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69화 (69/215)

<69 화 > 호환(虎턤)

[이보게, 한잔만 더 주게.]

재탕을 요구하는 호환의 뻔뻔함에 혈압이 솟구쳤다.

“벌써 세 번째인 건 알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잖은가. 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 산 호랑이 소원 하나쯤 들어주는 게 예의 아닌가?]

“쁠르 드즜으믄

즈크뜨….”

빨리 뒤 졌으면 좋겠다고 고사를 지낸 뒤 , 흙까지 핥아 바짝 말라버 린 구덩 이에 세 번째로 술을 따라주었다.

[크으, 옛날 생각이 나는구먼. 이따금 산에 내려온 신선들과 술잔을 나누 던 때가 좋았지.]

“옛날에는신선이 자주 내려왔나봐.”

[지금보단그러했지. 그때는 지금과 달리 세상이 깨끗했으니.]

“달라진 이유는 마기 때문인가.”

[맞네. 마기가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이 세상 전체 가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불모지 가 될 게 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술을 퍼먹던 녀석은 어느새 비어버린 구덩이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곤 말을 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백우진이 호리병을 들어 올렸다.

“한잔 더?”

흔쾌히 수락할 거란 예상과는 달리, 호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아쉬울 때야말로 끝내야 할 때지. 더군다나 이 이상 마셨다간 기 껏 깨어난 정신이 다시 봉인될 판일세.]

“음, 확실히 그건 그렇지.”

새하얀 털을 뚫고 올라올 정도로 얼굴이 새빨갛다.

저렇게 마시다가 정신줄 놓고 마기의 본능이 장악하게 되면 그보다 큰 민 폐는 없으리라.

[내게 살기를드러내는순간다시 내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기 시작할게야

“결국 싸움으로 끝내 야 하는 건가.”

[자네에게 딱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주겠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이 몸을 잠시 멈출 것이야.그때를 노리게.]

“좋아.”

[준비되면 내게 살기를 방출하시게.]

“스읍.,,

후우.

깊은 호흡을 이어가며 느슨해진 정신을 다시금 꽉 동여맨다.

차갑게 식 어 가는 몸을 가열하여 재 차 달구며 살기 를 품은 두 눈으로 호환 을 노려본 순간.

크허허허엉!

억눌려 있던 호환의 살의 가 되 살아났다.

[크윽…,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어렵구먼…!]

이를 증명하듯, 청색으로 돌아왔던 좌안이 적색과 청색을 오가며 점멸 하고 있었다.

뜨겁게 달군 몸이 호환의 공격을 흘려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멈추었던 술 향기가 또한 다시 흘렀다.

[오, 이제 좀 낫구먼.]

그 향기가 정신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주었다.

온전히 본능에 따라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인지,놈의 움직 임은 조금 전보다 한층 느려졌다. 덕분에 피하는 게 조금은 수월했다.

[슬슬 준비하게.]

태백호의 정신이 그에게 신호를 주었다.

백우진은 이를 위해 크게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후우…!”

단 한 번 주어지는 기회로 완벽하게 숨통을 끊어놓아야 한다.

검병을 머리까지 끌어 올리고 검극을 호환에게 겨누었다. 자세는 더욱 낮 추고, 체중이 모두 앞으로 향하도록 몸을 기울인다.

준비를끝마친 그순간, 거리를좁히기 위해 달려오던 호환의 몸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지금일세!]

빠득!

이를 꽉 깨물며 기운의 충돌로 폭발적 인 속도를 얻 어내는 벼락을 응용하 여 용천혈에서 기운을 충돌시켜 앞으로 쏘아진다.

콰릉!

그와 동시에 검은 백섬검결의 찌르기 초식인 백섬광망을 운용하여 세상 천지에서 오직 자신만이 펼쳐낼 수 있는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냈다.

백뢰관천(白雷貫天).

파지직!

한 줄기 섬광이 되어 허공을 날아간 검끝이 멈춰 선 호환의 가죽을 손쉽게 꿰뚫고 나아갔다.

단단한 가죽과 질긴 살을 뚫고 들어 가 도달한 곳은 녀석의 심장이 었다.

푸슉!

크와아아앙!

놈의 고통어린 포효가바로 앞에서 터져 나왔다.귀에서 뜨거운 핏줄기가 새어 나온다.

심장을 정확히 찌른 검을 그대로 손에서 놓았다.

[크으…! 수백 년을 살았지만 이런 고통은처음일세.]

두 눈동자가 청색으로 돌아온 호환 아니, 태백호가 낮게 으르렁대자 백우 진은 앞전에 파둔구덩이에 다시 술을흘려 넣었다.

“드시오.”

마기의 통제에서 온전히 벗어난 그를 대하는 말투 또한 달라졌다.

