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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31화 (31/215)

<31화 > 용봉비무제(迥퓒쩤籌祭)

정해진 인원 외에 출입이 절대 불가능했던 정무학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른 아침부터 온갖 물품들을 수레에 끌고 찾아온 상인들은 미리 지정받 은 노점에 물건들을 깔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수련에 몰두하느라 즐거움을 잊고 살았던 생도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거라곤 해가 저물어갈 즈음 시작되는 전야제에서 좋 은 대 진표를 받아보는 일뿐이 었다.

“백 공자아.”

오랜만에 수련도 하고, 술도 마시며 밤을 거의 지새운 백우진은 창문 아래 에서 들려오는 제갈연지의 의기소침한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아….”

해가 중천에 걸리지도 못한 것이, 이른 오전임을 말해주었다.

한 두 시진쯤은 잤을까.

기숙사 벽면에 걸린 동경으로 얼굴을 살피니 두 눈이 붉게 충혈되 어 있었 다.

“배,백공자아…!”

나름대로 힘 좀 줬다 싶은 목소리에 백우진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으 며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조,좋은 아침이에요.”

희미하게 미소 지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묘한 가학심이 피어올랐다.

“아냐, 전혀.”

너 때문에 깼잖아.

“아, 그, 그게 에.”

날카로운 시 선에 당황한 그녀 가 허둥대 기 시 작했다.

그녀를 놀릴 때에는 언제나 밀고 당기는 시기가 중요했다.

놀리는모양새가오래 지속되면 곧서럽게 눈물흘리니 그전에 다시 당겨 주어야 한다.

“장난이야:

“아우우…!”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마구 투정을 부리는 모양새가 꼭 어미새에게 치근 대는 아기새 같다.

“조금만 기 다리고 있어. 금방 내 려갈 테니.”

“네에….”

약간 토라진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를 둔 채 가볍게 단장을 마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기숙사를 나섰다. 그 전에 술로 입가심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눈에 들어오는 수많은 인파를 보며 헛바람을 들 이켰다.

“엄청 많네.”

용봉 비무제가축제에 버금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많 은 사람들이 몰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러다 꽉 차겠네.”

출입문 너머로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다 싶었다.

커다란나무 아래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닿지 않는곳에 있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아침부터 왜 부른거야?”

“그게..., 백공자랑같이 다니고 싶어서….”

백우진은 그녀가 유해한 생물체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코 꿰이 겠다.’

그녀의 술수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나 질 않는다.

아무리 경계의 벽을 쳐도 그것을 자연스럽게 넘어오는 걸 보면 그녀에게 다른 모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 구심 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럼 어때.’

맛만 좋으면 그만…. 아니, 귀 여우면 그만이 지.

그녀와 하도 함께 해서 그런지, 앞머리로 얼굴이 절반 이상 가려져 있음에 도표정에서 감정을 읽어내는 일이 무척이나 수월했다.

지금의 그녀는 용봉 비무제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 뭐가하고 싶은데?”

“뭐,뭐든좋아요….”

뭐든 좋다는 그녀의 말에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시선을 잡아끄는 볼거리들이 많아 단순히 걷기만 할 뿐인데도 썩 즐거웠 다.

출출할 땐 노점 에 들러 간식 거 리를 사먹 었다. 그걸 안주삼아 술을 마시 려 다 그녀 가 걱 정 어 린 시 선으로 보는 바람에 한 모금밖에 마시 지 못한 건 약간 의 아쉬움으로 남았다.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익숙한 목소리가 백우진의 귀를 때렸다.

“우진아!”

신예화였다.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이런 날까지도 왜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형은 어 디 다 두고 날 찾아오는데 ?”

“나야말로궁금한데. 너 왜 여기에 있어?”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백우진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얘기야, 그건.”

“백 가주님 오셨잖아. 너도 찾아 봬 야 하는 거 아니 야?”

드디어 그 날이 왔나.

‘백우진’의 가족들을 만나게 될 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다지 만나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가문에서의 취급 자체도 좋지 않은데 굳이 찾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용돈도 쥐꼬리만큼 주면서.’

달포에 한 번씩 가문으로부터 전해지는 용돈은 그야말로 빠듯하게 생활 해야만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안주조차 제대로 사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만든 가문에 대한 감정? 좋을 리가 있나.

“필요하면 알아서 부르겠지.”

먼저 가서 인사할 의리 따위는 없다.

자신은 당한 만큼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니까.

“그런가…?”

그래도 먼저 인사라도 해야하는 거 아닌가, 하며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백우진이 자신을 두고 앞서 나가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따라붙었다.

반대편에 있는 제갈연지로부터 뚱한 시선을 받은 신예화가 해맑게 웃었 다.

“제갈소저, 왜그렇게 절 쳐다봐요?”

“아, 아무것도….”

차마 백우진의 앞에서 당신 때문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제갈연지는 조용 히 시선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시간이 반복됐다. 즐거운 것들을 만끽하며 몰래 술 한 모금씩 당기 는 재미로 그녀들의 뒤를 따라 걸었다.

허나, 즐거움은 거기까지 였다.

지금까지 좋았던 분위 기를 산산이 부서뜨리고도 남을 만큼 듣기 싫은 목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면룡대협아니신가.”

남궁수 패거리 였다.

면룡이라는 단어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백우진에게로 꽂혔다.

“정말잘 생겼다….”

“어느 집안 공자님일까?”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 때문에 떨어졌던 기분이 다시 회복됐다.

백우진은 해맑게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 궁수야!”

