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화〉일상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불고 있지만 정무학관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그들에 게 있어 지금의 시간은 새로운 학년을 준비하며 자신을 단련하는 이른바 담금질 기간이었기에.
“후욱, 후우….”
그것은 백우진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그가 상대해 야 할 것들은 무림 에서 오랫동안 굴러먹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이들이 다.그 누구보다 빠른 성취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거 기에 안주해선 안됐다.
내 공의 성 장 속도는 제 법 빠른 편 이 었다. 술만 들이 부으면 하루 종일 운기 조식을 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시 간을 정해 놓고 하는 이들보다 효율이 뛰 어 났다.
지금의 백우진에게 부족한것은육체 그 자체였다. ‘백우진’이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긴 했지만, 자신의 지난 삶에 빗대 어 보면 한참이나 부족한 수 준이 었다. 더군다나 그는 노력은 가상했으나 노력하고 있는 자신에 매몰된 탓에 효율성은 따지지 못했다.
‘여러모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놈이야.’
그의 성장이 더딘 것은 분명 NovelGod의 무리한 설정과 드리프트가 螐할 의 螐푼의 잘못을 하고 있지만, 백우진’의 효율성 없는 훈련 또한 1푼 정도는 잘못이 있었다.
육체의 완성도를 끌어 올리 기로 마음먹은 백우진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대장간이었다. 그곳에서 팔과 다리에 찰 수 있는 묵직하고 두터운 팔찌와 발찌를 만들어 하루 온종일 차고 다니 기 시 작했다.
무거워진 몸을 움직이는 데에는 평소보다 많은 힘과 체력을 필요로 하는 법이 다. 밥 한 숟가락 뜨는 데 에도 남들보다 많은 체 력과 근력을 소모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성장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후우!
늦가을 즈음부터 온갖 방식으로 제 몸을 괴롭혔다. 그리고 겨울이 한창인 지금, 호리호리했던 백우진의 몸에는 단단한근육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체형의 선이 굵어지자 마냥 기생오라비 같았던 생김새 또한조금 더 사내 답게 변했다. 몇몇 남자생도들이 부러움에 못 이겨 욕하던 기생오라비라는 말도 이제는 하지 못하게 되었다.
“으으응…!”
한겨울에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을 대충 훔쳐낸 백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신예화와 제갈연지는 자신이 훈련을 시작한 날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찾아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하앗!”
거대한 월도를 휘두르기 위해 지금껏 근력 훈련을 해온 신예화는 힘차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고, 근력과는 거리가 먼 몸을 지닌 제갈연지는 지금까지 도 고생 중이었다.
“힘들면 그만들어가는게 어때요?”
신예화는 하루도 빠짐없이 고통어린 신음을 흘려대는 제갈연지를 향해 물었다. 백 우진이 말한 그 분위 기 란 것을 잡으려 면 아무래 도 단둘이 어 야 하 는데 그녀는 근육통에 시달리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백우진의 개인 연공실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더할수 있어요…!”
제갈연지 또한 그녀의 속셈을 뻔히 알고 있었기에 자리를 내어줄 수 없었 다.
‘방심해선안돼!’
지금이야 어딘가 서먹서먹한분위기지만 백우진과 신예화는 거의 평생을 함께해온 소꿉친구 사이다. 어떤 작은 계기만생겨도두사람사이에 뜨뜻미 지근한불이 활활 타오르게 될지 모를 일이다.
매번 이런 식으로 두 사람 사이의 시선에는 불꽃이 튀 었다. 가끔 그러다 비 무로 번지기도 하는데, 한쪽은 강공 위주고 한쪽은 흘려 넘기며 반격을 보는 식의 수비 위주라 재미있는 상황들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물론 언제나 최종 승리는 제갈연지의 것이었다. 백우진의 총애가 그녀에 게 조금 더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오늘은 여기까지.”
오전부터 정오가 넘어설 때까지 개인 연공실에 비치된 벽곡단으로 배를 채우며 훈련을 거듭하던 백우진이 평소보다훨씬 이른 시간에 훈련을 멈췄 다.
“무슨 일 있어? 평소보다훨씬 빠르잖아.”
“회의가 있거든:
“아! 오늘이 그날이구나….”
용봉 비무제에서 용과봉의 별호를 얻은 이들에겐 겨울에 특별한과제가 주어진다.
2학년 때부터 추가되는 조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조원을 구성하는 일 이다.
오늘의 회 의 는 이를 위 한 전초전 이 다. 각자 조원으로 넣고 싶은 이는 누구 인지, 얼마나 겹치는지 파악하고 일차적으로 원만하게 조율하기 위함이다.
이뿐 아니라 용봉들은 다양한 주제를 놓고 회의를 연다. 그들이 앞으로 있 을 학관 생활의 주체가되기 때문에 여러 안건을 두고 머리를 맞대는 것이다.
그리하여 생도들은 이를두고무림맹에서 여는용봉지회(龍鳳之會)의 축 소판이라 하여 소룡회 또는 소봉회라 일컫는다. 어느 쪽으로 불리는가에 대 해선 당대의 용봉중용이 더 많은지, 봉이 더 많은지로 갈린다.
“저기….”
신예화가 백우진의 옷자락을 슬며시 붙잡았다.
“나, 나 뽑아줄 거지…?”
갑자기 불안해졌다. 달라진 백우진에게선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것 도 그가 직접 만들어낸 듯한 거리 감이.
그러한 거리감이 그녀를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용케도 꺼내고 있지 않았지만 매일 잠들 때마다그가 자신을 조원으로 뽑지 않으면 어떻게 해 야 하나 고민하곤 했다.
