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30화 (30/215)

< 30화 > 용봉 비무제 軒迥퓒 쩤籌祭)

세월이 참 빠르게도 흐르는 것 같다고, 백우진은 불평 아닌 불평을 터뜨렸 다.

마지막 임무로 겨우 수행 점수를 챙기고 며칠 잠깐 놀았더니 어느덧 용봉 비무제의 시작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말하면 전야제의 시작이지만.

용봉 비 무제는 하나의 축제 다. 차후 무림을 이끌어 갈 용과 봉의 탄생을 목도하기 위해 수많은무림의 동도들이 한자리에 모여 벌이는축제.

전야제는 그 성대한 시 작을 알리 기 위 한 자리 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웃고 떠들다 용봉 비무제의 시작을 알림과 더불어 대진표를 공개하는 정도다.

“진짜시작인가.”

용봉 비무제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처음으로 제 실력을 드러내는 에피소 드다.

검선에게 배운 무공으로 용봉 비무제의 유력 우승 후보들을 하나둘 제치 고 마침내 신룡의 자리를 거머쥐게 된다.

사실 여 기까지는 아무런 문제 가 없다.

힘숨찐 주인공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여 모두를 놀라 게 하는 건 어느 소설에나 볼 법한 흔한 클리셰니까.

“문제는 그이후인데….”

다만, 역 량이 라곤 개 미 눈물만큼도 없는 작가라고 부르기 도 민망한 신이 이후에 넣은 드리프트가 문제 였다.

“여기서부터 집착,피폐,후회 같은것들이 들어갔단말이야.”

그 대 상은 당연히 신예 화와 유화연. 그리고 이후에 마주치 게 될 또 한 명 의 히로인.

백우진은 그중 신예화만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져 미칠 지경이 었다.

“용봉 비무제 전에 형이랑 이어주려고했더니.”

드리프트를 다시 틀어보기 위해 본격적 인 후회 , 집착이 시 작되는 용봉 비 무제 전에 백무혁과이어주면 그후보에서 빠질수 있지 않을까해서 어떻게 든 밀어주려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자꾸만 걱정 된다며 달라붙는 신예화의 태도 때문이었 다.

“벌써 시작된 건가…?”

은근슬쩍 차갑게 대하면 떨어져 나갔다가 다음날이 되면 나삐졌어요, 하 고 광고하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 찾아온다.

계속 옆에서 노려보기에 안주로 먹으려고 사둔 간식을 몇 개 건네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풀려선 조잘댄다.

이게 어쩌면 집착의 초기 증상이 아닐까.

“난감허네, 증말.”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담긴 눈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안간속이 허한느낌이 들었다.

“뭐하고 있냐, 나는….”

인간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돈, 사랑, 명예,권력,무력 등누군가에게 물어본다면 수백, 수천 가지는 나 올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이유는 하나로 귀 결된 다.

바로 목표라는 것.

죽어버린 백우진’의 몸에 들어온 백우진에게는 이렇다할목표가 없었다.

“돌아가는것도 그닥….”

처음 이세계에 떨어졌을 땐 하루라도 빨리 마왕 모가지를 잘라 빌어먹을 하꼬 작가에게 바친 뒤 지구로 돌아가는 것만을 꿈꿨다.

그런데 막상 돌아가 보니, 좋은 것도 잠시 더 라.

..

.......

무엇을 해도쉽게 질렸다. 어떤 것을 해도 긴장감이란 것이 생기지 않았다. 이세계에서 착실하게 기른 강인한 정신력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지만, 조금만 지나면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지구에서 하는 모든 경험은 이세계에서 겪은 살 떨리는 모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정신병자다됐네.”

전쟁을 겪고 일상으로 돌아와PTSD에 시달리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무언가를 끊어내어 죽인다는 건 그 사람의 정신을 마모시킨다. 그것이 설 령 자신을 적대하는 무언가일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닳고, 닳고, 또 닳는다.

그렇게 닳아버린 정신은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사는 애연가의 폐와 같다. 겉으로 보기에 숨을 잘 쉬고 사는 것 같지만 몸을 갈라 열어보면 새까맣게 썩어 제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죽였고, 죽는 것을 보았다.

신인지, 작가인지 여지껏 얼굴 한 번 보지 못한놈이 자꾸만 이 험난한 세상 속으로 밀어 넣는 건 어쩌면 지구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도는 자신 때문이 아 니었을까.

“어우, 씨발.”

내가무슨 생각을하는거람.

“납치범 새끼를 옹호하려 하다니. 스톡홀름 증후군도 아니고.”

그저 술에 취해, 밤이 주는 분위기에 취해 잡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 고 지 나갔을 뿐이 다.

“목표라.,,

지금의 백우진에게 결국 필요한 것은 목표다.

놈의 소설에 덕지덕지 붙은 태그를 모조리 깨부수겠다는 목표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이건 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테니 보다 더 몰두할 수 있 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곳에서의 엔딩 포인트는 역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그 소설의 최종 목표 즉, 엔딩을 보는 것이다.

첫 번째 이세계의 경우 엔딩 포인트가 명확했다.

마왕.

인류의 말살을 꿈꾸는 놈을 마계로 돌려보내는 것이 었다.

여기에도 마침 비슷한 것이 하나 있다.

마기를 사용하고, 인간을 광기로 물들이고, 광신도들이 모인 집 단.

