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용봉 비무제(龍퓒 쩤籌祭)
본선 시작에 앞서 잠깐의 준비 시간이 주어졌다. 백우진은 이때를 기다렸 다는 듯, 기숙사에 들러 가진 돈을 전부 챙겼다. 그리고 절망했다.
“나 거지였지, 참….”
가문에 서 주는 용돈 50냥에 , 임무 수행을 통해 차곡차곡 모은 오십 냥까 지 더해 총 100냥이 백우진이 가진 전부였다.
“내 팔자야.”
내 주제에 부자는 무슨. 낙담한 백우진은 종전보다 훨씬 줄어든 속도로 앞서 찾아갔던 객잔으로 향했다.
“어서오십시오, 고객님.”
누구에게 거시겠습니까?
점소이 차림의 사내가 그를 반겼다. 걸음걸이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봐선 평범한 점소이 가 아니라 하오문에서 파견 나온 인물인 듯했다.
“글쎄…, 누구에게 걸어야하나.”
객잔의 한쪽 벽에는 본선에 진출한 생도들의 이름과 그들의 배당이 빼곡 하게 적혀 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인 명진, 한백, 남궁수는 각각 1.1 배의 저조한 배 당을 보 이는 반면, 백우진에게 이곳을 안내해준 두 사람이 이르기를 듣도 보도 못한 놈인 백우진의 비무제 우승에는 무려 50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배당이 책정 되어있었다.
“허허.”
완전 노다지다.
‘이건기회야!’
가난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백우진은 처음과 같은 표정과 자세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오문도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 혹시 …, 여기서 돈도 빌려 주나?”
먹 잇감을발견한 호랑이마냥점소이의 눈동자가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 다.
“소협의 신분에 달렸지요.”
신분만 확실하다면 못 빌려줄 것도 없다는 뜻이 었다. …
대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는 첫 번째 비무가 이 미 시 작한 이후였다.
백우진은 내 기 가 성행하던 객 잔에 서 섬서 백 가의 이 름을 팔아 돈을 빌리 는데에 성공했다.
‘고작 300냥이 뭐 야, 300냥이.’
적잖은 돈임에는분명했으나 섬서백가의 이름까지 내건 것치곤분명 적은 돈이었다.
너무 짠 거 아니냐는 백우진의 항의에 점소이가 말한 사유는 더 가관이었 다.
[백우진 공자께선 섬서백가 내에서 그 입지가굉장히 좁은 것으로 알고 있 습니다만. 저희로선 그 300냥또한 넉넉하게 쳐드린 겁니다만.]
돈을 빌리는 을의 입장인 데다 분명 그 평가 또한 정확해 반박하지 못했다
“뒤졌어, 아주.”
백 우진은 그들이 빌려준 돈으로 50배 라는 말도 안 되 는 역 배 를 성공시 켜 놈들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만들어 주리라 다짐했다.
“하앗!”
“흐럇!”
그가우승을 다짐하는 사이, 첫 번째 비무는 점점 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두 생도의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치 열한 싸움에 백우진은 혀를 찼다.
살초만 펼치지 않았다 뿐이지 패배하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질 것만 같이 살벌했다.
그들이 저렇게 애쓰는 것도 이해는 갔다.
‘저 사람들 때문이겠지.’
그들이 어 디 한 군데 부러질 각오를 하고서 라도 잘 보이 길 바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무대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객석 중 가장 상석 에 앉아 비무대 를 내 려 다 보고 있는 무리 . 그리고 그들 중 한가운데, 가장 좋은 의 자에 앉아 있는 백발 이 성성한 노인이 시선을 잡아끈다.
‘삼존이랬던가.’
일마(銜魔), 일황(銜皇), 삼존(三尊).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한 다섯을 일컫는 별호였다.
일마란 마교를 이끄는 수장인 천마를 일컬음이요, 일황이란 사흑련을 이 끄는 수장 흑사패황을 일컬으며, 삼존은 정파를 지탱하는 기둥인 세 존자를 말함이니.
노인은 삼존 중 일인이 자 현 무림맹을 이끄는 맹주이 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현학(玄鶴). 삼존 중 으뜸으로 알려진 검존(劍尊)이었다.
