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용봉 비무제 軒迥퓒 쩤籌祭)
화려한볼거리가 가득했던 결승전이 끝난 이후, 16강에서 아쉽게 패배한 이들에 게 마지막 기회 가 주어졌다.
본디 여덟 명이서 치러져야 할 패자전은 제갈연지가 지난 비무에서 난 상 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기권하는 바람에 일곱 명이서 치러 지게되었다.
치열한 접전 끝에 용과 봉의 자리에 오른 이는 16강전에서 백우진에게 패배한 하북팽가의 여식 팽자인과 마찬가지로 16강전에서 남궁수에게 패 배했던 생도였다.
그는 산동에 위치한 중소문파 옥룡문(玉龍門)이라는, 이름에 비해 규모 가 적은 문파 출신의 강진이라는 생도인데, 남궁수에게 치욕스럽게 패배한 이후 다소 달라진 모습으로 패 자전에 나타나 많은 이들의 의 구심을 자아냈 다.
“저 친구 예전과느낌이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게…,뭔가 어두컴컴한게 느낌이 영 이상한걸.”
비무를 치르기도 전에 기권하고 내려온 제갈연지의 볼을 꼬집으며 비무 를 지 켜보던 백우진도 의 아하게 생 각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뭔가느낌이 이상한데.’
싸우는 방식이 무척이나 지독하게 변했다. 패배한 이후 깨달음을 얻거나 복기를 통해 자신의 싸움 방식을 바꾸는 거야 크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다 만, 상대에게 공격을 할 때마다그의 눈에서 독기를 넘어 귀기(鬼氣)가 언뜻 비치는 것이 보고 있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 었다.
“시상식을 시작하겠소!”
팽 자인과 강진을 끝으로 용봉의 자리 가 모두 채워 지고, 시 상식 이 시 작됐 다.
시상식의 주요골자는하나였다. 열명의 용과봉에게 걸맞는별호를 지어 주는것.
그 별호를 지 어주는 건 그들의 비무를 지켜봐온 관객들이었다.
애초에 별호라는 건 누군가 한 사람에 의해서 탄생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그렇게 부르게 되어 굳어지는 것인 만큼관객들에게 가장많이 불린
특징이 별호로 굳어진다.
소림사의 명진,불룡(佛龍).
무당파의 한백,유룡(柔龍).
남궁세가의 남궁수, 검룡(劍龍).
낭인 전랑, 혁룡(革龍).
황보세가의 황보준걸, 패룡(覇龍).
옥룡문의 강진, 기룡(奇龍).
아미파의자령,옥봉(挹鳳).
유씨세가의 유화연, 검봉(劍鳳).
하북팽가의 팽자인, 낙봉(落鳳).
드넓은 중원 무림에서 정무학관의 선택을 받은 단 이백여 명의 생도들 중 단연 뛰 어난 성적으로 별호를 얻은 아홉의 생도.
마지막, 가장높은곳에 우뚝 서게 된 생도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관객들로부터 지어진 생도들의 별호를 하나하나 외치고 있던 무림맹주 현학은 가까이에서 본 백우진을 보며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섬서백가의 백우진! 옥면신룡(玉面神龍)!”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울려 퍼진 목소리에 관객들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
다.
“휴우!”
백우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취권 이 니 취화구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낸 바람에 별호에 이상한 게 붙는 건 아닐까 싶어 노심초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여성 관객들이 밀어붙인 이름 이 채택이 된 듯했다.
그때였다.
“잠까아아아안!”
.....
....
시끌벅적한 관객석의 소음을 뚫고 누군가가 거센 기성을 토해냈다.
“이의 있소!”
관객들 사이에서 흑의무복에 흑립까지 뒤집어 쓴 사내가 멋들어진 신법 을 발휘하며 비무대 위까지 날아들었다.
무림맹주 현학을 지키고 서 있던 호위들이 날카로운 기세를 뿌리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머리에 쓴 흑립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곱상하 게 생긴 외모가드러났다.
그는 관객들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소리쳤다.
“반갑소! 나는 풍진문의 도경이라 하오!”
풍진문(風進門)!
정파 무림에서 잊을 만하면 나타나 의와 협을 행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 인전승의 문파였다.
“풍진문의 후예라니 !”
“마지 막으로 나타난 게 20년 전 이 었으니 • • •,그새 제 자가 뒤 를 이 었단 말 인가!”
풍진문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타난 이들은 하나 같이 뛰어난 의협심을 자 랑했다. 그렇기에 저 도경이란 자가 비무식에 난입한이유가관객들은 몹시 도궁금했다.
