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화〉마물 토벌
재해 또한 자연의 일부다. 검귀는 그렇게 말하며 제 검으로 지진을 일으 키기 위해 무던히도노력하였다.
오랜 시간을 들이고,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터득했으니, 그 요체는 이러했 다.
땅 밑에는 지맥(地子)이라는 것이 흐르는데, 여기에 자신의 기운을 개입 시켜 강제적으로 터뜨림과동시에 그 힘을 모두지표면으로 향하게 하는것.
그것이 검귀가창안하고백우진에 이르러 완성된 검술 ‘지진’의 정체였다.
허나 지금 선보이는 지진은 이름만으로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재해 와는 거 리 가 멀었다. 애 초에 그 정도로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 려 면 지금의 경 지로는 턱도 없다.
누군가를 해하게 만드는 데에는 한없이 살상력이 부족하나 지금은 이걸 로도 충분했다.
‘목표는핵심 기물이니까.’
인근 땅속 어딘가에 묻힌 핵심 기물에 어떤 식으로든 변형이 가해지면 그 뿐이니.
단전에 있던 기운이 절반이 넘게 땅으로 흘러갔을 즈음, 주변에 변화가 찾 아왔다.
“배,백 공자! 진법이 약해졌어요!”
주변을 감싸고 있던 울창한 산림이 벗겨지고 날뛰던 감각이 조금씩 안정 되 기 시작했다.
인위적으로만들어낸 지진에 의해 핵심 기물이 손상을 입은 게 틀림없다.
“휘유!”
검을 뽑아내어 묻은 흙먼지들을 털어낸 백우진이 제갈연지를 향해 물었 다.
“이 정도면 핵심 기물까지 안전하게 갈수 있지?”
“네…!”
조금 전까지 만 해도 한 걸음 내 딛는 것도 힘들어 하던 그녀 가 빠른 걸음으 로 나아갔다.
그만큼 진의 흐름이 약해져 있었다.
이윽고 당도한곳은 빨간색, 하얀색, 파란색의 천이 주렁주렁 매달려 펄럭 이고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였다.
“여기가 분명해요.”
“좋아.”
그녀가 가리키는 곳 주변을 파헤치자 마을 때와 마찬가지로 벽조목으로 만들어진 핵심 기물 하나가 나왔다. 지진에 의해 입은 피해가 기물 중앙에 그 어진 실금으로 나타나 있었다.
“이걸 이제 이렇게 하면…!”
제갈연지는 기물을 아예 파괴하는 대신 원래의 위치와는 조금 다른 곳에 심어버렸다.그러자주변의 기운이 크게 일렁이더니 주변의 산림이 모조리 걷어지기 시작했다.
산림의 환영 속에 숨겨져 있던 이곳의 원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여긴….”
조금 떨어진 곳에 입구가 매우 거대한 동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커다란 제단이 함께 설치되어 있었는데, 새빨갛게 칠을 한 것처럼 피가굳어 있었다.
핵심 기물이 숨겨져 있는 나무에 매달린 형형색색의 천이며, 제단까지.
“주변에 사람의 흔적이 있어요. 아마….”
“여기서 실종된 사람들을 데려왔겠지.그리고 저기다가바친 거고.”
피 가 묻은 제 단을 검지로 가리 키 자, 흉측한 모습에 놀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백우진의 뒤에 숨어버렸다.
“우진아!”
“백우진!”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진이 파훼됨과 동시에 달려온 신예화와 당선영 이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엑….
“끔찍하네.”
신예화는 헛구역질을 해대며 제 가슴을 두드렸고, 당선영은 눈살을 찌푸 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백우진은 제단이 아닌 어두컴컴하고 거대한 동굴의 입구를 지그시 바라 보았다.
“다들 정신차려.”
나지 막한 음성과 동시 에 동굴로부터 커 다란 소리 가 울렸다.
쿠웅! 쿠웅!
