,씨이…! 두고 봐!”
잔뜩 삐친 얼굴로 달려가는 신예화.
백우진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휴, 밥상을 차려줘도 못 먹으니.”
답답하다, 답답해.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리자 제갈연지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죄,죄송해요. 저 때문에….”
“됐어,네 탓아니야.”
퉁명스러운 말투 안에서 은은한 배려심이 느껴졌다.
제 갈연지 가 금세 웃음을 되 찾았다.
어설프게 조잘거 리고, 백우진이 웃는다.
“…….”
심장이 크게 뛰었다.
저도 모르게 두 사람의 뒤를 따라 걷던 발걸음을 억지로 돌려 뛰기 시작했 다.
“하아, 하아…!”
한달음에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온 유화연은 거칠게 열고 들어간 문에 기 대어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에 조금 전 세 사람의 모습이 그려졌다.오른쪽에 서 있던 제갈연지 가 서서히 지워 지고 어느새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사소한 일 하나에 티격태격 싸우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보며 웃 고, 시 간 가는 줄 모르고 조잘조잘 떠 들어대는 모습이 세 상을 다 가진 사람 처럼 행복해 보였다.
상상은 거기까지 였다.
영원할 것 같던 시간이 끝이 났다. 연극이 끝난뒤의 무대처럼 어두운 장막 이 내려앉고 무대를 구성하던 주변 풍경, 인물, 주연들이 차례로 사라져간다.
“아….”
유화연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심장어림을꼬옥 움켜쥐었다.
모든 게 사라지고 어둠만 남은 공간에서 지독한 향수(鄕愁)를 느꼈다.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잃어버린 무언가를 계속 그리워했다.
사흑련 (邪黑말).
무림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 중 하나인 사파가 힘을 합치기로 결심하면서 만들어진 연합.
무언가를 결정하기 위해 무림맹에 파견된 구파일방 및 오대세가의 장로 들과무림 주요 인사들의 의견이 필요한무림맹주와는 달리, 사흑련주는 오 로지 자신의 의견 하나로 모든 선택을 좌우한다.
강한 자가 모든 걸 차지한다.
간단하고도 잔인한 강자존의 법칙 아래 에서 내 로라하는 사파의 고수들 을 모조리 꺾고 련주의 자리를 꿰찬그에게 허락된 영광이었다.
허나, 사연 없는 삶이 어디 있겠나.
패도(손道)의 정점을 내달리고 있는 사흑련주에게도 골칫거리 정도는 있 기 마련이었다.
“소공자께서 또 가출하셨습니 다.”
사흑련 내에서 유일하게 련주의 생각에 딴지를 걸 수 있는 인물, 사 뇌(楙腦)가 련주의 집무실을 찾아와 건넨 말이었다.
“여기, 남기고 간서찰입니다.”
“••••••.”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서찰을 내밀자, 사흑련주는 손짓 하나 없이 허공섭물 을 이용하여 서찰을 제 손에 끌어당겼다.
서찰에 남긴 내용은 무척이나 짤막했다. 그러나 매우 경 악스러웠다.
“용봉비무제에 참가하여 용이 되려 하니, 찾지 말아달라…?”
머리가 어질해졌다.
사흑련주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애 써 참아가며 사뇌 에 게 물었다.
“용봉비무제 란 것이 …,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었나?”
내가 관심을 가지 지 않은 사이에 그리 바뀌 었나.
사뇌 는 고개 를 저 었다.
“관람은 입장권만구할수 있다면 얼마든 가능하겠습니다만, 비무는 정무 학관의 생도들만이 참여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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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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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사고의 조짐이 보인다.
사흑련주가 작게 한숨을 내쉬 었다.
늘그막에 얻은 하나뿐인 자식 이라 오냐오냐 키운 것이 그리도 큰 문제였 나.
“암천대를 소집해라.놈이 사고를치기 전에 데려오라.또한, 다리 정도는 부러뜨려도 된다는 말도 꼭 전하도록.”
“예,그리 전하겠습니다.”
련주의 집무실을 나선 사뇌 가 곧장 암천대를 소집하여 목표를 하달했다.
“가출하신 소공자를 찾아오게 .”
“명을 받듭니다.”
“아,당연한얘기지만 털끝하나다쳐선 아니 되네.”
련주가 전한 말과는 전혀 다른 지시 였다.
소공자는 사흑련주가 말년에 겨우 얻은 단 하나뿐인 자식 이 었다.
말은 다리를 부러뜨려도 좋다고 말했지만,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아무도 감 당할수 없는종류의 것일 테니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용봉비무제라….”
알 수 없는 위 화감이 그의 머 리 에 다 대고 불길하다고 외 치는 것 같았다.
“기우인가, 아니면 징조인가.”
아슬아슬한 평화를 유지하고 있던 무림의 정세 가 곧 혼란으로 물들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