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용봉 비무제(龍퓒 쩤籌祭)
준결승전 이후, 사흘의 시간이 주어졌다.
대미를 장식하는 결승전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는 의미로 주어진 시간이었다.
또 다른 준결승인 명진과 한백의 격돌에서 승리한 쪽은 명진이 었다. 한백 이 무당파의 절기인 태극혜검까지 선보였으나 명진의 강맹한 공격을 받아넘 기지 못하고그대로 일격을 허용하면서 승부는 끝이 났다.
“어우, 그냥빨리 싸우지.”
남궁수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백우진은 자신의 주가가 떡상하기 시 작했음을 느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불쑥 찾아와 선물을 놓고 가지를 않나, 자기 여식이 매 우 예쁘다며 언제 한번 만나서 식사를하자고하질 않나.
심지어 먼저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 편하게 결승전을 준비하라며 개인 연공실까지 내 어주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 불리던 시절에 비하면 확실히 반등에 성공한셈이었다.
“안녕?
가볍게 땀을 흘리고 나왔는데 또 누군가가 그를 보기 위해 찾아와 기 다 리고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 는 달콤한 향기 가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를 얘 기 해주 었다.
당선영이었다.
“저번에 헤어질 때 네가했던 말, 기억하니?”
요염한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백우진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던 순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술 한잔하자고 했던가.”
“ 맞아.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그려졌다.
“오늘 한잔 했으면 싶은데…, 어떠니?”
당선영의 체취에서 느껴 지는 미약의 향기가 저번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 다.
이 정도라면 술을 마셔도 크게 무리가 없을 수준.
백우진은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차피.
“그럴까, 그럼.”
이 만남은필연에 가까웠기에.
…
정무학관 내에 가장고급 객잔으로 알려진 청월 객잔.
이곳은 학관 내에서도 명가의 자제들을 겨냥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하루 술값만 자그마치 은자 수십 냥은 기본으로 깨지는 곳이 었다.
그중에서도 상층에 위치한 개인실은 빌리는 데에만은자 100냥에 가까 운 돈이 들어 진정한 부잣집 아들내미 가 아니면 구경도 할 수 없는 곳인데, 당선영은 그것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듯 선뜻 돈을 내놓았다.
‘역시 부잣집 딸!’
사천 당가는 돈벌 이 수단이 무척 이 나 많은 집 안이 다. 독과 약은 떼 려 야 뗄 수 없는 사이인 만큼 약초와 약제 사업으로 적잖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고, 암 기를 사용하는 만큼 대장장이 기술 또한 일품이라 이를 통해 벌어들이는 돈 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다.
돈 많고, 술 잘 사주는 예쁜 누나라.
“츄릅….”
입에 침이 고였다.
얼마지나지 않아식탁위에 수많은안주들이 줄줄이 이어졌다.식탁에 빈 공간을 찾기가쉽지 않을 정도였다.
“자,받으렴.
그녀가 주문한 술 또한 사천성 지방의 명주로 손꼽히는 검남춘이 었다.
백우진이 싱글벙글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빛에 반짝이 는 투명한 액 체 가 채워 졌다.
“자아, 마시렴.”
그녀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기와 술의 향기가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술잔을 입에 털어 넣자 검남춘특유의 향과더불어 단맛이 이어졌다.
“크으…!”
각별한 맛이 었다. 보패 에서 끊임 없이 흘러나오는 술과는 또 다른 향과 맛 에 기분이 산뜻해졌다.
“후후.
백우진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입가에서 작은웃음이 흘러나 왔다.
“이것도 먹고.”
먹을 때마다 눈이 커 지고 몸을 부들부들거 리 는 모양새 가 그녀의 모성 애 를 자극했다.
가문에 서 내 놓은 자식 취 급받고 산다더 니 그 말이 사실이 었나 보다.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음식을 집어넣은 백우진의 시선이 당선영에게로 향 했다.
“너무나만먹는거아냐?”
“후후, 괜찮아.”
당선영은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는 사람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런데 백우진은 싫지가 않았다.
‘잘생겨서 그런가?’
미 남자라 칭할 만한 이들을 제법 많이 봐왔지 만 백우진은 격 이 다른 존재 였다. 얼굴만 뜯어먹고 산다는 거, 백우진과 함께라면 가능하겠다 싶을 정도 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우자 여유 있게 술잔을 주고받는 시간이 이 어졌다.
검남춘 세 병을 말끔하게 비워낸 백우진의 얼굴은 제법 붉어진 상태였다.
더 취하기 전에 슬슬 이 술자리의 진짜목적을끄집어내야했다.
“이봐, 당소저.”
백우진의 부름에 당선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너 자꾸 건방져.”
그녀는 의외로 꼰대스러운 면이 있었다.
백우진은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말아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내가 먹어야 할 독은 뭐 야?”
지금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소설 속 당선영과의 만남은 그러했다. 남궁수와의 결승을 앞둔 상황에서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그녀는 ‘백우진’에게 음독을 하기 위해 술자리를 제 안한다.
무력은손에 넣었지만, 여전히 사람을 잘 믿었던 ‘백우진’은 그대로 당선영 이 음식에 푼 독을 먹고 중독 상태가 되고, 그대로 결승전 무대에 오르기 직 전 홀연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당선영이 준 해독제를 먹고 남궁수를 상 대로승리를 거머쥐게 된다.
‘모든 게 어긋나서 없던 일로 끝날 줄 알았는데.’
이 몸에 들어온 이후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심지어 남궁수와는 결승전이 아니라준결승전에서 싸워 승리했다.
그래서 그녀와의 사건 또한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개인 연공실 앞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자신에 게 독을 먹 이 라는 의 뢰 를 사주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아…, 어떻게 알았니?”