놀랍게도 그 소리는 발소리였다. 거대한 동굴에 웅크리고 있던 존재 가 한 걸음, 한 걸음 동굴 밖을 향했다.
“대체 뭐길래…!”
당선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저곳에서 무엇이 나오기에 땅을 울릴 정도로 커다란 발소리를 내는지 궁금함과 동시에 두려움이 일기 시작했다.
땅을 뒤흔드는 걸음이 더욱 가까워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동굴 너머로 희끄무레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저건….”
“말도안돼….”
전의를 상실한음성이 들려오고, 마침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녀석이 울음을 토해냈다.
크허허헝!
허허엉
허엉
산을 쩌 렁 쩌 렁 울리 는 포효를 내 지 른 것은 호랑이 였다.
그것도 아주 거대하고, 희다 못해 빛나는 은빛의 털을 지닌 백호(白虎).
또 그중에 서도 영물로 손꼽히 며 과거 인간들에 게 산신 이 라 불렸다고 전 해지는 전설상의 영물, 태백호(太白虎)였다.
인간에게 호의적이고, 오로지 평화를 헤치는 것들을 향해 발톱과 이빨을 들이 민다고 알려진 존재 가.
“저, 저 눈은.”
마기에 잠식된 이에게만 나타나는 핏빛 동공을 번뜩이며 이쪽을 노 려보고 있었다.
“호환…!”
호환(虎患).
호랑이에게 화를 입는 것을 뜻함과동시에 마기에 잠식된 호랑이를 일컫 는이름.
인간의 칭송을 받으며 잠들었어야 할 전설 속의 존재가 인간에 대한 적의 를 불태우며 제 몸을 움직였다.
“아…!”
짧게 외치는 사이 수 장의 거리를 좁힌 호환의 새하얀 발이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제갈연지는 물론이고 최근 일류의 끝자락에 닿은 신예화도, 완연한 절정 에 이른 당선영마저도눈앞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이 에 반응한 것은 오직 백 우진뿐이 었다.
콰아아앙!
금강석만큼 단단한 발톱과 검 기 가 서린 검 이 부딪치 며 굉음을 토해 냈다.
“크흑…!”
위에서 짓누르는 거대한 힘과 무게에 한쪽 무릎을 꿇은 백우진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백우진!”
암기를쥔 손이 허공을 갈랐다. 검기마저 서린 날카로운 비수가 백우진을 짓누르고 있는 호환의 몸에 닿았다.
푸욱! 푹!
살가죽을 조금 뚫고 들어간 암기는 그것으로 임무를 다했다는 듯,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뚫린 가죽 너머로 피 가 찔끔 흘렀지 만 그뿐이 었다. 오히려 화를 돋운 듯, 호환이 울부짖으며 당선영에 게로 시선을 옮겼다.
“피해!”
그녀가 반응한 것은 오로지 백우진이 토해낸 거친 음성 덕분이었다.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날리자 그곳에 호환의 거대한 앞발이 조금 전까지 만 해도 그녀 가 서 있었던 땅을 완전히 짓이 겨놓았다.
어쩌 면 마주했을지도 모를 불길한 미래를 지워 내 며 호환을 바라보았다.
“암기에 맹독을 발라뒀어! 분명 효과를….”
희망찬 말이 끝을 맺기도 전에, 암기에 뚫렸던 호환의 피부가 검은 연기를 토해내고 곧장 피부를 재생했다.
허공에 날린 검은 연기는 그녀가 날린 비수로부터 침투한 맹독이 었다.
“마,말도 안돼…!”
비수에 발린 독은 당가에 서 다루는 독 중에서 수위를 다투는 칠보단혼산 (七步斷魂散)으로,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숨을 끊어놓는다고 하여 붙여진 맹독 중의 맹독이었다.
마인과 같은 인외 의 존재 에 게 만 사용이 허용되 는 엄 격한 독이 라 챙 겨온 양이 적긴 했으나 어느 정도 효과는 볼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크허어허엉!
분기탱천한울음이 산을 뒤덮었다. 모두의 눈빛에서 희망이 지워져갔다.
