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용봉 비무제 (龍퓒 쩤籌祭)
지금껏 멀리해왔던 술이 얼굴을 타고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금기를 범하는 아찔한 감각이 명진을 덮쳐왔다.
허나 그것도 잠시 였다. 주변에 만연한 향과 고작 한 모금에 불과한 술은 이를 처음 접한 명진을 취하게 만드는 데에 충분했다.
“히끅! 정뫌…, 대단하쉬오!”
꼬인 혀로 연신 감탄을 내뱉는 명진.
“아주 후울륭한…, 히끅! 속임수였소이다!”
“어,음….”
술에 취 한 와중에도 자신의 수를 좋은 수였다고 칭 찬하는 그의 모습에 백우진은 무언가 큰 죄를 지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일단 술기운부터 먼저 몰아내.”
“히끅! 그럼 자암시만…, 실례하겠소이다.”
명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짧은 운기조식과 함께 술기운을 날리기 위 함이었다.
시간은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비무대에 올랐던 처음 그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다려주어 고맙소.”
“그대로 끝내기엔 너나 나나 아쉬웠을 테니까.”
관객들도 마찬가지고.
이 마지막승부를 보기 위해 몇날 며칠을 학관에 머물며 돈을 쓴 이들이다. 졸전으로 승부가 끝난다면 그들 또한 분노할 터 .
“그렇소. 지금처럼 즐거운 비무는 처음이오.”
명진에 게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 였을 터다. 처음으로 또래에 게 제 모든 힘 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 었는데 술에 취해 패배했다면 그보다 더 안타깝고 아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기로했소.”
속에 든 모든 것을 펼치 며 몇 시 진이고 맞붙을 요령 이 었던 명진은 생 각을 바꾸었다.
지지부진한 것들로 시간을 끄느니, 지금의 자신이 선보일 수 있는 최강의 수를 선보이기로 결심했다.
“흡-!”
짤막한 기합성과 함께 명진의 전신에서 내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서 있는 백우진을 비롯한무림맹주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주변을 휘몰아치는 내기가 양손에 오롯이 집중되어 주변으로 뚜렷한 형 상을 만들어냈다.
절정 고수의 전유물인 권기가그의 두주먹에 또렷하게 맺혀 있었다.
“궈,권기 (昈氣)다!”
“벌써 절정에 올랐단말이야?”
“세상에!”
1학년 생도의 몸으로 절정의 반열에 올라선 이는근 10년 사이에 딱두 명 있었다.
鋝년 전 정무학관을 졸업한뒤 무림맹 신주단에 입단하여 지금은 부단주의 자리에까지 오른곤륜파출신의 범우가그 첫 번째요, 현 唐학년 생도이자 과거 용봉 비무제에서 신룡의 자리를 꿰찬 몰락한 독고세 가에서 나온 기재 독고천이 두 번째였다.
걸출한 두 인물의 뒤를 이을 세 번째 인물이 나타났으니 모두가 놀랄 만도 했다.
“미리사과를구하리다.”
“무슨 사과?”
“아직 권기를 다루는 것이 익숙치 않아 필요 이상으로 백 공자를 다치게 할 수도 있음을 말이오.”
남궁수가 말했다면 당장 오만하다고 대답했을 테지 만 명진에 게는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검 기 가 강철마저도 잘라낼 수 있는 힘 이 라면, 권 기는 두꺼운 강철판을 그 대로 꿰뚫어버릴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권기가 사람의 몸에 제대로 닿으면 어떻게 될지는 안봐도 뻔했다.
“차앗!”
권 기뿐만 아니라 전체 적으로 활성화된 기운이 그의 움직 임을 한층 더 표 홀하게 만들었다.
극성으로 운용된 금강부동신법이 둘 사이의 거리를 단숨에 0에 가깝게 만들었다.
허공에 빛의 궤적이 그려졌다.
강맹한 일격이 배에 틀어박히기 직전에, 백우진의 몸이 별안간 명진의 눈 앞에서 사라졌다.
“역시 대단하오!”
정지된 상태에서 이뤄낸 급격한움직임이 그를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만 들었을 뿐이었다. 명진은 곧장 뒤로 돌아서며 검을 찔러 들어오는 백우진을 향해 한 발 더 빠르게 손바닥을 내질렀다.
