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37화 (37/215)

< 37화 > 용봉 비무제 (龍퓒 쩤籌祭)

용봉 비무제를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이들은 비무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환호와 박수를 통해 그들의 지난 노고를 치하해주었 다.

허나, 아무리 공정하려 노력한다해도 기대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다.

정무학관에 입관했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훗날 정파의 무림을 이끌어갈 동량지재 가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나, 그들이 진정으로 보고 싶은 것은 그 러한동량지재들 사이에서 우뚝서게 될 뜨거운 태양이었다.

지금, 그 태양에 가까운 이가 경신법을 운용하며 날렵한 움직 임으로 비무 대위로 올라섰다.

“와아아아!”

남궁수! 남궁수!

목이 터져라 자신을 연호하는 이들을 향해 남궁수는 손을 흔들어주었다.

짜릿한 감각이 그의 몸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그래, 이거다.’

그는 남궁세 가 가주인 아버지를 통해 처음 무공을 배우던 순간을 기 억한 다.

그저 가르쳐주는 대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기재 중의 기재가 나왔다며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들이 기뻐하고 비슷한 또래의 방계 혈족들이 우 러러보던 그때.

천추제일검가, 대 남궁세가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집중되던 그 기분 은 남궁수에게 있어 잊지 못할 추억의 순간으로 남아 있다.

‘더 환호해라, 더 !’

수많은 무림의 동도들이, 무림맹주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오로지 자신 만을바라보고 있다는것이 기쁘기가 한량없어 주체할수 없이 치솟는 입꼬 리를 내리느라 안간힘을 써 야만 했다.

힘겹게 본선에 진출하여 64강에서 곧장 남궁수와 비무를 펼치게 된 운 나쁜 생도가 힘 없는 걸음으로 비 무대 위 에 올라섰다. 이 미 패 배 를 예 감이 라 도 한 듯, 전의 를 상실하고 맥 없이 떨 어지는 고개를 고정시 키 려 애쓰는 모습 이 남궁수의 쾌감을 더욱배가시켰다.

꼬리를 만 강아지처 럼 좌절감과 절망감에 고개를 푹 숙인 패 배 자. 그 모든 감정 이 자신으로부터 기 인했음을 생 각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연호 할 때와는 또 다른 음습한 쾌감이 전신을 지배 했다.

“비무시작!”

상대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들릴 선언이 떨어졌다. 남궁수는 검을 곧추세 우며 상대방을 향해 소리쳤다.

“먼저 들어오게! 내 삼수를 양보하겠네.”

비무에서 삼수를 양보하는 것은 보통 실력의 차이가 확연한 강호의 선후 배 관계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도량을 보일 때에 사용한다.

지금처 럼 동등한 입 장에 서 치르는 비무에 서 삼수를 양보한다는 것은 눈 앞의 상대를 한없이 깔보고 있다는 말과 진배없는 것이 었다.

평범한 가문의 자제가 그렇게 말했다면 관객들 사이에서 험한 말이 튀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허나, 남궁은평범한 가문이 아니었다.

“역시 남궁세가! 대단한자신감이야!”

“암,오대세가의 차기 가주라면 저 정도배포는 있어야지!”

오만하고 광오한 발언마저도 다른 이도 아니고 남궁이라면 그럴 수 있다 는 식 으로 받아들여 진다. 현 무림 에 서 오대 세 가, 그중에 서도 으뜸으로 손꼽 히는 남궁세 가가 가지는 위 상이 어 떠 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 시 였다.

“이익…!”

온갖 소음에 심 리 적으로 벼 랑 끝까지 내 몰린 상대 가 자신을 이토록 초라 하게 만든 남궁수에 대한원망가득한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쥐 도 궁지 에 몰리 면 고양이 를 문다는데, 사람이 라고 다를까.

남궁수에 대한 분노에 패배감, 무력감마저 잊어버린 그는 성난 멧돼지 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우아아아!”

속에 가득 차오른 울분을 마구 휘 둘렀다.