[허허, 고맙네.]

웅덩 이 앞에 힘 겹게 주저 앉은 태 백호는 조금 전과 달리 혀만 날름거 리 며 가볍게 목을 축였다.

[십 년 전, 죽음을눈앞에 두었을 때였어.놈들이 나를 찾아왔지.]

수백 년을 살다가 이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때였다.

“마교도?”

[그래. 같잖은 마석 하나를 내게 들이밀면서 나를 마물로 만들겠다지 뭔 가.]

그때의 상황을 떠 올리 며 콧바람을 흥! 하고 쏘아보낸 태백호가 말을 이 었 다.

[곧장 곤죽을 내주었지. 살아봤자 세상을 더럽히기밖에 못할 놈들이니 손 속에 사정 따위는 두지 않았어.]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곤 하나 고작 마석 하나에 태백호가 마물이 될 리가 없었다. 도리어 자신의 앞에서 천마를 연호하는 마교도들의 머리통을 앞발 로 전부 짓이겨 버렸다.

[그렇게 몇 년쯤지났나.또 다른불청객이 나를찾아오더군.]

“또 마교도였소?”

[마교도…라고하기엔 어폐가 있군.]

가볍게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태백호가 치켜뜬 두 눈동자에 미약한 공포 가 깃들었다.

[이번에 나를 찾아온 이는 스스로를 천마라 칭했네.]

“……!”

천마(天魔)!

일황과삼존 위에 놓인 그 이름이 마침내 거론되었다.

[ 무거운발걸음을어이하여 이리로옮겼는가물었더니 천마는 그렇게 말 하더군.]

“그대의 존재가실로존귀하니 내 직접 찾아와수하로 거두는 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여 겼을 뿐.”

[•••라고 말일세.]

백 우진이 불신 어 린 눈빛으로 그를 쳐 다보았다.

“거짓말아니오?”

[어허, 토씨 하나틀리지 않았네!]

“그래서, 그다음은.”

[천마의 마기는 마석 따위와는 차원 이 달랐네 . 아무리 죽음을 코앞에 두 었다지만 이 내 가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마물이 되 었으니 말이야.]

그때를 떠올린 태백호의 거대한 체구가 부르르 떨렸다. 생 각하기도 싫다 는듯,표정에서 싫은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났다.

[그 뒤는…, 자네가 알고 있는 대로일세. 창귀를 이용하여 나를 따르는 마 을 사람들을 조종하여 인간을 제물로 바치게 했지 ….]

그의 눈동자에 수많은 후회 가 내비쳐졌다.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하는데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 구먼.]

그러면서 이쪽을빤히 쳐다보는데,속셈이 훤히 드러났다.

“•••내가대신전해주겠소.”

[허허, 고마우이.]

대체 저 호랑이 얼굴에서 왜 다양한표정들을 읽어낼 수 있는지 모르겠다.

태백호에게서 느껴지는 생기가 점차 옅어져 갔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 마남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힘 없는 청색 눈동자가 백우진을 올려다봤다.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무언가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결심이 선 듯, 그의 머릿속에다 대고 말을 걸었다.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또 뭐요.”

퉁명스럽 기 짝이 없는 대답 속에서 따스한 감정 이 고스란히 느껴 졌다.

[저 동굴 깊숙한곳에 내 아이가잠들어 있네.]

“아이?”

[기실 이곳에는소중한 것이 잠들어 있었어. 나는그것을 지키기 위해 존재 하는수호신 같은 것이었지.]

이 산에는 태백호가 지켜야 할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러다 악인들 또는 짐 승에게 물어뜯기기 직전의 사람들 몇을 구했고, 구명지은을 입은 이들이 태 백호를 산신으로 모시며 살아가기 위해 만든 곳이 이곳 아래에 있는 마을이 다.

“소중한 거라면….”

[나도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네.그저 태어날때부터 내 아비에게서 그것 을 지키는 것이 사명이라 전해 들었을 뿐.]

“그 아이 또한 그것을 위해 태어난 건가.”

[맞네.원래는 내 뒤를 이어 이 산을 지켜야만했지.헌데, 상황이 달라졌어. ]

힘없이 축 늘어지는 태백호의 귀를 보고 백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 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자네 짐작대로 천마가 그것을 가져갔네. 어쩌면…, 내가 아닌 그것이 천 마가 직접 여기까지 온목적이 아닐까싶으이.]

“그럼 그것을 꺼낼 때 봤을 거 아니오.그게 무슨물건인지.”

태 백 호가 고개 를 저 었다.

[묘한 기운을 뿜어내는 천에 싸여 있었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 크기가 사람 주먹 만 한 정도라는 것일세.]

