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용봉 비무제 (龍퓒 쩤籌祭)
제 갈연지 가 손쉽 게 唐승을 따냈다.
비무대 아래에서 벌벌 떨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는 생각보다 무자비하게 상대를 쓰러트렸다.
“첫 번째 상대는 며칠 의약전 신세 좀 지겠는데.”
가슴팍에 장법을 제대로 꽂아 넣었다. 기혈이 죄다 뒤틀렸을 테니 이를 해 소하려면 며칠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마지막승리 선언을 들은 이후, 제갈연지가 빠른 걸음으로 백우진을 향해 다가왔다.
“배,백공자.”
그녀는 백우진의 이름을 부른 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마치 이쪽에서 무 언가를 해주길 바라는 듯이 다소곳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잘했어.”
“히…!”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자신의 칭찬이 뭐 그리 기쁘다 고 저런 표정을 지을까.
..
“소,소원 들어주는 거 … 맞죠?”
열망이 담긴 눈동자가 대답을 갈구했다. 무엇을 부탁하려는지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너무 섣불리 얘기했나 싶었지만.
“들어줄게 .단, 내가 할수있는 선까지.”
“네,네…!”
그거면 충분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제법 웃겼다.
그때였다.
“우진아!”
신예화의 비무를 보러 갔던 백무혁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왔다.
“축하합니다, 제갈소저.”
“가,감사해요….”
백우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무혁이 이곳에 왔다는 건 신예화의 비 무도 끝이 났다는 얘긴데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예화는?”
“피곤하다며 먼저 기숙사로 간다더구나.”
“•••진건아니지?”
“하하, 걱정 마라.”
의아했다. 본선에도 진출했겠다, 기분도 좋은데 백무혁과 있을 시간을 마 다하다니 .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기 회 라면 피곤함 정도는 충분히 감수 할수있을텐데.
‘엄청 피곤했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했다.
“둘의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우진이 너는 나랑 잠깐 가야겠다.”
“어딜?”
“아버지께서 오신지 벌써 이틀째다. 얼굴은봬야지.”
내 키 지 않은 속내 가 표정 에 그대 로 드러 나자 백 무혁 은 쓰게 웃었다. 가족 간의 사이 정도는 좋았으면 하는데,영 쉽 지가 않아 보인다.
백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제갈연지에게 말했다.
“미안, 가봐야겠다.”
“괘,괜찮아요!”
“그럼 내일 보자고.”
“네에.”
제 갈연지를 그대로 둔 채, 백우진은 백무혁과 함께 길을 나섰다.
학관을 찾은 인사들 중 일부는 학관 외부에 지어둔 전각에서 지내고 있다. 백 가의 가주인 백 영학 또한 그곳에 머무는 중이 었다.
전각 2층 중앙에서 조금 떨어진 방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거라.”
을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누구인지도 묻지 않고 대뜸 들어오라는 말이 들 려왔다.
백 무혁 이 문을 열고 들어서 자 백 우진도 따라 들어 갔다.
고급스럽 게 꾸며진 방 안에는 중년의 사내 가 의 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 었다.
희끗한 머리와 달리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 안광, 50대가 되었음에도 여전 히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외모가유달리 눈에 띄었다.
백 영학. 섬서백 가의 현 가주이 자 무림 백 대고수 중 상위 권 에 속한 초절정 의무인.
그의 시선이 백무혁을 일별한뒤 백우진에게 멈췄다.
“얼굴 보기가 힘들구나.”
이틀째가 되 어서야 겨우 찾아오는 백우진의 무례함을 나무라는 말이었 다.
원래의 백우진이라면 한껏 움츠러든 모습을 보였을 텐데.
“예,뭐.”
이래저래 바쁘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너스레를 떨었다.
이를본 백영학의 눈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실종됐다가 돌아왔다고 들었다.”
“예.”
“그것도 최하급임무에서.”
책망하는 눈빛에도 백우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 그놈들이 생각보다 강하더라고요. 임무 난이도 설정이 잘못됐던 거죠
” •
산적 놈들 주제에 막 어우, 장난이 아니더라니까요.
백우진이 과장된 말투로 그때의 상황을 거짓으로 설명하자 무표정하던
백영학의 얼굴에 비로소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작은 분노였다.
쾅
찻잔을 내 려 놓자 탁자가 움푹 파였다.
“Q ... ”
상당한 경지에 오른 이들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어설픈 이들이 시도했다 간 찻잔은 그대 로 산산조각이 나고 탁자 또한 움푹 파이 는 게 아니 라 아예 쪼개져 버렸을 터다.
“그딴 걸 변명이라고 늘어놓는 게냐?”
노기를 띤 음성에도 기가 실려 있었다. 절정에 오른 백무혁조차 움찔거릴 정도로 제법 큰 기운이 실려 있었음에도, 백우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 한 시선으로 그의 눈을 응시 했다.
“변명해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뭐라?
“자식이 실종됐었다고 하면 아비로서 가장 먼저 물어야할 건 무엇일까요.
“괜찮냐, 다친 데는 없냐는 식의 걱정을 듣고 싶은 게냐.”
“에 이, 그런 걸 할 분이 아니란 건 잘 압니다.”
어떻게 하면 섬서백가를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만 평생을 거듭해온 인간이다. 그 외의 것은 그에게 있어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저는 아버지께 바라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도 제게 뭔가를 바라 지 마십쇼.”
“이놈이…!”
“아버지!”
대노한 백 영 학이 자리 를 박차고 일어나 백 우진을 향해 손을 휘 둘렀다.