그녀의 불안은 타당하고 예 리했다.
‘얘를 어떻게 해야하나.’
실제로 그는 고민 중이었다. 그녀를 자신의 조원으로 두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미 어느 정도 집착 증세를 보이고 있는 그녀를 억지로 떨어뜨려 둔다고 해서 그증세가오히려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거란확신이 서질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를 곁에 두자니 못할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그녀의 마음에 대한 보답을 돌려줄 수도 없으면서 곁에 두는 것만으로 그녀 에게 희망고문을 하는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백우진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지금으로선 그녀에게 어떤 확답도 주기 어 려웠다.
“야아, 장난치지마….”
손에 쥔 옷자락을 흔들면서 애써 웃는 모습이 애처롭게 보였다.
백우진은 그녀가 쥔 옷자락을 슬며시 빼냈다.
“조금 있다가 보자.”
“아….”
그녀는 불안한 마음을 가슴에 안은 채 백우진이 떠 나가는 걸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차가운 한기 가 가슴 앞섶으로 파고들었다. 서늘한 감각이 느껴 졌지만 생 각보다 춥지는 않았다. 절정에 이른 육체는 완전한 한서불침 (寒暑不侵)까지는 아니더라도 정도 이상의 한기나 더위로부터 해방되게 만 들어주었다.
땀냄새 나는 옷을 갈아입 기 위해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 던 백우진은 얼 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추었다.
“형?”
백무혁이 기숙사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왔구나.”
“나기다렸어?”
“그래.”
평소보다 가라앉은 얼굴의 그는 무언 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 이 었다.
“오늘이 첫 소룡회가 열리는 날이지?”
“으
O •
“조원은 정해두었고?”
“어…, 대충은.”
어색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수 있 었다.
“혹시 그 안에 예화가 포함되어 있느냐?”
“고민중이야.”
백우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백무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예화를조원에 포함시켜줄수 있겠니?”
예상했던 답변에 인상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는솔직히 형이 그러는 이유를모르겠어.”
백무혁은 눈에 훤히 보일 정도로 신예화와 자신을 이어주기 위해 노골적 인 말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백우진으로선 왜 굳이 그래야만 하나 싶을 정도 였다.
“예 화가 도와달라고 하기 라도 한 거 야?”
백우진의 물음에 백무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다만….”
그가 착잡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너희가 서로를 얼마나 아꼈는지 누구보다 오래 봐왔으니까.”
약간의 혼동은 있었으나 신예화가 백우진을 얼마나 좋아하고 신경 써줬 는지 누구보다 오랫동안 봐온 사람이 바로 백무혁이 었다.
백우진 또한그 기억을 지니고 있었기에 선택을 망설였다.
“그래서 더 고민이야.솔직히 지금의 난…, 예화에게 답할 마음 자체가 없거든.”
지금의 자신은그녀가 알던 사람과는 전혀 다른사람이기에 그녀의 마음 에 답할수가없다.
“어쩌면 곁에 두는게 희망고문은아닐까하는생각이 들어서.’,
“그렇구나….”
백무혁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너와 예화는 참으로 오래된 인연이다.”
“그렇지.”
“그렇기에 잠시 마음에 혼동이 올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신예화가 백우진이 아닌 백무혁에게 마음이 있다고 혼동했던 것처럼.
“너 또한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있겠지만 그것이 잠깐의 혼동이면 어쩌느냐
” •
지금의 백우진에 겐 해당될 수 없는 말이 었다. 하지 만 내막을 모르는 백무 혁의 입장에선 충분히 고려할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러니 예화만이 아니라 너도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곁에 두고 조금 더 제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네 마음이 바뀌지 않을 거라확신해도그게 맞을 거라 생각한다.”
“왜?,,
“무작정 몸을 떨 어뜨린다고 한들, 마음 또한 단념할 거라 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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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생각만큼은 백우진과 일맥상통했다.
집 착은 이 미 시 작됐고, 억지로 떨어뜨리 면 오히 려 반발심 만 더 키워 줄지 도모른다는 생각.
백무혁은 옅게 웃으며 백우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 말을끝으로 더 이상너희 사이에 끼어들지 않을 생각이다. 앞으로 어 떻게 되는가는…, 이제 너희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우리 모두 어른이니까.
지 금 또한 과한 참견 이 라 생 각했다. 그럼 에 도 둘 사이 에 마지 막으로 끼 어 들기로 작정한 것은 신예화에게 고백을 종용한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조금 더 멀어진 것만 같아 내내 마음이 무거웠 다. 그 무거운 마음이 백무혁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나. 부디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라마. 조별 과제 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고.”
백무혁은그 말을 남긴 채 조용히 떠나갔다.
.
혼자가 된 백우진은 뒷머리를 한 차례 쓸어내린 뒤 기숙사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서 호리병에 든 술로 입을 가신 뒤 소룡회 가 열리는 본관 건물로 향 했다.
唐층에 위치한회의실에 소룡회라적힌 명패가 걸려 있었다. 백우진은 잠 시 고민은 접어둔채 문을 열어젖혔다.
쾅
생각보다문이 세게 열렸다.
기다란원형 탁자를 두고 널찍하게 떨어져 앉아 있는 아홉 명의 남녀가 눈 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꼴찌인 듯했다.
가장 상석에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백우진은 자연스럽게 그 곳에 앉아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남녀를 향해 손을 들 었다.
“얘들아, 안녕?”
해맑은 미소와 인사에 모두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소룡회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