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화〉눈길
한걸음, 또한 걸음.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나아간 걸음은 백우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 장벽에 부딪히고 나서야 비로소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
안면에서 느껴 지는 둔탁한 충격에 정신을 되찾은 유화연. 그런 그녀를 주 변의 몇몇 생도들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유화연이 여기는무슨 일이래?”
“그러게.백 공자님이랑파혼했다고하지 않았나…?”
두 사람의 파혼 소식은 이미 한바탕 학관 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을 정도 로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유화연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다더라, 환골탈태에 가까울 정도로 변한 백 우진이 그녀를 헌신짝처럼 내버렸다더라, 사실 두 사람은 예전에 헤어졌고 이별의 충격에 백우진이 그토록 변한 것이라더라 등등.
두 사람에 대 해 이 야기를 나누는 생도들 사이 에 서 갑론을박이 벌어 졌을 정도.
“설마백 공자가잘되니까 이제 와서 잘해보려고온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생도들이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얘기들이 한껏 예민해진 귀를두드린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역시 사람들은 그렇게 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며 시선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백우진 의 시선 또한 이쪽으로 향했다.
“흑…!”
백우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해 있다.
바라고 또 바랐던 순간이 건 만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갑갑함과 누군가 툭 건드리 면 당장에 라도 눈물을 쏟아낼 수 있을 정도로 격한 슬픔을 동시 에 느껴 야만 했다.
서로가 소년, 소녀였을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함께 해왔다.
비록 그 끝이 좋지 않았다고는 하나, 함께 했던 그 시간만큼은 지우고 싶 다고 하여 지울 수 있을 만큼 짧은 시간이 아니었을 터인데.
‘왜…?’
그는 무심하고, 무감정한 눈과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기쁨, 반가움 같은 감정 따위는 바란 적도 없고, 기대조차도 하지 않았다.
‘적어도화정도는….’
잔잔한 호수 같은 저 눈동자에 차라리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으면 했다.
분노라는 감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끊어지지 못한 인과에서 나오는 것. 나쁜 의 미 라도 그가 자신을 잊지 못했다는 이 야기 일 테니.
“하아, 하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숨이 절로 가빠졌다. 크게 숨을 들이 마시고 있는 데도 폐에 구멍이 나 어디론가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눈을 떠도, 감아도 백우진의 무감정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그 눈빛이 꼭 나는 이미 너에 대한 모든 것을 잊었노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심장을 강하게 옥죄는듯한느낌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았다.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지병이라도 있는건가?”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숨을 가쁘게 내쉬고, 가슴을 부여잡는 행동에 생도 들이 의 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저러지?’
그중에는 백우진 또한 포함되 어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주변이 소란스러워져 자연스럽 게 시선을 옮긴 곳에 유화연이 서 있었다.
소룡회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그녀였다. 그때 보았을 때보다 전체적으로 몸이 말랐다.
단순히 살이 빠진 게 아니라 근육까지 함께 빠진 듯 가냘프다 못해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만 같은 초라한 모양새 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은 마음으로 보고 있었는데.
자신과 눈이 마주친 그녀가갑자기 숨을 헐떡이더니 가슴을 붙잡는게 아 닌가.
거친 숨소리만 듣고도 지금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 수 있었다.
‘과호흡이네.’
보통 극도의 긴장, 공포, 흥분 상태에서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깊게 호흡 을 들이마시게 되면서 발생하는 현상을 과호흡 증후군이라 부른다.
그렇기에 더더욱의아했다. 자신과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그녀가과호흡 이 올 정도로 감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는 뜻이 아닌가.
‘대체 왜?!’
불안했다. 매우 좋지 않은 감각들이 온몸을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머릿속 으로들어온다.
소설 속에서는 그녀 또한 NovelGod의 무리한 드리프트 이후 신예화 이 상 가는 집 착과 소유욕을 드러 낸다.
허나 소설과는 달리 그녀에게선 집착이나 소유욕을 드러내는 그 어떤 행 동이나모습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 크게 엮일 일은 없겠다 싶어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고작 자신과 눈이 마주치 고서 저 런 격 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무척 이 나 당황스럽다.
“하악, 하윽…!”
한 번 가빠진 호흡이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의 아함을 느낀 생도 몇이 다가가 그녀에 게 안부를 물을 뿐, 적절한 대처 방안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한 가슴을 부여잡은 두 손끝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부릅뜬 두 눈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공포가 드러나 있다. 인간은 숨을 쉬 지 못하게 되면 죽는다. 그것은 아무리 고수라 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 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
손끝에서 시작된 저림과 경련이 서서히 그 범위를 늘려갔다. 과호흡이 점 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보여주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을 겪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한다.
섣불리 다가갔다가 또 잘못된 인연으로 엮이면 어떡하지, 사람이 고통받 고 있는데 일단 도와주고 보자는 상반되는 생각들이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간절하고, 애처롭고, 애잔한 눈빛이 마음을 뒤흔들자, 백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 안돼.’
대체 무슨 연유에선지, 그녀는 여전히 이 몸에 애절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이대로 섣불리 다가가면 또 한번 일이 꼬일지도 모른다.
