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화 > 저무는꽃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본 백우진은 눈 을 질끈 감았다.
‘일났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의지를 내비쳤다. 이 비무를 절대 길게 끌지 않겠다고 무언으로 전달함으로써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를 불씨를 미연에 꺼트리 고자 했건만.
그녀는 오히려 이를 땔감으로 삼아 더욱 불타올랐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오래도록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깨부수고 절정에 다다랐다.
‘살다살다 이런 경우는처음보네.’
이 세상, 저 세상돌아다니며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상황이란 상황은 대 부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상황이 남아 있을 줄이 야.
‘그래봐야 바뀌는건 없어.’
그녀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듯, 백우진 또한 그 녀의 변화로 말미암아 의 지를 더욱 단단히 굳혔다.
단숨에 땅을 박차그녀와의 거리를 좁혀 검을 내질렀다. 제법 빠른속도였 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침착하게 뒤로 물러나며 찔러오는 검을 걷어냈다.
카앙 캉!
이 어 순식간에 두 번의 합이 더 지나갔다. 생 각보다 더욱 단단한 그녀의 수 비에 백우진이 사뭇 놀란표정을 지었다.
한층 속도를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어지러이 얽힌다.
“흣…!”
주선검결의 복잡하다 못해 난해한 수준의 검로를 타고 들어오는 공격을 다 막아내지 못한 그녀의 팔에 얇은 선이 그어졌다.
이윽고 핏줄기가 새어 나왔다.
“흐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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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이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신음을 내며 그녀가뒤로물러났다.
“역시….”
그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득히 먼 곳까지 가셨네요.”
백우진의 경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곳에 도달해 있었다. 조금 전 에 펼친 몇 번의 공방은 절정에 올랐으니 어느 정도 해볼만하겠다 여긴 그녀 의 생각을 송두리째 뿌리 뽑았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수는 없어요.”
유화연은 두 가지의 이유로 아득바득 기어올라 이 자리에 섰다.
하나는 백우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마주보기 위해. 그리고 또 하나는 조 금이나마 더 그가 도달해 있는 곳으로 다가가기 위해.
‘당신에게 어울리는사람이 될 거예요.’
거센 호흡과 함께 그의 앞에서 주저 앉았던 날.
생도들에 게 서 들려온 이 야기들은 그녀를 더욱 아프게 하여 비로소 일깨 워주었다.
그에게 사과를 건넬 수 없음은, 진심을 전달할수 없음은 그가 높이 올라 가서가 아니라 자신이 초라한 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러니 그가 있는 곳까지 아니, 그 근처라도 가야만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앗!”
거친 기합성과 함께 수비로 일관하던 그녀의 검식 이 정반대로 뒤바뀌 었다 •
앞이 뾰족한 송곳처럼 아주 날카로운 검격들이 백우진의 넉넉한 품을 파 고들었다.
아무런 말도 나누지 않으리라 다짐한 백우진의 입에서 탄성이 나오게 할 정도로 날카롭고, 시의적절한 검격이 었다.
백 우진은 이를 부드럽 게 흘려 냄 과 동시 에 역으로 공격과 수비 를 뒤 바꾸 었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지 만, 속에 치 명적 인 예 기를 품은 검격이 허공 을 베어냈다.
그렇게 다가선 검이 허벅지를 길게 베어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백우진은 검을 비틀었다.
퍼억
검날이 아닌 검면이 그녀의 허벅지를 강타했다.
“아흑!”
둔탁한 고통에 허벅지가 마비된 것처럼 저려 왔다. 유화연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한쪽 발로 보법을 운용하여 거리를 벌렸다.
검을 비틀지 않았다면 한동안 다리를 못 쓰게 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 을 터 다. 차마 그럴 수는 없어 검 면으로 때리 기 는 했지 만, 이 또한 허벅 지 에 검면의 모양대로 아주 새 파란 멍 이 들 정도로 강력한 공격 이 었는데.
“저를…, 배려해주신 건가요?”
전해지는 격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도 그녀의 입은 진심으로 웃고 있 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고 폭발하게 될 폭탄이 자꾸만 다가오는 공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진짜시발….’
비 무라는 점 이 백 우진의 발목을 붙잡는다.
차라리 죽일 수 있었다면, 하고 무심코 떠올린 짧은 상념에 전신이 요동을 쳐댔다. 이 몸에 남아 있는그녀의 기억들이 격렬히 저항하는것이다.
내 마음대로 못 하나 박지 못하는 월세방에서 살아가던 지구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이래서 자기 집 아니,몸이 없으면 서러운 거다.
“계속해요, 우리.”
‘우리’라는 단어 하나가 이토록 사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이었던가.