“주먹만한크기의 무언가라….”

짐작 가는 것은 없었다. 애초에 소설에서도 다루지 않은 내용이었다.

허나 천마가 이곳까지 와서 가져가야 할 물건이라면 필시 높은 중요도를 지닌 물건일 터.

생각에 잠긴 사이,태백호의 말이 이어졌다.

[내 대에서 사명이 끝났으니, 내 아이는 자유의 몸이 된 게야.]

그가하고자하는부탁이 무엇인지 느낌이 왔다.

“설마 그 아이를 나보고 맡아달란 겁 니 까?”

[부탁함세.]

날 때부터 천방지축 마음대로 쏘다니던 철없는 아이다. 거기에 자유까지 주어졌다는 걸 알면 대책 없이 돌아다니다 인간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죽기 직 전까지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큰 호랑이를 사람들 틈에서 어떻게 키운단 말이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돼. 내 아이는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무척 이나 작다네.]

“••••••.”

거부할 이유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이야 한없이 미약한아이네만, 언제고자네에게 큰도움이 되어줄 게 야.그것만은 내장담함세.]

마음이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확실히 태백호라면 장차 벌어질 일들에서 언제고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존재였다.

“정 말작소?”

[말했듯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 가 무척이나 작네. 이를테면 … 옳거니, 저 작은 돌덩이와 비슷하겠어.]

그가 가리킨 돌덩 이는 성인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였다. 저만한 정도라면 확실히 키우는 부담감은 적을 터였다.

“좋소. 내가 맡아서 잘 키워보겠소.”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

타오르는 불꽃이 꺼 져가듯, 그의 생기 또한 다 타버린 장작불처럼 미 약한 불씨만이 남았다.

[내가죽거든…, 내 배를 갈라보게. 마기에 물들어 쓸 데가 있을진 모르겠 으나…, 내단이 있을게야.]

알겠소.”

[슬슬끝이 보이는구먼….혹, 내게 물을 것이 남아 있는가?]

감길 듯, 말 듯한 그의 눈동자를 보며 백우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 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말이오….”

[기탄없이 얘기하게.죽는 마당에 뭔들대답을못 해주겠나.]

“그렇다면 내 조금 더 당당히 물어보겠소.”

흠흠!

목청을 가다듬은 백우진이 사뭇진지한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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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이 보았다던 천마는…, 남자요, 여자요?”

[허허, 미친놈이로고.]

설마 죽어가는 영물에게 묻는다는 게 천마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을 줄 이야.

[천마가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떻기에 그걸 묻나.]

“내게는 아주 중요하오.”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의 미없는 질문일 수도 있으나 백우진에게는 무엇보 다 중요한 질문이 다.

천마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질 테니.

[내가본천마는…, 여자였네.]

비로소 끝이 찾아왔다. 태백호는 제 영혼이 육신을 서서히 벗어나고 있음 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마침내 태백호의 숨이 완전히 멎었다.

가만히 서서 그를 지켜보던 백우진은 고개를숙인 채, 쥐고 있던 주먹을 부 르르 떨었다.

“천마가…, 여자란 말이지.”

이상한 괴물 놈들을 키우는 탓에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고개를 든 백우진의 눈동자는 의 지로 불타올랐다.

“기다려라, 천마!”

내 최대한빨리 너를보러 갈테니.

“핑크 머리가 아니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새롭에 각오를 다친 백우진은 태백호가 남기고 간 사체로 다가가 아랫배 쪽을 가른 뒤, 손을 집어넣었다.

“이건가…?”

내단으로 짐작되는 것이 손끝에 만져지자, 이를 쥐고 잡아당겼다.

“윽.,,

엄지만 한 크기의 내단에서 뿜어내는 마기는 마석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 로 강력했다.

“일단 씻자.”

호리병의 술을 부어 내단에 묻은 피를 깨끗이 씻겨낸 뒤, 옷자락을 부욱 찢어 내단을 가운데에 두고조심스레 감싸제 품에 넣었다.

갑자기 가슴이 든든해졌다.

백우진은 진법을 파훼할 때 사용했던 지진의 규모를 작게 사용하여 커다 란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그 안에 태백호의 사체를 밀어 넣었다.

단단하고 질긴 그의 가죽이라면 분명 쓰임새가 많겠지만, 길지는 않아도 이 야기를 나누고 술을 나누었던 상대를 그토록 해체하고 싶지는 않았다.

“부디 다음에는자유의 몸으로태어나시오.”

수백 년 동안 짊어진 사명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아마 세계의 명운을 짊어 졌던 때의 자신과 비교해도크게 밀리지 않았으리라.

“평안하시오.”

이제부터는 부디 평안하길 바라며, 백우진은 그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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