‘내가가는 건불가능해.’
백우진은 가장근처에 있는 여생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봐, 소저.”
“네,네…?”
당황한 그녀가 토끼눈을 뜬 채로 이쪽을 바라본다.
“지금부터 내가 얘 기해주는 대로 유 소저를 치료해주는 거야. 알았지 ?”
“제,제가 왜….”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투로 말하는 그녀의 양손을 꼭 붙잡으며 얼굴을 가까 이 들이밀었다.
“히끅!”
그녀의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내가사정이 있어서 그래.부탁좀하자,응?”
“아, 아, 알겠어요…!”
간이 나 쓸개 라도 빼줄 것처 럼 고개를 세 차게 끄덕 이 는 여 생도.
백우진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과호흡에 대한 대처 방안을 그녀에게 꼼꼼 하게 일러주었다.
“저,저기 다음에 가, 같이 식사라도…!”
마지막에 용기를쥐어 짜내어 던진 그녀의 한마디.
백우진은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 다음에 둘이서 식사한끼 하기로해.”
“기,기다릴게요! 꼭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일단 유 소저부터, 알지 ?”
“네!”
유화연을 향해 다가가는 여생도의 가벼운 발걸음은 마치 날개 달린 신발 이 라도 신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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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소저! 저를 따라서 호흡하세요. 자아, 하나, 둘….”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여생도는 백우진이 일러준 대로 그녀의 호흡을 안 정시키기 위한 방법을 하나둘씩 실행해 나갔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호흡이 점차 제 속도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얗게 질렸던 혈색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그녀가 안정기로 접어들었음을 알려주었다.
더 이상나빠질 일은 없으리라여긴 백우진은곧장뒤로돌아서서 더 이상 그녀와 엮이지 않도록 자리를 벗어났다.
…
백우진으로부터 말미암아 찾아와 온몸을 엄습했던 공포는 어느 한 여생 도의 도움으로 왔던 것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그녀는 두어 번 정도 주먹을 쥐 었다가 펴보았다. 저린 느낌이 아직 남아 있 기는 했지 만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다.
“정말고마워요.”
위급한 순간에 다가와 자신을 도와준 여생도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자, 그녀는 무언가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았다.
“와아…, 정말 백공자 말이 맞았네.”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지금뭐라고….”
“아네? 아, 아니.”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어떡 하지 猌 백 공자가 절대 비밀로 해 달랬는데 … !’
유화연을 안정시킬 방법을 세세하게 일러주면서 백우진은 자신이 알려주 었다는 사실은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방금 백 공자 말이 맞았다고 했잖아요.”
“제,제가요?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하지만분명…!”
“저, 저는 백 공자라는 말은 한 적이 없어요! 그럼 이만!”
둘러댈 말이 부족했던 그녀가 막무가내로 말을 끊으며 제 할 말만을 남긴 뒤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잠깐, 아…!
빠르게 줄행랑을 치는 그녀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무리였다. 아직까지 발 바닥에 남아 있는 저릿한 감각이 그녀를 옭아맸다.
백우진이 사라지자 주변의 생도들도 하나둘씩 제 갈 길을 가기 위해 발 걸음을 옮겼다.
도망치듯 사라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화연만이 그곳에 홀 로 남았다.
“분명백 공자라고 했어….”
정무학관에 백 공자가 백우진밖에 없겠냐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 지 백우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통에 신음하는 자신을 보면서도 표정 한 번 바뀌지 않았던 그다. 그래서 더 이상 자신은 무엇을 해도 그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없는 거구나 싶어 더욱 아팠다.
그런데 아니 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었다. 비록 그의 손길로 직접 어루만 져 주지는 않았으나 고통스러워하는 자신을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했다.
“백 공자도 아직 날… !”
가슴이 멋대로 품으려는 희 망을 제 손으로 부순다.
1그럴 리 가 없지.”
그가 여지껏 자신을 가슴 한켠에 두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너무나도 편의 주의적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쓰러졌다면 다른 이의 손이 아닌 제 손으로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다꺼진 불씨 하나를주워 가슴에 품는다.
잠시나마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묶어 두었다.
여생도에게 자신을 치료할 방법을 일러주는 그의 눈에 걱정이라는 감정 이 미 약하나마 담겨 있었으리 라 상상해본다.
“그래, 그러면되는 거야.”
그를 다시금 자신의 옆에 두고 싶다는 욕망은 지금 당장 꺼내들 수도 없고 ,꺼내서도안된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조금이라도 좋아. 찰나의 순간이라도…, 그가 나를 보게 하는 거야.”
하루 열두 시진 중 찰나에 불과한 시간만이라도 그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붙잡아두는것.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조차도 모르는 사이 에 그의 시 선을, 시 간을, 나아가 생 각까지.
그것이 모이고모이면 그에게로 향하는 길 위에 높다랗게 쌓인 벽에 균열 이생기리라.
유화연은 백우진이 잠시 머물렀던 자리를 아련한 눈길로 쓸어 담으며 읊 조렸다.
“가가….”
이 제는 꺼 내 지 못하는 그 말을, 다시금 꺼 낼 수 있게 될 날을 그리 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