“대단하긴 하네.”
겉으로만 보면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다. 이는 곧 그가 화경에 도달한 무인 들만이 이룩할 수 있다는 반박귀 진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뜻일 터.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도달한 이를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잊 고 살았던 호승심이 머리를 빼꼼 들어 올렸다.
“나중에 한번쯤은붙을 수 있겠지.”
고수라는 족속들은 다 똑같다. 아닌 척해도 속에는 남들보다 몇 배나 강 한호승심을품고 있다. 자신이 상대하기에 충분해 보이는실력을지닌 자가 도전해 온다면 그 또한 거절치 않으리 라 확신했다.
백우진이 한눈 팔린 사이, 비무는 착실하게 진행됐다.
사 번이었던 황보준걸이 상대를 단숨에 때려눕히는 모습에 백우진은 흡 족하게 웃었다.
“이제야 좀 쓸만하네.”
일말의 방심조차 하지 않는 거구는 백우진과는 또 다른 의 미로 한 폭의 그 림 같았다.
“하아앗!”
십이 번인 신예화또한 단 일격에 상대의 무기를 깨트리며 승리를 거머쥐 었다.
“어?”
그녀의 번호를 뒤늦게 인지한 백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대로 가면 곧장 다음 경기에서 그녀를 만나게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미치겠네:
소꿉친구를 제 손으로 탈락시켜야 한다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에잇, 기분이 나쁘니 한잔해야지.”
좋은 명분으로 한잔 걸쳤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백우진의 차례가 다가왔 다.
넓은 비무대 한가운데에 서서 구왕수와눈을 마주쳤다. 아까 전과는 사뭇 다르게 제법 눈에 힘을 준 채로 시선을 피하지 않는 녀석의 모습에 백우진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백 공자님 꼭 이기세요!”
“꺄아아악!”
어느새 백우진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여인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죽어라!”
“저 자식 죽여버려!”
“구왕수 너만 믿는다아!”
반대급부로 남자 관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 구왕수. 졸지에 든든한 아군이 생 긴 녀석의 어 깨가 살짝 치 솟았다. 이 것이 바로 반사이 익 이 라는 것 일까.
“비무시작!”
심판이 물러남과 동시에 구왕수가 달려들었다.
“히 야압!”
멋진 기합성과함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기필코이 길 테다!’
실전 비무학수업에서 백우진에게 꼴사납게 패배한뒤, 구왕수의 인생은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온갖 아양을 떨어가며 겨우 무리에 낄 수 있게 되었건만 남궁수의 시선은 차가워졌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놈들마저도 조롱을 일삼았다.
심지어 1학년 생도들 전부가구왕수를 얕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적에 한참 못 미치는 녀석이 뜬금없이 비무를 걸어오는 일도 더러 있었다.
‘이게다백우진 때문이다!’
그 모든 탓을 백우진에 게로 돌렸다. 처음 대진표를 보았을 때는 당황했지 만 지금은 아니 었다. 오히려 기회 라고 여겼다.
‘마지막기회다.’
수많은 관객 앞에서 놈을 묵사발로 만들어버리면 남궁수 패거리 내에서 잃어버린 입지를 다시 다질 수 있을 테지.
패배 이후 절치부심한 검격이 백우진을 향해 쇄도했다.
“오.,,
백우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첫 비무 때보다 훨씬 성장한 연격이 사방으 로 휘몰아쳤다.
정직했던 검로 또한 어느 정도 보완한 듯, 변초가 섞여 있어 공격 방향을 예측하기 가 조금 더 까다로워 졌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성장세를 보인 건 확실하나, 거기까지 였다.
“운이너무안좋다, 광수야.”
“내 이름은… 구왕수다, 이노옴!”
광수라고 불리며 참아온 모욕의 세월이 검에 담겼다. 검속이 한층 빨라지 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닿지 않았다.
‘대체 왜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간격 속을 노니는 백 우진의 모습은 무척 이 나 자유로워 보였다.
‘왜 그리도 쉽게 피하는 거냔 말이다!’
구왕수가 이 를 악물었다.
“대진운이 너무 안 좋네.”