“옴마나!”
백우진은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손을 피했다. 그러자 백영 학의 얼굴이 분노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차올랐다.
‘피했다?’
내공이 며 무엇도 실리지 않았으나 초절정 고수의 손찌검이 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백우진이라면 절대 피할수 없는 수준의 것인데.
의문을 해소하기도 전에 백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백영학이 손을 내렸다.
저 유화연과 파혼하기 로 했습니 다:
“뭣…!”
다시 들었다.
“이놈이!”
“아버지!”
조금 전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으로 쇄도하는 백영학의 앞을 백무혁이 가로막았다.
“비키거라.”
“진정하십시오.”
“진정? 진정이라했느냐? 저놈이 하는 말을듣고도…!”
“일단 자초지종 정도는 들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절대 비켜서지 않겠다는 듯 을곧은 눈빛에 백영학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도로 의 자에 앉아 백우진을 노려봤다.
“파혼하기로 했다는 것은, 유가의 아이 또한 이 파혼에 동의했다는 게냐 ?”
‘그렇죠.”
아무렴 파혼을 혼자 할 수 있나요.
백영학은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 말 한마디, 한마 디가 거슬렸다.
그는 최 대 한 분을 삭이 며 재 차 물었다.
“이유가무엇이냐.”
“남녀가 만나다헤어질 수도 있지요. 이유랄 게 따로 있나요.”
백 우진 이 대 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대 답하자 백 영 학은 단호한 표정 으로 고개를 저었다.
“너는 그럴 수 있겠지만 유화연 그 아이는 그럴 리가 없다.”
유화연은 백 영학이 보았던 후기 지수들 중 가장 총명하고 뜨거운 욕망을 지닌 여아였다.
언제나 자신의 속내를 꽁꽁 감추고 사는 듯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유 화연은 자신과 비슷할 정도로 권력욕에 심취해 있음을.
‘그런 아이 가 섬서백가를 저버릴 리가….’
없다, 라고 단언하려던 순간 백영학은 깨닫고야 말았다. 이곳은 정무학관 이고, 많지 는 않아도 섬서백 가를 뛰 어 넘는 명 가나 대 문파의 후기 지수들 또
한 존재 한다는 것을.
심 지 어 최하급 임무에서 꼴사납게 실종씩 이 나 당하는 약혼자가 그 아이 의 성에 찰리가 없었을 터.
“버림받은게로구나.”
백 영학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하자 혹여 또 다시 손찌 검을 할까 잔뜩 긴장 하고 있던 백무혁도 놀란 얼굴로 백우진을 돌아봤다.
“비슷하긴 한데, 어쨌든 저도동의한 일입니다.”
“누구더냐.”
“알아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건내가 판단한다.”
그러니 어서 말해라.
“말씀드릴 생각 없습니다.”
“이놈이 정녕…!”
탁자에 올려놓은 백영학의 손에 핏줄이 돋아났다. 당장에라도 쏟아질 듯 커진 눈동자를 보며, 백우진은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 만, 제게 더 이상 무언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저 또한 바라지 않으니.
“우진아!”
백영학이 나서기 전, 백무혁이 먼저 나섰다.
“아버지께 이 무슨 무례냐!”
목소리는 그를 책망하는 투였지만 이쪽을 마주하고 있는 시선에는 걱정 밖에 담겨 있지 않았다.
“어서 아버지께 사죄드리거라.”
어서
백무혁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장단에 맞춰주기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백무혁 또한돌아서서 백영학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이쯤 하시지요. 미처 말씀드리 지 못했지 만 우진 이가비무제 본선에 진출했습니다.일단거기에 집중하게 두시는게 좋을듯 합니다.”
백우진이 본선에 진출했다는 말을 들은 백 영학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아까 손찌검을 피했을 때부터 제법이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본선 진출까지 했을 줄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자식에게서 나온 낭보였기에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는 손을 휘 저으며 축객 령을 내 렸다.
“나가보거라.”
“그럼 이만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백영학을 향해 목례를 한뒤, 전각을 나섰다.
“어쩌자고 그런것이냐.”
백무혁이 가볍게 나무라자 백우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게.”
과민하게 반응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열받는걸 어떡해.’
백영학이 한모든행동은자신이 아닌 이미 죽은 ‘백우진’이 당한일이었다 . 엄밀히 말하면 자신이 분노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는뜻.
그럼에도 화를 낸 이유는 단순했다. 백우진은 그런 인간들을 굉장히 싫어 하기 때문이었다.
백우진이 생각하는 가족은 언제나든든하게 내 곁을 지켜주는 존재들이 다.
잘못한 일은 따끔하게 타이르고, 잘한 일에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칭 찬해주는.
백우진은 지구에서도, 첫 번째로 빙의된 이세계 에서도 가족을 갖지 못했 다.
사람은 자신이 가지 지 못한 것에 대해 자그마한 환상이 나 이상을 품기 마 련이다. 지구와 이세계, 두 번의 삶에서 모두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열망은 여전했다.
그래서 처음 백무혁을 보았을 때 내색하지 않았지만 무척 기뻤다. 자신의 생환을 이토록 기뻐해주는 가족이 있음에.
‘물론진짜가족은 아니지만.’
그것이 진짜가 아닌 거짓의 관계여도 말이다.
“화목한 가족이라는 것이 참으로 갖기 힘들구나.”
백무혁 이 한숨을 내쉬 며 말하자, 백우진 또한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게.”
동의하는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