마교(魔敎).

그 마교를 이끄는 수장, 천마(天魔).

놈이라면 이세계의 마왕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갈 길이 머네.”

이제 고작 마인 한 마리 썰었을 뿐이 다.

“일단영약부터 따고…,그뒤는나중에 생각할까.”

얼마나 걸릴지 알수 없을 아득하게 먼 길이다. 처음부터 그토록 먼 곳을 목표로 잡았다간 금세 지치고 만다.

첫 번째 빙의 때에는 요령도 없이 마왕목을 따는 것에만 집착했다가 찾아 온 번아웃 증후군에 몇 번이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가장 필요한 건 역시 영약이다.

백우진이 첫 번째 이세계 에서 배운 것들은 하나 같이 기운을 미친 듯이 잡 아먹는 것들뿐이 다.

그중 하나라도 사용하려면 최소 일 갑자의 내공 수위는 이룩해야만 가능 하지 싶다.

“수련하는 거 딱질색인데.”

마왕 모가지 따는 것보다 그 모가지 를 따기 위 해 준비했던 시 간들이 더 힘들었다. 그래 서 다시는 몸을 혹사시 키는 수련 따위 는 하지 않으리 라 다짐 했는데.

백우진 이 보기 에 이 무림 이 라는 곳은 힘의 논리 에 지 배 당하는 세 상이 다. 힘이 없으면 그 어떠한 주장도 낼 수 없다. 애초에 닿질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방식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어느 세상이든 힘의 논리가지배하는 건 똑같지 않던가. 단순히 그힘의 종류가무엇인지가 다를뿐이지.

백우진은 하루 종일 손에 끼고 살다시피 했던 호리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쥐었다.

중원 무림 에는 겉으로 보이는 것 외 에 보다 많은 문파들이 존재 한다.

현천문(賢天門)이 그러했다.

그들은 절진에 가려진 심산유곡에 틀어박혀 오로지 하나의 목표만을 위 해 살아간다.

이윽고 태어날 영웅을 점지하고,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

과거 수백의 제자를 두었던 현천문은 영락하여 강제적으로 일인전승의 문파가 되 어버렸다.

이유인즉슨, 지난수백 년간 영웅이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웅이 태동하여 그 삶을 찬란한 빛으 로물들일때다.

젊은 제자들은 깊숙한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세월을 낭비하는 걸 원치 않 았다.그렇게 하나둘씩 떠나갔고, 지금에 이르렀다.

신녀(神女)는 오늘도 어김 없이 밤하늘에 보일 듯, 말 듯 희 미하게 떠 있는 영웅의 별을 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웅이란게정말존재할까.”

두해 전,스승이자어머니나다름없었던 현천문의 38대 문주가고혼이 되 어세상을 떠났다.

39대 문주가 된 신녀는 현천문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하며 하루를 보 내고 있었지만 마음은 회의감으로 가득했다.

영웅의 별은 수백 년 동안 찬란한 빛을 내뿜지 못했다.

어쩌면 영웅은 더 이상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세상의 명운을 고작 한 사람이 뒤 바꾼다는 게 가당키 나 한 것일까.

의구심이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질고, 현명했지만 그녀 또한 고작 약관을 조금 넘어선 나이에 불과했다. 이따금씩 나가서 보았던 세상에 대한동경과그곳에서 살고 싶은 욕심을 떨 쳐낼수 없는.

심 산유곡에 틀어박혀 쓸쓸히 늙어 가는 제 모습을 상상하면 더 없이 가슴 이 아파오곤했다.

“하아.”

바로 그때였다.

수백 년간한번도 달라지지 않았던 영웅의 별이 내뿜는 빛이 짙어지기 시작한것은.

그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지친 마음이 자아낸 환각 내지 착각이라 여겼다.

허 나, 그것은 환각이 나 착각 따위 가 아니 었다.

“별이…!”

당장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던 별이 뚜렷한 빛을 뿜어내 기 시작했다.그리고태동하기 시작했다.

“아, 아아.”

얼마나 지켜봤던가.

얼마나 숨을 죽인 채 살아왔던가.

수백 년간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영웅의 탄생을 바라며 죽어갔던가.

마침내 별의 태동을 제 눈으로 목도한 신녀는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내 기 시작했다.

“스승님…!”

평생을 이 깊은 산속에서 살아오며 현천문의 가르침만을 위해 살다가 이 내 떠나버린 스승의 주름진 얼굴이 떠올랐다.

깊게 패인 주름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 흐르던 눈물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 었다.

더 이상 영웅은 필요치 않은 듯하니, 젊음을 낭비하지 말고 떠나라던 어미 와도 같은 스승의 유언 또한 귓 가에 맴돌았다.

“아아, 스승님…!

슬프고도 기뻤다.

하늘이 영웅이 내렸음이란 이 세상에 큰 위기가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뜻 임에, 이 깊은 산에서 쓸쓸이 늙어가지 않아도됨에.

그렇게 한참동안 참회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는 다 낡아빠져 볼품없게 변한 현천문의 문주실로 들어가 가죽으로 엮은 책자와 낡은 붓과 벼루를 챙 겼다.

작은 봇짐에 이것저것 챙겨 넣은 그녀는 마지막으로 스승님의 무덤을 찾 아가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다.

‘기다리셔요, 영웅님.’

당신을 보필하기 위해 금방 찾아 가겠나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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