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용봉 비무제 軒迥퓒 쩤籌祭)
“흐헤헤, 아얏! 히힛….”
자신의 품에 안겨 들썩 거리며 웃고 또 그 때문에 아파하기를 반복하는 제 갈연지의 모습에 백우진은 어이가 없었다.
“하나만 하지 ?”
“헤헤….”
웃기만 하기로 했나 보다.
피 흘리는 그녀를 의 원 에 게 보이 기 위 해 의 약전으로 향하는 도중, 비무대 를 내려오기 전 마주쳤던 유화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쪽도 상태가 영 별로였는데.’
기의 수발이 자유로운 경지에 다다르지 않은 이상 지금의 경지로는 변화 를 꾀하기 가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 었다. 억지로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한 데다 강렬한 초식으로 역습까지 가했으니 그녀의 내부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을지 쉽게 가늠이 되질 않았다.
‘적어도 佒강비무는 힘들겠어.’
단시간에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의 내상이 아니었다. 아마 佒강 비무는 기 권하거나, 혹여 싸운다고 하더라도 원래 실력의 반조차 제대로 내기 힘들 터.
‘알아서 잘하겠지.’
‘백우진’의 기억 속그녀는 똑 부러지는 여인이었다.본인의 내상 정도를 간과하여 더 큰 문제를 불러올 만한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뭣하면 궁수도 있고.’
명색이 남궁세 가의 소가주인 녀석이니 내상을 치료하는 데에 효과적인 약 정도는 얼마든지 가지고 있을 테 니 그녀 가 원 한다면 얼마든지 내 어줄 것 이다.
‘그것보다….’
앞선 것들보다 신경 쓰이는 건 딱 하나다. 내상을 입은 뒤 그녀가 선보인 마지막일격.
다분히 신경질적이고, 감정적인 공격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입을 내상의 정도를 생각했다면 초식을 전개하기보다 제갈연지의 목에 검만 겨눴어도 충분했을 텐데 왜 그녀는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비무 전에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던데, 혹시…?’
둘 사이 에 말싸움이 라도 오갔나 싶은 마음에 제 갈연지를 스윽 내 려다봤 다.
“헤헿…, 히히.”
“허허.”
에이, 설마그럴 리가.
이런 찌질이 가 누군가를 그 정도로 분노케 할 수 있을 리 가 없다고, 백우진 은 확신했다.
의약전에 도착해 상주 중인의원에게 제갈연지를 내려놓았다.
의원은 그녀의 팔과 다리에 난 상처들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별다른 기색 없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피는제법 흘렸지만상처가그리 깊지는 않구려.”
의원은 지 나가는 의 녀에 게 따뜻한 물과 마른 면포를 가져오도록 지시한 뒤,금창약을 꺼내어 백우진에게 건네주었다.
“의녀가 가져다주는 면포에 물을 적셔 그녀의 피를 닦아주시구려.그다음 에 금창약을 상처 부위 에 골고루 발라주시 면 되오.”
“•••그걸 저보고 하라고요?”
당황한 백우진이 되묻자 의원은 그에게 주변을 둘러보라 말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자 제법 많은 환자들이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 하나 같이 배를 부여잡고 드러누운 걸 보면 동시다발적으로 배탈이라도 난 게 아닐까싶다.
“먹거리를 팔던 노점 중 일부가 상한 재료를 사용한 것 같소. 덕분에 의약 전이 미어터지기 일보 직전이라오. 그러니 공자가 이해 좀 해주시구려.”
주변에서 신음하는 환자들을 보니 확실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었다.
“알겠습니다.”
“꺄하윽!”
대답을 내기가무섭게 누워 있는 제갈연지의 입에서 기쁨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떨떠름한표정을 짓고 있는 의원을 향해 백우진은 황급 히 그의 등을 떠밀었다.
“자자,환자들이 기다립니다.저희는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십시오.”
“고, 고맙소.”
떠밀린 그대로의원이 떠나가고, 둘이서만남게 되자백우진은 자신의 눈 치를 힐끔힐끔 살피고 있는 제갈연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갈소저.”
“네에….”
“변태야?”
“히 읍!”
뭐 야, 왜 좋아하는데.
오히려 좋다는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에 백우진은 엉덩이를 씰룩 여 그녀로부터 살짝 멀어졌다.
어색 한 침묵이 이 어지는 사이,의 녀 가 면포와 따뜻한 물이 담긴 대 야를 내 려놓고 사라졌다.
“팔내봐.”
“네엣.”