검, 나아가 인간의 손에 들린 무기는 그 사람의 내면과 맞닿아 있다.

내면이 평온할수록 지금까지 숱하게 휘둘러왔던 최적의 방향으로 무기가 나아가는 것이고, 온갖 감정에 침식당해 불안정할수록 공격 또한 나아가야 할 경로를 상실하고 방황하게 된다.

지금 그의 공격이 그러했다. 불안정한 마음을 대변하듯, 남궁수를 향해 찔 러 들어가는 검극이 수 갈래로 흔들리고 있었다.

상대의 거친 공격을 흘려내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고 있던 남궁수의 얼굴 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변했다.

“이제 슬슬 끝내지.”

고작 64강에서 시간을 끌 생각 따위는 없었다. 관객들에게 남는 것은 결 국 짧고 강렬한 찰나의 순간이다. 남궁수는 이를 위해 하나의 수를 준비했다 •

‘잘 봐라, 너희 모두를 개 안시켜줄 테 니!’

남궁세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검법의 수는 수십에 달한다. 그것들은 천추 제일검가라는 이명에 걸맞게 하나 같이 무림의 일절로 꼽혀도 손색없는 위 력들을 자랑한다. 남궁에 속한 혈족과 무사들은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검법 을 찾아 집중적으로 수련하게 된다.

그러한 검법들 중 남궁세가의 혈족조차도 마음대로 익힐 수 없는 검법이 두 가지 존재한다.

하나는 남궁세가의 직계 혈족들만이 익힐 수 있는 창궁무애 검법 (蒼舿無璯劍法) 이다.

중과 연의 묘리를 담고 있어 광활한하늘과 같이 사방팔방으로 휘몰아치 는 연격 하나하나에 중검의 묘리까지 담아휘두르기에 막아내는 것도, 피하 는것도 쉽지 않아무림에서 가장 까다로운 최상위 절기로 손꼽힌다.

그리고 남은 한 가지. 남궁세 가의 가주와 훗날 가주 자리를 이 어받게 될 소가주만이 익히는 것이 허락되는 남궁세 가의 오의.

제왕검형(帝王劍形).

세상을 아우르는 제왕의 위엄과 위압을 검에 그대로 담아낸 검술.

준비된 일검을 휘두르기 전, 남궁수는 상대방에게만 겨우 들릴 법한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이 검술에 패배하는 걸 영광으로 알거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둘러진 검은 그 엄중한 기세와는 달리 평범했다. 허나, 이를 눈앞에 둔 상대는 검이 제 목에 닿는 순간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못했다.

“남궁수승!”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넋을 놓고 있던 관객 중 하나가 홀린 듯 입을 열었 다.

“제왕검형이다…:

단 일검에 불과했지만 평범한 무인은 평생동안 한 번도 보기 힘들다는 남 궁세가의 오의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밀어 넣었다.

“우와아아아악!”

“제왕검형이야! 저걸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남궁 제일의 기재라더니, 벌써부터 제왕검형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들불처럼 퍼진 환호성은 남궁수가 비무대를 내려가고도 한참이 지난 뒤 에야 잦아들기 시작했다.

상대 에 게 최 대 한의 절 망을 심 어 주고 환호와 박수 속에 서 비 무대 를 내 려온 남궁수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백우진을 발견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가 물었다.

“비무는 즐겁게 봤나?”

이것이 나의 실력이다, 어떠냐 하고 대놓고 던지는 물음에 백우진은 시큰 등한 표정으로 일관한 채 대 답했다.

“별것도 아니더구만, 뭘.”

“뭐,뭣…!

제왕검형 만 놓고 보면 대 단한 검술임 에는 틀림 없었다. 허 나, 남궁수가 펼 치 는 제 왕검 형은 여 러 모로 문제 가 많았다.

성취가대단히도 부족했다.형만그럭저럭 갖췄을뿐이지, 안에 담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 두 가지만 해도 치명적인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지적할 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다.

