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71화 (71/215)

< 기화〉사경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그때도 목숨을 걸고 동료들을 구한 뒤 온몸에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가 가 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때 였다.

전장에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걱정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봐주었던 여 인이 불구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 싸늘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 다.

-네놈은 누구냐.

죽음이 거의 확정된 몸을 살리기 위해 제국은과거 초대 황제와계약을 맺 었다는 수호룡에 게 빌 수 있는 두 개의 소원 중 하나를 사용했다.

신의 대리자라고도 불리는 드래곤은 죽어가는 그의 몸을 되살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전혀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발설하고 말았다.

과거부터 그와 함께였던 연인은 지독한 분노에 휩싸였고, 그가 깨어나기 만을 기다렸다.

애써 입을 열었지만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또한 이 문제로 수도 없이 많은 밤을 고민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당장 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선택을했다. 마왕의 목을 친 후에 그녀에게 진실 을 알려주리라고.

지금에 와서 그 말을 꺼내 봤자변명에 불과함을 알았기에 차마꺼내지 못 했다.

-네놈이네놈이…!

배신감, 상실감, 치욕감으로 점철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원독에 바쳐 쏟아내는 말들을 담담히 받아줄 수 있는 것밖에.

차라리 그대로 헤 어졌다면 나았으련만 그는 용사, 그녀는 파티에서 용사 다음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터라 불편한 동행 이 이 어졌다.

삐 걱 거 리 는 소음 속에 서도 파티 는 원하는 바를 이 루어 냈다.

마왕의 목을 베어내는 데에 성공한 그에게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곳에서 쭉 살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고아 신세 인 지구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수없이 많은 이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또한 이곳 주민 모두가 자신을 칭송한다.

그럼에도.

“•••돌아가겠어.”

그는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

........

세 상 모두의 따스한 시선 속 느껴 지는 한 쌍의 원 독으로 가득 찬 시 선이 이 세상무엇보다두렵고, 괴로웠기에.

그렇게 그는 도망치듯 판타지 세계를 빠져나와 지구로 돌아왔다.

누구도 자신을 걱 정하지 않는 차갑고 쓸쓸한 단칸방으로.

어스름한 새벽.

선잠을 자다가 깬 당선영은 소리 없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백 우진이 잠들어 있는 집으로 향했다.

한나절에 걸친 치료가 끝난 후, 고비를 넘긴 뒤 잠에 빠져든 백우진은 이틀 이 지 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는다더니….”

장삼에 의해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마을 주민들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 다.

기력을 다 쓰고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어제 겨우 깨어난 장삼은 그들을 조 종하던 원흉이 사라졌기에 그런 것이라고했다.

제 품에 새끼 백호를 넣어 내려온 것만 해도 알 수 있다.

자신은 생 채 기밖에 내 지 못한 그 거대 한 백호를, 백우진이 단신으로 잡아 냈음을.

“대체 뭐하는 인간일까.”

조금 알았다고 생 각하면 또 모르는 면이 나타난다. 얄미운 생 각이 들어 곤 히 잠든그의 코를 검지로툭 건드렸다.

그러자 이틀간 아무런 변화도 없던 백 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머?”

자신이 너무 세게 때렸나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백우진…?”

굳게 닫힌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어느새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마찬가지로 곱게 맞물려 있는 입술이 벌어지더니 뭐라고 작게 속삭이기 시 작했다.

고개를 숙여 귀 를 가까이 가져 가자 미 약한 말소리 가 들려 왔다.

“안해…. 내가미안….”

끊임 없이 미 안하다는 말만 계 속해 서 반복 중이 었다.

애처롭고 애잔했다. 제 실수로 인한 사과도 당당하게 고개를 숙이던 남자 가 이토록 구슬픈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면서도 가슴이 아 팠다.

당선영은 팔로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여주며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가 닿은 건지, 흐느끼는 백우진의 얼굴이 조금씩 평온을 되 찾았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 법 긴 시 간 동안 그를 토닥여주던 그녀 가 의 아 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쳐 다봤다.

숨소리가 달라졌다. 조금 전까지 만 해도 아주 깊은 숨을 내쉬 며 일정한 박 자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지금은 숨의 길이 가 짧아지고 박자 또한 조금씩 어 긋났다.

“너,깨어있지?”

굳게 닫혀 있던 눈썹 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눈떠.”

그러다조금 전 잠에서 깨어난백우진이 슬며시 눈을 떴다.

“아,좋았는데.”

그가 아쉽 다는 투로 말하자 당선영 이 어 이 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게 이틀만에 깨어나서 할 말이니?”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어?”

“그래. 다들 너 걱정하느라 잠도제대로못 자고 있었어. 아, 구왕수 빼고.”

구왕수는 아주 잘 잤다.

“흐흐. 그럼 됐어.”

깨어났을 때 모두가 걱정하고 있었다는 말을 들을 때만큼 기쁜 일은 또 없 다.

자신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백우진의 두 눈이 왠지 모르게 무척이나 슬프게 보였다.

그의 눈과 얼굴이 묘한 분위 기를 자아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과 처연한 눈동자가 이루 말하기 힘든 묘한 감정을 자극한다.

가슴에 맞닿아 있던 손을 지그시 누르며 다리를 들어 그의 몸 반대편으로 넘겼다.

“왜,왜이래?”

자신의 배에 살포시 올라탄 채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맞닿은 피부에 서 부드러운 촉감과 달콤한 향기 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지금은 좀…, 위험한데.”

내공이 텅텅 비어 있는상태다. 다행히 정신이 또렷해 잠시간은 막을수 있 을지 도 모르나 이 대 로 시 간이 흐르면 미 약 향기 에 취 해 버 릴지 도.