지금 녀석의 실력이라면 팔 강은 무리일지 몰라도 십육 강은 노려볼 만했 을텐데.
“걱정 마라,광수야. 내가너의 몫까지 짊어지고올라갈게!”
바람에 날아갈듯하늘거리던 팔을 휘둘렀다.손에 쥔 검이 구왕수의 검로 를 모두 끊어 내 며 앞으로 나아갔다.
구왕수는 당황했으나 이내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았다. 짓쳐드는 검은 절 대 빠르지 않았다. 보법을 활용한다면 충분히 피할수 있으리란확신이 섰다.
“이딴것쯤, 피할수있…!”
첫걸음을 떼려는 찰나, 느릿하게 다가오던 검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어떻 게든대응하고자 했지만 허사였다.
어느새 백우진의 검이 목에 닿아 있었다.
“아, 아아…!”
처음과 똑같다.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고 또 목을 내어주고 말았다. 과거 의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자 구왕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고생했다, 광수야.”
“으,으윽…!
변 명조차 할 수 없는 완벽 한 패 배 였다. 그때와 마찬가지 로 보이 는 환한 웃 음에, 구왕수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백우진 승!”
여인들의 환호성이 뒤따랐다.
백우진이 처음 비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 상석에 앉아 있던 인사들중 많 은 이들이 불만 섞인 음성을 토했다.
“기본이 안된 놈이로세.”
“비무전에 술을 퍼마시다니.”
쯔쯧!”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 같이 고수인 그들이 백우진의 상태를 알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섬서백가에 저런 녀석이 태어나다니.”
“호부견자라더니….”
“허허, 백 가주께서 상심이 크시겠소이다.”
무림맹 내에는 공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며 오대세 가의 자리를 노리 는 섬서백 가를 시 기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이 기다렸다는 듯 가문을 깎아내리 자 백 영학은 불편해진 속내를 애 써 숨기기 위해 시선을 비무대에 고정시킨 채 입을 꾹 다물었다.
| |..
......
그때 아비마저도 입을 다문 상황에서 백우진을 옹호하는 이가 나타났다.
“허허, 내생각은조금다르오만.”
“매,맹주?”
무림맹주 현학이 었다.
인자한 그의 시선은 백우진에게서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본 듯했다.
“일단지켜보시구려.”
“크흠….”
이중에서 가장고수가그리 말하니 이때다싶어 신나게 떠들어대던 이들 은 모두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비무가 진행될수록 백우진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
날카롭게 쏟아지는 검 격 속에 서 노니 는 모습은 보는 이의 오금마저 저 릿 하게 만들 정도인데 정작본인은 평안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젠장, 분명히 반푼이라고 들었는데.’
‘첫째에 이어 둘째까지…, 자식 복도좋구나, 백영학!’
배알이 뒤틀린 이들이 신음하는 소리에 백영학은 조소를 머금음과 동시 에 의 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어찌…?’
상상을 아득히 뛰 어넘는 성취에 놀라는 한편, 백우진이 보여주는 기묘한 움직임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저보법은무엇이냐.’
섬서백가의 무공은 오로지 쾌에 집착한다. 보법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백우진이 보여주는 유려한 곡선의 움직임 대신 빠르고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상대의 눈을 어지럽힌다.
‘설마 기연이라도 얻었단 말인가.’
자연스럽 게 백우진의 실종이 떠 올랐다. 어쩌 면 그 한 달이 라는 시 간 동안 무림에서 낭만처럼 전해지는 기연이라는 것을 손에 넣은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다만….’
탐이 났다.백가의 무공은 직선적이다.그렇기에 빠르지만 동시에 눈에 담 아낼 수만 있다면 공격을 예측하는 것이 쉽다는 단점 또한 존재했다.
지난 세월 백가의 가주들은 오로지 보다 빠른 속도에 집중하여 장점으로 단점을 덮으려 했지만 백 영학의 생각은 달랐다.
‘저 무공과 백섬검결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면 …!’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는 건 단점보다 큰 장점이 아니라 단점 자체를 없애 는 거라고 생 각했다.
백영학의 눈에는 지금 백우진이 펼치는 무공이 백가의 무공을 더욱 살릴 수단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