“무림 동도분들게 묻겠소! 신룡이란대저 무엇이오?”
신룡.
장차 무림을 이끌어 나갈 후기 지수들 중 최 고로 손꼽히는 이 에 게 주어 지 는 명예로운 별호였다.
“내가 알고 있는 신룡은 장차 정파 무림의 대들보가 될 이에게 주어질 이 름이오. 아니 그렇소? 헌데 !”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모두의 이목이 자신에게로 집중되었음을 확인한뒤 말을 이었다.
“어찌 이 신룡이라는 명예로운 별호가 정무학관 생도들에게만 주어져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수가 없소!”
관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렇기는해?”
“아무리 잘난후기지수들이 모여있다곤 하지만그들이 전부인 건 아니니 까….”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했다. 정무학관에 모인 이백여 명의 후기 지수들이 분명 뛰 어 난 잠재 력을 인정 받아 입관한 것은 사실이 나 그들 못지 않게 밖에 서 뛰어난 위명을 자랑하는 이들또한분명 존재했으니 말이다.
서서히 그 목소리 가 높아지 기 시작하자 이를 잠재울 필요성을 느낀 무림 맹주 현학이 발을 살짝 뗐다가 바닥에 내 려놓았다.
콰아아아
그의 발에서부터 시작된 기파(氣波)가 원형으로퍼져나가모든 이들의 입 을 다물게 만들었다.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현학이 도경에게 물었다.
“그래서 소협이 하고자하는 말이 무언가?”
도경은 침을 꼴깍 삼켰다. 허허로운 분위 기에서 날카로운 칼끝이 겨눠졌 다.
“신룡이란 이름이 정무학관 내에서 돌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제게 신룡과의 비무를허락하려 주십시오!”
과감한 발언에 조용했던 관객석이 다시금 들뜨기 시작했다. 애초에 재미 있는 볼거리를 찾아 이곳까지 찾아온 이들이 었다. 나타났다 하면 의협심으 로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풍진문의 후예와 신룡의 비무는 그들을 흥 분케 하기에 충분한 요소였다.
“찬성이다!”
“옳소! 신룡이 어째서 정무학관만의 것인가!”
“신룡은정파의 상징이니 모두에게 기회를줘야지!”
기다렸다는듯들고 일어나는 관객들의 성화에 현학은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당했구먼, 허허.”
자신의 한마디 로 잠재울 수 있는 분위 기 가 아니 었다. 강제로 짓누르려 했 다간 오히 려 더 큰 문제 가 생 길지 도 모르는 일 이 었다.
현학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닌 것 같소.”
그러면서 어리 둥절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백우진을 가리 키 며 말했다.
“신룡이 된 백우진 생도의 결정에 따르리다.”
모두의 시선이 백우진에게로 쏟아졌다. 그가 허락만 한다면 재미있는 비 무가한번 더 펼쳐질 터였다.
받아들여라!
“신룡이라면 이 정도는 이겨내야지!”
“안 받아들이면 남자도 아니다! 고추 떼라!”
“허허.”
졸지에 고추까지 떼게 생긴 백우진이 허허롭게 웃으며 의기양양한 표정 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도경을 응시했다.
백우진과 견주어도 전혀 모자람 없는 고운 외 모가 눈길을 끌었다. 얇고 고 운 눈썹에 길게 난 속눈썹과 초롱초롱한 눈망울. 여자라고 해도 믿을 것만 같은 외모였다.
그렇기에 백우진은 어이가 없었다.
‘저걸 진짜로 남자로 본다고?’
소설에는 가끔 남장여자가 등장한다. 누가 봐도 어설프게 남장을 한 여자 가 분명한데 모두가 남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주인공만 여자인 걸 알아차리 는.
눈앞의 도경이 바로그런 인물이었다.그 아니,그녀의 정체는풍진문의 후 예도 뭣도 아니 었다.
‘사파가 정파 무림의 중심에까지 놀러오고 깡도 좋지.’
그녀의 이름은 도경.
천마와 더불어 정파 무림의 양대 숙적 중 일인이자 사흑련의 련주이 며 일 마, 일황, 삼존 중에서 일황에 꼽히는 흑사패황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었다.
상황은 이미 저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비무를 한 번 더 하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 었다. 다만, 백우진은 안타까 울 따름이다.
‘운명 이란 건 비틀지를 못하는 건가.’
‘백우진’의 몸에 깃든 순간부터 사소한 것부터 제법 큰 것까지 운명을 비 틀어버릴 만한 사건들을 여럿 만들어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사 건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도경 또한 필연적인 만남이었다. 그것도 소설 속에서의 전개와 한 치도 다 르지 않게 나타났다.