남궁수의 얼굴이 당혹감으로물드는 사이, 더 이상그와 입씨름하고싶지 않은 백우진은 녀석을 쌩하니 지나쳐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웬만하면 나한테 제왕검형은 쓰지 마라.”

그러다 큰일 난다.

살랑살랑불어오는 바람처럼 귓가에 닿은 그 한마디에, 남궁수의 얼굴이 악귀 보다 더 무섭게 변해버 렸다.

64강비무가모두끝이 났다.

올라갈 만한 사람들은 모두 올라갔다. 남궁수, 한백, 명진은 말할 것도 없 고유화연 또한상대를 가볍게 제압하며 승리를 거머쥐었다.

백우진은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제갈연지는 오랜만에 가족들을 봐야 한다며 아쉬 운 얼굴로 떠 나갔고, 신예화는 뭐 가 그리 불만인지 눈을 마주치 기 가 무섭 게 고개를 휙 돌려서 사라졌다. 백무혁은 그런 그녀를 달래주라며 보내버렸다.

“오랜만에 각 잡고술이나 한잔… 아, 나돈이 없구나.”

기분도 괜찮겠다, 괜찮은 안주에 술이나 한잔 하려 했더니 텅 빈 주머니가 발목을 붙잡았다. 동전 한푼까지 탈탈 털어서 모조리 내기에 걸어버린 탓이 다.

“쓰읍.

그래, 술 마실 때 안주는 사치긴 해.

애 써 자위하며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 해 등을 돌린 순간이 었다.

“백우진?”

등 뒤 에 서 듣기 만 해 도 교태 가 흘러 넘 치 는 간드러 진 목소리 가 그를 불러 세웠다.

뒤 로 돌아서 자 보인 것은 무척 이 나 아름다운 여 인 이 었다.

내리쬐는 빛을 모두 빨아들이는 듯한 흑발과 게슴츠레 뜬 눈은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은 요염함과 퇴폐미를 발산했고, 굴곡진 몸매를 조 금씩 드러낸 특유의 무복에선 남자의 시선을 강제로 잡아당기는 마성이 느 껴 졌다.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아찔하고 동시에 위험한 냄새를 느낀 백우진의 경계도가한 단계 상승했다.

!...

.......

“뉘 슈.

판타지 세계에서 동료의 죽음만큼백우진을 힘들게 했던 것이 한 가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유혹이었다.

그중에 서도 서큐버스처 럼 태생 자체 가 사람을 매혹시 키는 게 아니 라, 상 대를 매혹시키기 위해 매력을 가꿔낸 자들이 백우진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 들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힘을 자신의 것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백우진에게 보낸 것은 극도로 훈련된 여인들이 었다.

무의식적인 매력이 상대를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는 느낌이라면, 의 식해서 만들어낸 매력과 분위 기는 상대를 숨도 쉬지 못하게 꽉 졸라매는 느

낌이었다.

지금 눈앞의 여인이 그때의 여인들과 비슷한 색기를 풍겼다. 뚜렷한 목적 을 위해 가꿔낸 위험할 걸 뻔히 알면서도 넘어가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도사린다.

그리고 백우진은 그러한 기색을 통해 눈앞의 여인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 다.

그녀의 붉게 칠한 요염한 입술이 달싹였다.

“반가워. 당선영이야.”

독봉(毒鳳) 당선영.

백 무혁과 마찬가지로 唐학년 생 도들을 이끄는 용봉 중 한 사람. 그러나 그 녀는 남자 생도들 사이에서 독봉이라는 별호보다 더 많이 불리는 별호가 따 로 존재했으니.

독지주(毒潎췡).

그녀의 교태 어린 음성과 몸짓에 홀려 접근한 남자들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모두가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그때부터 그녀는 독거미 라불리기 시작하며 남자생도들의 기피의 대상일순위에 이름을올리게 되 었다.

‘•••라고소설에적혀 있었지.’

그렇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히로인 중 한 명이 다.

그리고 동시에 백우진이 작가명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소설을 읽게 만들 어 무림 세계에 끌려오게 만든주범이기도 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