“완전괴물이네, 이거.”
힘겹게 몸을 일으킨 백우진이 내뱉은 말이었다.
녀석의 움직임은그의 눈으로도쫓기가힘들었다.오랜 경험이 미리 일러 주지 않았다면 손도 못 써보고 앞발에 짓눌릴 뻔했다.
‘공격 한번 막는데 벼락까지 쓰다니.’
심지어 그 공격을 막기 위해 벼락의 폭발력을 이용해야만 했다. 만약 평 범 하게 대 응했다면 시의 를 놓쳐 그대 로 당했거 나 막았다 하더 라도 녀 석 의 힘에 찌그러졌을 터다.
그야말로 괴물 중의 괴물.
반면 백우진의 몸 상태는 최 악으로 치달았다. 지진을 사용하느라 절반에 가까운 내공을 사용해 야 했고, 어깻죽지 에 감아둔 붕대는 이 미 피 에 흠뻑 젖 어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힘으로 맞서는 건 불가능하고.’
체급에서 이토록 차이가 나는데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녀석 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법은 오로지 힘의 방향을 틀어 흘려내는 수밖에.
백우진은 곧장 호리병을 열어 제 입에다 대고 술을 가득 부었다.
비어버린 단전에 조금이나마 기운을 채워넣음과 동시에 머릿속에 차오르 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애써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푸하아!”
과한 흥분 속에서 취 기 가 천천히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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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철한 이성이 서서히 마비되어 뒤로 밀려나고, 평소에 억눌려 있던 본성 이 앞으로 나아가 이끌기 시작한다.
열기와 술기운에 붉어진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딱 좋네.”
술에 취한 놈들이란 겁대가리를 상실하여 자신보다 몇 배는 센 상대를 보고도쫄지 않게 되는 법 아니던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실제 크기보다 더욱 크게 보였던 호환이 이제는 조금 더 작게 느껴졌다.
물론 보기 에 만 그렇다는 거 다.
“야, 너 잠깐만 기다려 ! 알았냐?!”
주정뱅 이 마냥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호환이 기분 나쁘다는 듯, 으르렁 거리면서도 발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당 소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때다 싶어 백우진은 빠른 걸음으로 당선영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제 앞에 당도한 그의 앞섶을 꽉 붙잡았다.
“백우진, 도망치자. 저건 절대로 이길 수가 없어. 너도 알잖아? 저건…!”
공포에 떨고 있는 어 깨를 조용히 끌어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그래.도망칠 거야.”
가만히 안고 있을 시간은 없다.
“당 소저, 부탁하나만하자.”
“•••얘기해.”
“독좀 줘.
“열화신독이라면….”
그녀 가 곧장 안주머 니를 뒤 지 자 백우진 이 고개를 저 었다.
“그거 말고, 아주 강하고 센 걸로.”
기왕이면 아까 저 호랑이한테 썼던 거랑 비슷한 수준이면 좋겠는데.
당선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 미쳤니?”
백우진은 그녀의 말이 길어지 기 전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어허,조용.소리 질렀다가쟤 신경 거슬리면 어쩌려고.” a 99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짜증 가득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당 소저는 나 얼마나 믿나?”
당선영은 대답할 테니 손 치우라는 듯, 검지로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의 손을 가리켰다.
“아냐, 대답은 됐고. 난 당 소저가 날 온전히 믿을 거라 믿어.”
헤실헤실 웃으며 말하는 꼴이 영락없이 술에 취한 사람 같다.그러나그것 도 잠시,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날 믿고 내줘 . 당 소저가 생 각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망설이 던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 이고 말았다.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자 그녀가 숨을 크게 내뱉 었다. 그리고선 백우진을 노려보다가 이내 안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어 건네주었다.
“칠보단혼산은 조금 전이 마지막이 었어. 이건 금선사에게서 얻어낸 독이 야. 칠보단혼산에 비하면 조금 떨어지 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선
가장 강해.