“이크!”
백 우진은 곧장 뒤 로 물러 났다.
즐겁기 그지없다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명진의 모습에 쓴웃음 이 지어졌다.
조금만 방심하면 온몸이 부서질지도 모르는 아찔한 공방이 이어졌다.
관객들의 흥분은 최고조에 달했다.
한 줄기 섬광과 같은 공격과 이를 피해내는 유려한 움직 임 에 언제 공격 이 닿을까, 또 어디까지 피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저마다의 기대와 함께 비무는 한 없이 뜨거워 지기 시작했다.
“명진, 힘내라아!”
“조금만 더!”
어느덧 모두가 명진의 승리를 바라고 있었다. 권기를 선보인 절정의 고수 가 멋지게 승리하여 신룡의 자리를 꿰차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실제로 승부는 일견 팽팽한 듯했으나 공격하는 쪽과 피하는 쪽이 명확한 시점에서 명진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다고 보이기도했다.
허나 밖에서의 인식과는 달리, 명진은 자신의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 해내는 백우진을 보며 끊임없는 감탄과 함께 짙은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 다.
권기가 소모하는 내기의 양은 상당하다. 심지어 절정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았다면 내기의 제어가 온전치 않은 탓에 그소모량또한 더욱 커진다.
그 탓에 명진은 빠르게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내 가 지 친 다면 상대 또한 지 칠 터 !’
실제로 백우진 또한 그리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기 자체는 보법을 운 용하는 데에만 쓰여 넉넉한 편이었지만 체력 자체에 한계가 찾아오고 있었 다.
이 몸에 들어온 이후육체적인 단련에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이대로 가면 이 기 기 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승기는 이미 백우진이 잡은 상황이었다. 자신의 체력이 떨어지 는 속도보다 명진의 내기가 떨어지는 속도가 근소하게 더 빨랐다.
이대로만 가도 잠시 후면 승리를 거머쥐게 될 테지만.
‘그럼재미가 없지.’
그런 식의 승리는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납득하지 못할 터다.
비무에서 실험해보고 싶은 것들은 모두 했다.
첫 번째로 불을 내뿜는 행위 였다. 취화구라 이름 붙여진 그것은 사실 그 자체로 효율적 인 기술은 아니 었다. 허 나 그것을 통해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 다.
‘화기를 다룰수 있다.’
제 몸이 원래 지니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화기(火氣)를 다룰 수 있다는것이다.
물론 그 화기를 만들어내 기 위해선 지금처 럼 화의 기운이 담긴 독이 나 영 단을 삼켜야만하고, 그 순간에만 겨우 활용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붙기는 하 지만 이는 언제고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수단이 될 거라고 백우진은 확신했 다.
두 번째는 명진과 자신의 상관관계 였다.
백우진의 음주선공은 당선영과의 궁합이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정확 하게 말하면 당선영이 위고, 백우진이 아래라고봐야했다.
끊임없이 취기를 유지해야하는 음주선공의 입장상, 당선영의 몸에서 새 어 나오는 미약의 향기에 쉽게 이성을 빼앗긴다.
‘하지만여기서는.’
그러 나 명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다. 술에 대한 면역 이 조금도 없는 명진 에게 음주선공은 그의 천적이나 다름없는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회피 일변도였던 백우진이 비로소 검을 세웠다.
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거리를 좁혀오던 명진은 검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허…!”
어느덧 그의 검에 육안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은빛 기운이 덧씌워져 있었 다.
“거,검기!”
“백우진도 절정 고수였단 말이야?!”
“절정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무슨…!”
1학년 생도가 무려 둘이나 절정 고수라니 !
지켜보고 있던 명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느1 ”
어어….
그는 이 절정이라는 경지에 제법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학년에는 적어도 같은 경지에 오른 이는 없다고 자신하기도 했었다.
헌데 있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절정에 오른 이가. 심지어 자신보다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 있는 채로.
‘검기가 저토록 매끄럽다니.’
명진의 주먹에 씌워진 권기는 그 표면이 타오르는 불처럼 넘실거리고 있 는 반면, 백우진의 검기는 도도한 강물이 흐르듯 매끄럽게 검 위를 감싸고 있 었다.