“비무수락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비무가 성사됐다.
무림맹주는 백우진과 도경을 제외한 모든 인원들을 비무대 아래로 내려 보냈다.
“심판은 내가 보아도 되겠지?”
“예!”
현학의 물음에 도경이 힘찬목소리로 대답했다.
“허.”
백우진은 그저 웃겼다. 목소리가 저렇게 얇은데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 심을 누구도 품지 않는다는 게.
도경이 이쪽을 바라봤다.
“비무에 응해주어 정말 고맙소.”
사뭇 사내다운 말투로 말을 건넸지만 백우진의 눈에는 모든 게 어설펐다.
“어차피 금방 끝날 테니까.”
백우진의 시큰등한 말투에 도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을 한참 아래 로 내 려 다보는 듯한 말에 빈 정 상한 모습이 었다.
“그럼 비무를 시작하겠네.”
현학의 말과 함께 두 사람이 검을 뽑아 들었다.
자세조차 잡지 않는 백우진의 모습을 보며 도경이 다짜고짜 기를 끌어모 았다.그러자그의 검에서 검기가 솟구쳤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보는 젊은 절정 고수의 등장에 관객들이 놀라는 소리 가 들려왔다.
도경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그에 게 물었다.
“어떻소. 이 정도면 그대와싸울 자격은충분하지 않겠소?”
이 정도면 제법 백우진도 경각심을 가졌으리 라생 각했으나전혀 아니 었다
•
그는 여전히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었다.
“대단하네. 주무기도 아닌 검으로 검기도 쑥쑥 뽑아내고.”
의 미 심 장한 말투에 도경 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백우진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도경은 복잡해지 기 시작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 그의 비무를 빠짐없이 봐왔다.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걸 잘하는 인물이 었다.
‘넘어갈순 없지.’
도경이 먼저 발을 뗐다.풍진문의 보법인 풍월보(風越步)를운용하여 빠 른 걸음으로 백우진을 향해 내달렸다.
현란한 검술이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풍진문의 비전 검술인 풍운십이식 (風雲十쮕式)의 초식 중하나인 삭풍(倇風)이 펼쳐졌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현란한 검술이 었으나 백우진의 눈은 이 를 놓치지 않고 모조리 꿰뚫어 보았다.
가벼운 걸음 몇 번으로 공격을 모조리 무위로 돌린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제대로 붙고 싶으면 다음엔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태로 와.”
“그게 무슨…!”
도경의 마음이 일순간흐트러졌다.
백우진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명진과의 비무에서 선보였던 벼락을 이용한 쾌검식이 그녀의 가슴에 닿았 다.
“아,미안.”
놀란 백우진이 검끝을 살짝 떨어트렸다.
도경은 제 가슴에 살포시 닿았다가 멀어진 검을 보다가 이내 백우진을 멍 하니 쳐다봤다.
“너…?”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건 자신이 남자가 아닌 여자인 걸 알고 있다 는 뜻이었다.
허무하게 끝난 비무와 정체가 탄로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에 갈팡질팡 하던 도경은 결국 백우진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제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 었다.
“과연 그대가 신룡이오!”
관객들의 맥빠진 환성과 더불어 도경을 욕하는 소리가 점차 커지기 시작 했다.
백 우진과 조금 더 이 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던 도경은 아쉬 운 마음으로 그 를 일별한 뒤 제 품에 있던 패 하나를 그에게 던졌다.
“조만간찾으러 올테니 기다리고 있어.”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긴 채 황급히 비무대를 빠져나갔다.
백우진은 얼떨결에 받아든 패를 들여다봤다. 도(桃) 자가 새겨진 목패였 다.
‘이건좀 다르긴 하네.’
비무가 진행된 건 같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만큼 마음을 동요시켜 쉽게 승리를 거머쥐었고, 그 결과로 이런 패까지 받았 다.
백우진은 목패를 제 품에 넣었다. 언젠가 그녀와 다시 만나는 날이 조금 기대가됐다.
‘생각보다 가슴이…, 어우야.’
칼끝으로 살짝 느낀 그녀의 가슴은 어떻게 숨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 도로 풍만했다.
잠깐의 소동 이후중지되었던 시상식이 이어졌다.
“옥면신룡 백우진 생도에게는 부상으로 의선단(醫仙鯉)을 수여한다.”
향긋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목함을 받아든 백우진의 입이 씰룩거 렸다.
“이것으로 용봉 비무제를 마치겠소!”
수많은 관객들이 자아내는 환호성과 열기 속에서 마침내 길고 길었던 용 봉 비무제의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