기다렸다는 듯이 팔을 들이미는 제갈연지를 보며 백우진은 웃고 말았다. 은근히 미워할 수 없는 여자다.
면포에 물을 적셔 딱지처럼 눌러 붙은 피를 살살닦아냈다.
“읏,으읏…!”
아파서인지, 기뻐서인지 모를 간드러진 신음이 백우진의 귀를 자꾸만 자극했다.
“그,소리좀 안낼수는 없나?”
“죄,죄송해요오….”
촉촉한 눈망울로 이 쪽을 바라보는 모습에 묘한 가학심 이 자극되 는 듯 하자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으론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지금 넘어가 버리면 어딘가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버릴 것만 같 다.
가까스로 팔다리 에 붙은 피를 말끔하게 닦아낸 뒤 금창약을 발라주었다.
상처에 직접적으로 손가락이 닿아서인지 조금 전보다 그 신음이 커져 참아
내느라 애를 먹어야만 했다.
“자,끝났다.”
“으우우….”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밍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제갈연지.
“밥이나먹으러 가자.”
아쉬움을 달래려 한말에 제갈연지가 웃는 얼굴로 뒤따랐다.
佒강전이 시작됐다.
비무대에 올라선 백우진은 비장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상대, 황 보준걸과 시선을 나눴다.
예선 비무대 때만 해도 짐승의 이빨처럼 모든 걸 물어뜯을 듯 삐죽삐죽하 게 솟아있던 기세가지금은제법 안정적으로 갈무리되어 있다.
“이날만을 기다렸다.”
겉으로 드러난 예기(銳氣)가 줄어든 만큼, 속에서 벼린 칼날은 그만큼 더 날카로워 졌다.
“비무시 작!”
백우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황보준걸의 눈높이 가 그보다 아래로 낮아 진다.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고요한 기세 속에 그가 내민 주먹만이 흉흉한 기세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좋아.”
백우진은 순수하게 그에게 감탄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분위 기와 태도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 다.
“첫 번째 숙제를 잘해결한 것 같으니까.”
백우진은 허리춤에 찬 검 대신 호리병에 손을 가져갔다.
관객, 무림맹 주요 인사들, 황보준걸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오로지 제갈연지와 신예화만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호리병의 마개를 열자 그윽한술 향기가 비무대 위에 가득 퍼졌다.
황보준걸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순간.
“두 번째 숙제를 내줘야겠지?”
그렇게 말한 백우진은 호리병에 있는 술을 제 입에 털어넣었다.
“허, 지금비무대에서 술을?”
!..
......
“에 잉, 쯔쯧. 망나니 가 따로 없구만.”
어떤 이는 어이를 상실하고, 어떤 이는 비난을 일삼았고, 또 어떤 이는 어 안이 벙벙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때.
상대인 황보준걸은 여전히 기수식을 취한 채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 지 않았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상대가 또라이라는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기에 비무 대 위에서 무슨 짓이든 가능할 인간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딸꾹질이 입에서 새어 나온다. 그와는 반대로 눈빛은 침잠되어 어느 때보 다고요했다.
상반되는 눈과 입의 모습에 황보준걸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얕봐선 절대 안될 녀석이야.’
행동 하나하나가 상대의 방심을 유발한다. 오죽하면 예선 비무대에서의 자신이 방심한 것도 충분히 그럴만했다 싶을 정도로 가볍고 경박하다.
지금또한 마찬가지다. 술에 취해 비틀거릴지언정, 주변을 가득 메운 야유 와 비난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흐아아압!”
한 호흡의 기합성은 많은 이점을 가져다준다.
단전에 서 뿜어져 나오는 기합성은 근육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순간적 인 근력 상승을 도모한다.
뿐만 아니라 거세게 내지르는 함성은 때때로 상대방의 기세를 저하시킨 다. 실제로 약초꾼 또는 심마니들이 산속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를들었을때 저도 모르게 주저앉는 것도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두 번째의 기능은 눈앞의 상대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는 듯했지만 첫 번 째 효과만큼은 황보준걸에 게 충분한 폭발력을 더해주었다.
비무대 바닥에 흔적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거리를 좁힌 황보준걸의 주먹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와 백우진의 요혈을 노리고 들어왔 다.
강한 바람에 종이 인형이 휘날리듯, 백우진의 신형이 펄럭거렸다.황보준 걸의 주먹이 일부러 그를 피해 간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그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극도로 부드러운 움직임이 황보준걸의 공격이 닿기도 전에 무위로 만들 어버렸다.
유능제강(柔能制剛).
지난 16강에서 백우진이 하북팽가의 여식을 상대로 보였던 움직임과 거 의 흡사했다.