다가올 때까지만 해도 웃고 있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남궁이라는 성씨는 그의 자부심 이요, 자긍심의 원천이 었다. 이를 건드리 는 것은 곧 역린을 건드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었다.

“말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쥐도 새도모르게 죽고 싶지 않다면.”

노기 가득한음성에도 백우진의 비아냥은 멈추지 않았다.

“시비를 걸러 온 거야, 아니면 화를 내러 온 거야?”

남궁수의 말문이 막혔다.

분명 상대방 기분을 더럽히러 왔는데 도리어 자신이 더러워지고 말았다.

말로는 놈을 이기기 어렵다고 생각한 남궁수가 입술을 짓씹으며 분을 토 해냈다.

“지금부터 기도해라. 나와 같은 조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세가 흉흉하게 피어오르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와 비무대에 서는순간, 네놈은 절대 걸어서 내려가진 못할 것이다.”

내 약조하마.

제 할 말만 끝내고 휙 돌아서는 모습에 백우진이 한 번 더 웃으며 손을 흔 들었다.

“그래, 궁수야! 비무대에서 보자!”

나는 걸어서 내려갈수는 있게 해줄게!

남궁수는 싸늘한 시선으로 백우진을 일별한 뒤 멀어져 갔다.

무겁게 내려앉았던 분위기가 서서히 해소되기 시작했다.

넋을 놓고 두 사람의 흉흉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신예화가 호들갑을 떨어댔다.

“너 정말 남궁수한테 그래도 괜찮아?”

백우진이 달라졌다는 건 그녀 또한 잘 안다. 백사파 두목의 침상 밑에 숨겨진 금고를 찾아낸 이후 숨어서 지켜본 백우진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인 수준이었다.

‘우진이가 엄청 강해진 건 맞지만.’

실종 이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강해졌지만 상대는 남궁수다.

오대 세 가 중 으뜸인 남궁의 후계 자라는 건 단순히 혈통만으로 따낼 수 있 는것이 아니다.

남궁세가 가주의 아들로서 태어났기에 모든 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그의 무재(武敵)가, 성취가드높은차기 남궁의 가주가되기에 충분하기에 주어 진 것이다.

대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남궁수가 백우진을 싫어하고 있다는 티 가 팍팍 났다. 혹여 그가 나쁜 마음을 먹어 백우진을 망가뜨릴까봐, 신예화 는 그것이 무척이나 두려웠다.

걱정과 우려가 그대로 읽히는 두 눈동자를 마주한 백우진은 난감한 표정 을 짓다가 이내 검지로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때렸다.

“아얏!”

“쓸데없는 걱정은 넣어둬.”

“ 아프잖앗!”

“닭꼬치나 먹으러 갈까.”

“앗,나도 먹을래!”

“저,저도...” 그녀는 먹을 것에 굉장히 약했다. …

해가저물기 시작할즈음, 길게 늘어진 노점에 등불이 내걸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전야제가 시작된다. 학관곳곳에 퍼져 있던 인파가 대연무장을 중 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 세상이 붉게 물들었을 때, 대연무장중앙에 설치된 비 무대 위로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무학관의 부관주, 언진섭이었다.

“출타 중인 관주를 대신하여 이 언모가 무림의 동도들을 뵙소이다.”

그가 포권을 취하자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 또한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

웅혼한 내공에 의해 증폭된 음성이 멀리 밀려난 관객들에게도 또렷하게 전해졌다.

겸손하고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백우진은 그 모 습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가식적인 인간.’

겉으로는 정인군자처럼 행동하나속은 전혀 다른 인물.

무자비한 냉혈한. 백우진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같은 인간이 아니라 길가의 돌멩이처럼 무가치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아 무런 감흥 없는 눈빛에 수많은 인간군상을 봐온 백우진도 살짝 놀랄 뻔할 정 도였다.

백우진은 저런 인간을 잘 알고 있다. 대개 권력을 손에 쥔 이들에게 많이 보여지는 표상이다.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은 사람 취급조차 않고, 오로지 제 기준의 안쪽에 있는 이들만 사람으로 대하는 가치주의 적인 인물.

“자, 동도들께서 가장 기다리고 있던 용봉 비무제의 대진표를 공개 하겠 소이다.”

그의 말이 끝남과동시에 뒤편에 돌돌 말려 있던 거대한 현수막이 펼쳐졌 다.

펄럭이는천 위에 수많은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갑, 을, 병, 정.

..

!.

....

총원 200명 중 부상 및 기타 사유로 인해 참가가불가능한 여덟 명을 제외 한 192명이 각조에 48명씩 배치됐다.

“이곳 중앙 비무대를 중심으로 각각 동, 서, 남, 북으로 네 개의 비무대를 설치해두었소.”

각 조의 48명은 그곳에서 비무를 펼친다. 상대는 같은 조에 지정된 무인 중 누구라도 상관없다. 비무대에 올라 세 번의 승리를 먼저 거두면 본선에 진 출하게 되며, 각조당열여섯명의 본선 진출자가 발생하면 비무는 종료된다.

“생도들은 명심하시오. 어디까지 올라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오.”

어떤 비무를 하느냐, 또 그로 인해 무엇을 배우느냐가 중요한 것이오.

“순간의 욕심으로 인해 일을 그르쳐 평생의 후회로 남지 않길 바라오.”

와아아아!

그 말을 끝으로 언진섭은 생도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비무대 밑으로 모습 을 감추었다.

본격적인 용봉 비무제의 시작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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