이는 백우진의 내 기를 다루는 솜씨가 자신보다 한 수 위 임을 뜻했다.
“백 공자는 정말 대단하시구려.”
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이제 모든 걸 보았다 생각했는데 보다 큰 걸 숨 기고 있을 줄이야.
“고맙소!”
명진은 그에게 감사했다. 굳이 검기를 보여주지 않아도 그는 충분했다. 서서히 떨어져가는 그의 체력과는 달리, 자신의 내기는 급속도로 떨어져가 는 중이었으니.
그럼에도 검기를 보였음은 자신이 충분히 납득할수 있는 승부를 볼 수 있 도록 해주겠다는, 자신에 대한 배려나 다름없었다.
“백 공자의 배려에 보답하여 나또한최고의 수로 답하리다.”
“얼마든지.”
천하공부출소림 (天下功夫出少林).
천하의 모든 무공은 소림을 통해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림사가 지 니고 있는 절기의 수 또한 어마어마하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절기의 개수만무려 칠십이. 이를 일컬어 세간에선 소 림 칠십이종 절예라 부른다.
그중 대표적인 권공으로 손꼽히는 것이 있는데, 대성하면 백보 밖의 물체 를 타격할수 있다고 하여 붙여진 백보신권(百步神昈)이다.
실제로 백보 밖의 물체를 타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도 있지만, 그보다더 놀라운 것은백보신권이 지니고 있는그자체의 파괴력에 있다.
명진의 체내에 남은 내기가모조리 그의 주먹에 빨려 들어갔다.
백우진과의 거리는 대략 일 장. 그는 걸음마가 가능할 무렵부터 단련해온 근육들을 모조리 폭발시켜 강력한 일권을 내질렀다.
콰앙
공기를 격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굉음과 함께 권기가 가득 담긴 권 풍이 백우진을 향해 쇄도했다.
백우진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시종일관 비무 상대로서 좋은 자세를 보 여준 명진을 위해 감춰둔 한 수를 보여줄 요령이 었다.
판타지 세계에서 그에게 검을 가르쳐준스승은둘이었다. 한쪽은 검이 가 지는 힘 그 자체에 몰두하는 검귀 였다면, 다른 한쪽은 대자연에 한없이 가 까워 진 검 이 야말로 최고의 검 이 라며 자연을 닮은 검술을 만들어내 기 위 해 온갖 기행을 일삼던 검귀 였다.
“人 O O ”
가볍게 숨을 내쉬며 중단세를 취했다. 그리고 언제든 튀어 나갈 것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발뒤꿈치를 땅에서 떼어냈다.
체내에 남아있는 화기를 일깨워 내기와 함께 섞은 뒤, 전신에 퍼뜨렸다.
검귀 가 말하기를, 몸으로 직접 받아낸 대 자연 중 가장 파괴 력 이 뛰 어났던 것은 단연코 벼락이라 했다.
이 벼락의 움직임을 몸으로 재현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폭발력이라 하였으니.
쿠구궁
전신에 퍼뜨린 내기가수백, 수천으로 나뉘어 서로부딪히기 시작했다.그 럴 때마다 혈도를 두드리는 격통과 함께 순간적으로 기운이 증폭됐다.
용천혈 주변을 맴돌던 내기들이 일시에 충돌했다.
콰릉!
천둥을 닮은 굉음과 함께 백우진의 신형이 한 줄기 섬광처럼 앞으로 나아 갔다.
불그스름한 검 기 를 덧씌 운 검 이 하늘 위 로 솟구쳤다.
꽈르릉!
또다시 들려오는 천둥소리와 함께 백보신권의 기운 위로 내리쳤다.
닿는 모든 것들을 산산히 부수며 나아갈 것만 같은 백보신권의 기운이 단 숨에 갈라져 산산이 흩어졌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그어진 검의 끝은 어느덧 명진의 가슴팍 앞에 놓여 있었다.
꿀꺽, 명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백우진에게 물었다.
“방금 일격의 이름을물어도되겠소?”
가슴팍에 내밀어진 검을 회수하며 백우진이 대답했다.
“벼락.”
명진이 헬쑥해진 얼굴로 애써 웃어 보였다.
“훌륭하오.”
기력을 다한 그가 정신을 잃고 비무대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