백우진이 그녀가좋지 않은 일로왔음을 알아차린 이유는 딱하나였다.
“웃는 모습이 저번과는 달라서.”
그녀는 거짓으로 미소를 지을 때면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핥는 습관이 있 다고 소설에 적혀 있었다.
백우진은 이를 기억하고 있었고, 연공실 앞에서 만난 그녀는 입술을 연신 혀로 훑어내고 있었다.
“신기하네. 내가 웃는 모습이 다르다는 거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 과한데.”
그녀가 거짓 미소를 짓는 것을 알아차리는 이는 측근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것도 전부 십 년 이상을 함께 지내오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것이 었다.
손에서 힘을 풀어낸 그녀가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몸을 기대어 앉았다.
“안심해. 아직 어떤 독도사용하지 않았으니까.”
마음만 먹는다면 백우진이 먹는 데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얼마든지 독을 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백우진이 자신의 허리춤을 강하게 끌어안았던 순간이 뇌리 를 스쳤다.
“생각보다 네가 마음에 들었나 봐.”
당선영의 입장에서 그는 조금 신기한 남자였다. 자신의 미약 향기를 맡고, 두 눈에 자신을 향한음심을 그토록 가득하게 채워 놓고선 초인적인 절제력 을 발휘하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그와는 제법 좋은 사이로 있고 싶다. 독 같은 것으로 그에게 경계심을 심어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 그녀의 진심 이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남은음식들도 먹…, 응?”
안심하고 다 먹어라, 라고 말하려던 당선영은 불퉁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 는 백우진의 눈빛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왜 그러니?”
“아니,독을왜 안줘!”
백 우진 이 당선 영과의 술자리 에 응한 이유는 분명 그녀와 조금 더 이 야기 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 만 그것은 어 디까지 나 부차적 인 일일 뿐, 백우 진이 가장 원하는 것은 그녀의 독이 었다.
“독 줘!”
물론 음식에 푼 독을 그대로 먹어줄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꼬셔 서 독 자체를 받아낸 뒤 호리병에 섞어 마실 요령이었다.
“아,아니… 이게 무슨….”
그녀로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 었다. 독을 안 풀었다고 오히려 짜증을 내 는 경우는 처음이 었다.
어린아이처럼 독줘, 독 줘! 하고 빼애액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당선영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그래 •••,독을 그토록 먹고 싶단 말이지….”
그녀의 말소리에 내재된 분노를 읽어내지 못한 백우진이 고개를 끄덕이 며 소리쳤다.
“응! 아주 화끈한 걸로.”
“후후, 그래.”
아주 화끈한 거라면 마침 가지고 있는 게 있단다.
스산하게 웃으며 그녀가 제 품에서 콩알 크기의 단약을 꺼 내 들었다.
“열화신독(熱火辛毒)이란다. 네 말대로몸에 아주화끈할 거야.”
“어…, 음.”
열화신독은 말 그대로 화기 가 담겨 있는 독이 었다. 이 독을 먹으면 몸 안에 열기가 치솟고 온몸으로 매운맛을 느끼는 것처럼 며칠 내내 통증과 열기를 느끼며 앓게 된다.
독단을 받아든 백우진은 침을 꼴깍 삼키며 제 보패에 그것을 쏙 집 어넣었 다.
“너 지금뭐하는….”
놀란 당선영이 뭐라 말하려 하자 백우진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일단두고보셔.”
보패에 내기를 흘려 넣고 음주선공을 운용하며 살살흔들어주었다. 독단 의 크기가 작았던 탓에 생각보다 빠르게 녹아내 렸다.
마개를 열어 호리병에서 나오는 냄새를 맡아보았다.
“오우야.
..
.
화끈한 열기와 더불어 매운 냄 새 가 훅 올라왔다.
“먹고탈나는건아니겠지….”
걱정이 살짝들었으나 이내 털어냈다. 마인의 몸에서 나온 마석마저도 정 화해 낸 보패 다. 제 아무리 독이 라도 마석의 지독한 마기 보다 대 단치는 않을 터다.
“에잇!”
“자, 잠깐!”
독이 들어간 호리병을 들이켜는 백우진의 모습에 놀란 당선영이 달려들었 다. 허나 이미 호리병 안의 술은 말끔하게 비워낸 상태였다.
“너 대체 무슨 짓이니?!”
독을 달라고 노래를 부르기 에 주기는 했지 만 진짜 먹 일 생 각은 아니 었다. 사망에 이르는독은 아니지만 몇날 며칠을 고통속에 앓아누워야하는지독 한 녀석이 었기에 어느 정도 겁만 줄 생각이 었는데 설마 본인 입으로 들이켤 줄이야.
“으윽…!
열화신독이 녹아 들어간술의 맛은 예전에 마셨던 마석을 섞어 만든 술과 비슷했다.
강렬한 열기가몸곳곳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신체 내부에 불이 붙 은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얼마 안 있어 음주선공이 운용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던 강 렬한 열기가 음주선공의 통제하에 놓여 일정한 경로를 따라 움직여 단전에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오….”
그 과정 이 몹시도 뜨겁고 강렬했지 만 내 기 가 쑥쑥 늘어나는 게 체 감되 니 이마저도 버틸 만한 수준으로 격하되 었다.
대 부분의 기운이 단전에 차곡차곡 쌓이고 남은 찌꺼 기 가 몸을 타고 이 리 저 리 움직 여대 기 시 작했다. 그 모습이 꼭 탈출구를 찾는 느낌 이 라 이를 입 밖 으로 내기 위해 식도 쪽으로 유도했다.
기운이 식도를 타고 쑥쑥 올라왔다.
그 순간 강렬한 트림 이 새 어 나왔다.
“끄윽.
화르륵!
“•••응?”
냄새 대신 웬 꼬마 불꽃이 튀 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