“궁금한게 있어.”

“•••뭔데?”

“진법 안으로들어갈때 마지막으로했던 말, 기억하니?”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지만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조건 성공하고 돌아오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것 같은데.

백우진이 고개를 가로젓자 그녀가 대신 답을 말했다.

“오케이…, 였던가?”

“ 아.”

전장에서 매번 오케이, 오케이 하고 다니던 예전 버릇이 저도모르게 튀어 나온듯했다.

“그거, 무슨 뜻이야?”

“대충알았다, 좋다라는 뜻이야. 서양… 아니, 색목인들이 자주 쓰는 말이 고.”

그러 자 그녀 가 사뭇 놀란 표정을 지 었다.

“색목인말을 어떻게 알고?”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오다가다 배운 정도.”

흥미롭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별안간 짙은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럼 이 건 색목인들 사이 에서 뭐 라고 하는지 •••,아니 ?”

“뭘...,읍!”

망설임 없이 허리를 숙이며 다가선 그녀의 입술이 백우진의 입술에 맞닿 았다.

농밀한 입맞춤이 시작됐다. 당선영의 혀가 침투해와 입속을 헤집어 놓았 다.

‘뭐야, 이거!’

입속을 헤집고, 혀와 혀가 맞닿아 하나가 된 것처럼 끈적하게 움직이다가 또부드럽게 입술을 핥는다.

지금까지 제법 많은 입맞춤을 해왔지만 이토록 강렬하고 자극적인 느낌 은 처음이었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 다보자 그녀 또한 요염하다 못해 색 기 가 흘러 넘칠 것만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자존심 상하네.’

이 제는 남자의 자존심 이 걸린 문제 가 되 었다. 이 대로 녹아내 리 면 밤에는 영영 그녀의 밑에 깔려 살아야할지도모른다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은…, 아, 아니지.’

우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반반은 가야지.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아간 백우진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읍…!”

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그녀의 기술에 대응하고, 손을 들어 부드러운 그녀의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기립근을 쓸어내린다.

귀를 어루만지고, 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고, 목덜미를 간질인다. 그럴 때 마다 맞닿은 그녀의 입술 사이로 참을 수 없는 야릇함이 새어 나왔다.

어느새 위치가뒤바뀌었다.백우진이 위에, 당선영이 아래에 깔렸다.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미약 효과가슬슬 몸속에 차오르기 시작 했다는 신호였다.

한참을 얽혀 있던 입술을 떼어내자두 사람 사이로 얇은 실이 한 줄기 길게 늘어졌다가 툭 끊어져 내렸다.

“색 목인들은 이 걸 보고 키스라고 불러.”

“키스….”

황홀경에 빠진 그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를 되뇌 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구왕수를 제외한 조원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가장 먼저 일어난 제갈연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백우진의 상태를 살펴 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들어간그녀는 곤히 잠에 빠진 백우진 대신 상체를 일으킨 채 술 병을 꼬나쥐고 있는 백우진을 발견했다.

단숨에 눈물이 차올랐다.

“백 공자아… !”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달려 간 그녀 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품으로 뛰어들었다.

“억 I”

몸을 온전히 회복하지 못한 백우진이 받아내기엔 벅찼고, 고통어린 신음 이 튀 어 나오자 놀란 그녀 가 황급히 몸을 떼 어 내 며 고개 를 숙였다.

“아,아…! 죄, 죄송해요!”

“괜찮아.”

다정한 그의 음성을 듣자 또 한 번 눈물이 차올랐다.

“어,얼마나걱정했는지 아세요?!”

처음으로 그녀가 화를 냈다.

“시 간만 번다고 했으면서 •••,어,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올 수 있어요… !”

하염없이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던 그녀에게 마침내 나타난 백우진의 처참 한 몰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을 전해주었다.

“그놈이 원체 날래야말이지.못죽이면 내가죽을 판이어서 그랬어.”

이해좀 해주라. 응?

백우진이 어깨를 끌어 안으며 속삭이 자 잔뜩 화가 나 빨개 졌던 얼굴이 터 지 기 일보직 전 수준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노,놓으세요…!”

“용서해줄때까지 안놓을 건데.”

그녀의 자그마한 몸부림에 대항하듯 더욱 끌어안자 귓가로 전해지는 숨 소리가 점차 거세졌다.

“이,이러시면…, 저, 저도…!”

“응? 뭐할 건데?”

능청스럽게 웃으며 되묻자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얼굴을 앞으로 쭉 내밀어왔다.

피할 생각은 없어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쏜 살같이 안으로 들어와 소리쳤다.

“우, 우, 우진아! 괘, 괜찮아?!”

신예화였다.

“히 엑!”

놀란 제갈연지 가 곧장 품에서 떨어져 거리를 벌렸다. 그러다 뒤로 벌러덩 넘어져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아얏…!”

가볍게 부딪친 뒤통수를 문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 리면서 신예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이제 좀 괜찮아졌어.”

“다,다, 다행이다.”

그 사이 제갈연지가 짜증 섞인 시선으로 신예화를 노려봤다. 그러자 그녀 는 어림 없다는 듯, 콧방귀 를 뀌 며 고개를 획 돌렸다.

“한시진쯤후에 다들모이라고 전해줘.”

“으,응. 알겠어.”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신예화는 발버둥치는 제갈연지의 옷깃을 부여잡은 채 사라졌다.

바깥에서 서로에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내공이 부족한 탓에 듣지 못했다.

“아침부터 요란하구만.”

아무런 피해 없이 웃고 떠드는 그들의 모습에 한없이 기꺼운 웃음을 그려 내며 부족한 내공을 채우기 위해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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