금선사는 몸통에 금색 선이 그어진 몸통은 작지만 아주 강력한 독을 품고 있는 뱀을 일컫는다. 이 녀석은 남만에서만 극히 드물게 발견되어 독을 다루 는 이들에 게 보물과도 같은 존재 이기도 했다.
병을 가져가려는 백우진의 손을 꼭 붙잡으며 그녀는 재차 당부했다.
“절대 우습게 보면 안돼. 칠보단혼산에 비해 약하다는 거지, 금선사의 독 은 사람이 조금만 마셔도 단숨에 목숨을 잃는 극독이 야.”
“걱정 마.”
나도 내 몸귀한 건 알거든.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꼭 붙잡은 손을 비틀어 빼냈다.
“예화, 제 갈 소저! 당장 이 리로 모여 !”
여전히 넋을 놓고 있던 두 사람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백우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크르르르
호환의 낮은 울음에 두 사람의 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지 금부터 퇴 각해 . 놈은 내가 잠깐 묶어 둘 테 니.”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 마! 아무리 네가 강해도그건 불가능해!”
신예화가 목소리를 높였다.
“맞상대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적당히 도망치 면서 시간을 끌겠다고. 다 같이 있어봤자 시선만 분산시킬 뿐이야.”
“배, 백 공자. 그냥 같이 도망쳐요…! 네 …?”
“하아.”
시 간이 촉박하다. 매 달리 는 그녀 들을 이 해 시 킬 시 간이 없단 말이 다.
그의 시선이 당선영에게 닿았다.
“당 소저.”
“하아…, 알았어.”
한숨을 내쉬며 출수한 양손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두 여인의 뒷목을 후려 쳤다.
당선영은 짧은 탄성과 함께 허물어진 두 여인의 몸을 받아냈다.
“죽으면 용서 안해. 알고 있겠지?”
당가는원한을 절대 잊지 않아.
섬뜩한 경고에 백우진이 설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꼭 돌아와.”
마지 막 말을 남긴 채 , 그녀는 두 여 인을 끌어 안고 멀어져 갔다.
“휴우.
당선영과 조원들을 안전하게 퇴각시킨 백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로돌아섰다.
“야, 기다려줘서 고맙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눈에서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는 호환 은 자신을 기 다려주었다.
“기다려주는 김에 조금만더 기다려주라!”
한층 더 거세게 울면서도 녀석은 기다려줄 생각인지 발을 떼지 않고 있었 다.
백우진은 그 틈을 타 당선영에게서 받은 금선사의 독이 든 병의 마개를 열었다.
“내몸 소중한 거야알지.”
그런데.
“내 동료들 몸이 내 몸보단 쪼오금 더 소중하더라고.”
낄낄낄!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금선사의 독을 호리병에 붓고 마개를 닫은뒤,음주 선공을 운용하며 흔들어 댔다.
“무슨독이나올까〜요! 피, 피카츄!”
세차게 흔든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쓰디쓴 한약의 냄새가 스멀 스멀 올라왔다.
“어욱.
냄새만 맡아도 알겠다. 이걸 마시면 몸이 성할 리가 없다는 것 정도는.
그럼에도 백우진은 호리병을 제 입에다 대고 기울였다. 별다른 대안이 없 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며.
꿀꺽꿀꺽!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흐를 때마다 아찔한 감각이 몸을 스치운다.
금선사의 독은 현재의 성취로는 완전히 녹여낼 수 없는독이었는지, 강렬 한기운과더불어 지독한독기마저 함께 퍼지기 시작했다.
“크헉!”
검은 피가 한움큼 토해졌다.
기운이 움직일 때마다 독기 또한 함께 움직 이며 몸을 괴롭혔다.
백우진은 힘겹게 웃으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호 환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오래 싸우긴 글렀다, 야.”
술로부터 녹여낸 기운이 몸에 차오를 즈음, 백우진은 다시 검을 쥐었다.
“이제안기다려도돼.”
호환이 허공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