“흥!”
콧김을 씩씩 뿜어낸 황보준걸이 아랑곳하지 않고 주먹을 연신 내질렀다.
황보세가는 고집 또한 쇠심줄과 같다. 상대가 공격을 피한다면.
‘맞을 때까지 내지르면 그뿐!’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가문이 황보세가다.
수십 년 전 그들의 고집은 가문을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려놓는 등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건 사실이나, 지금에 와선 그러한성정이 동시에 그들의 쇠락을 야기하고 있었다.
세월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데 그들만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 거만을 고집하니 그들이 쇠퇴하는 것 또한 세월의 흐름이요 변화의 일부에 포함된 것일지도 모른다.
황보준걸은 가문에 대한 애정도가 남다르다. 그렇기에 세월을 거듭할 수록 쇠 락해 가는 가문을 보는 것이 그 누구보다 마음 아팠다.
보통 공격을 하는 사람과 피하는 사람의 체력 소모는 訟대 唐 정도라고들 한 다.
이를 증명하듯, 두 사람 모두 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황보준걸이 흘리는 땀 의 양이 백우진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이게 비무냐!”
“똑바로 해라, 백우진!”
우우우우!
한쪽은 끊임없이 공격하고, 한쪽은 끊임 없이 피한다. 그 일방적인 방향에 모두가 야유를 터뜨렸다. 물론 회피에만 일관하는 백우진에게 쏟아지는 야 유가 거의 螐할 螐푼이었다.
어느새 멈춰선 채 숨을 헐떡이는 황보준걸을 보며,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두 번째 숙제를좀 알겠냐?”
황보준걸은 숨을 고르며 그를 노려봤다. 강권이 지니는 단점을 숙제랍시 고 내주려는 거라면 그는 한참이나 잘못 짚고 있는 것이다.
“가문의 권법이 유에 약하다는 것쯤, 모를 것 같으냐?”
“알고 있겠지. 근데 안 바뀌 었잖아.”
“하루아침 에 바뀔 수 있는 거라면 고민이 라고 말하지도 않았을 거다.”
맞는 말이었다.고민이라는 건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일에 대해 골몰하는 것 이니.
허나, 고민이라는 것은 수백, 수천일을 고민하다가도 찰나에 얻는 깨달음 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황보세가는 지금 밑도 끝도 없이 쇠 락하고 있지.”
황보준걸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가문을 욕보이려는 셈이냐.”
“팩트... 아니, 사실만을 말한 거잖아, 자식아.”
그의 말문이 막히자 백우진이 말을 이었다.
“가문의 부흥을 원한다면 난모든걸의심할거다.”
“무엇을 의심한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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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예를들어, 가문의 무공이라던가.”
황보준걸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가문의 무공을 건드리는 것은 곧 황보세 가의 지난 세월을 모조리 부정하 는 것과 같다.
“네놈…!”
수치스러웠다. 저딴 놈의 말을 조금이 나마 경청하고 있었다는 것이 몹시 도 낯 뜨겁게 느껴졌다.
주먹을 다시 들었다.
성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황보준걸의 모습에 백우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공을 건드리는 게 그렇게 무섭냐?”
“닥쳐라!”
흐트러진 호흡, 과도하게 들어간 힘, 따로 노는 상체와 하체. 빈틈투성이 였다.
회피 일변도였던 백우진이 처음으로 황보준걸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무공에 담긴 초대의 정신만온전하면 되는거 아니냔 말이야.”
“긋…!
백우진의 주먹이 신음하는 황보준걸의 배에 꽂혔다.
“크헉!”
달려드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 공격이었기에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는 녀석을 향해 다가간 백우 진이 마지막말을 건넸다.
“쇄신이란 게 번지르르한 말만 싸지르면 되는 건줄 아냐. 바꿀 수 있는 건 다 바꿔야지.”
그와 동시에 백우진의 주먹이 훤히 드러난 황보준걸의 턱을 올려쳤다.
퍼억
호쾌한 타격음과 동시에 황보준걸의 커다란 몸뚱어리 가 비무대 바닥에 널부러졌다.
“백우진 승!”
승리 선언과동시에 야유를 퍼붓던 관객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다 한 관객이 흥분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취, 취권이다아!
전설 속의 취권이 부활했다며 사람들이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야유를 퍼부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취권이니 뭐니 흥분하는모습들이라 니.
백우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비무대 위에 쓰러져 있는 황보준걸을 힐끔 쳐다봤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으나, 생각할 게 무척이 나 많아 보이는 눈빛으로 허공 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