백우진은 애써 독한 마음을 품으며 그녀를 향해 매서운 검격을 연달아 적 중시켰다.
그럴 때마다그녀의 몸에 하나둘씩 상처며 멍 자국들이 새겨졌다.
“흐윽…!
검을 맞대는그녀의 힘이 차츰 약해져 갔다.
쿠당탕!
검으로부터 전해지는 백우진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구는 유화연.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에게서 다양한 감정들이 전해졌다.
“같은절정인데 이리도차이가 나다니….”
“대체 백우진은몇 달사이에 어디까지 나아간 거지?”
“독고천 선배랑 싸워도 이 기는 건 ….”
“에이, 거기까지는좀.”
같은 절정임에도 아예 상대조차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실력을 선보 이는 백우진에 대한 찬사가 터져 나왔다.
“비무가 너무 과격한 것 같은데 • • •.”
“슬슬 말려야하지않나?”
다른 한편에선 심상치 않아 보이는 유화연의 모습을 걱정하는 이들도 더 러 존재했다.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찢어진 손아귀에서 흐르는 피를 의복 에 닦아내며 바닥에 떨어진 검을 다시 주워 들었다.
“어딜 보시는 거예요…? 당신 상대는 저예요.”
그러니 저에게만 집중해주세요.
입가에 피를 흘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백우진의 정신을 점점 지치게 했다.
.
......
짜증 섞인 시선을 그녀에게 내던지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야.”
낮고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귓전을 강타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오로지 짜증 섞 인 분노와 거부감 뿐이 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차가웠으나, 그녀는 내색하지 않으며 싱긋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없어요, 지금은.”
바라는 것이야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지금 이룰 수 있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다는 것을 알기 에 구태 여 입 밖으로 내 지 않을 뿐.
또한 스스로가 지금 무언가를 바랄 자격이 없는 상태 임을 알고 있었다. 다 만바라건대, 그저 이 시간이 조금만, 조금만 더 길었으면 하고 바란다.
‘내 가 더 오래도록 기 억할 수 있게요:
이때의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여 역경과 고난의 순간들을 웃으며 넘길 수 있도록.
공방이 이어졌다.
유화연이 공격을 주도했고, 백우진은 착잡한 표정으로 이 를 받아낸 다.
갑작스레 상승한 경지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던 신체와 검술이 이에 적 응하기 시작한 듯, 몰아치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제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취해 손에서 피가 새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검 을 휘두르던 그녀.
백우진은 수비로 일관하던 자세를 단 한 호흡에 뒤바꾸어 그녀의 검을 쳐 낸 뒤,훤히 드러난 새하얀목을 향해 가져갔다.
“이제 끝…!”
보통이라면 끝이 났어야했다. 살수가허용되지 않는 비무인 만큼진짜로 목을 벨 수는 없으니 이처럼 칼이 목에 닿으면 상대방도 패배를 인정하기 마 련인데.
“하앗!”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제 목을 뒤로 젖힘과 동 시에 그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끝났다고 생 각한 찰나가 방심을 불러 일으켰다. 가까스로 몸을 틀며 공격 을 피했지만, 그의 옷자락이 베이고 가슴에 얇은 실줄기 같은 상처가새겨졌 다.
“••••••.”
완벽하게 당했다, 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한 수였다.
그녀는 백우진이 지금까지 선보인 비무를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 가한번은 제 목에 칼을 들이밀 것이라는 걸.
다치고, 찢어지는 와중에도 그것 하나만큼은 잊지 않았고, 실제로 벌어지 는 순간에 훌륭하게 이용하여 역습을 가했다.
“아쉽다.”
가슴팍에 난 상처를 내려다보던 백우진이 별안간 던진 한마디.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 었다.
“갑자기 왜그런 표정을….”
예상치 못한 표정에 당황한 유화연.
“네 실력이 너무아쉬워.”
그 계 기는 비록 백우진을 힘들게 만들었지만, 그로 인해 피 어난 그녀의 재 능은 진짜다.
조금 과감하게 얘기하면 앞으로 그녀가 어떤 수련을 거듭하냐에 따라 명진마저도 근시일 내로 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
그렇기에 잠깐탐이 났다.
이 세 계 에서주인공이라는 운명을 지니고태 어난백우진의 몸에 기생하 게 된 이상, 앞으로 닥쳐올시련들은 점점 거세고 많아질 터.
그럴 때 가장 의 지 가 되는 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의 존재 다.
“너와동료가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주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재능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모두 털어내고 동료 정도로, 친구 정도로만 남을 수 있다고 판단됐다면 먼저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두 의 미 없는 가정 이 다. 그녀는 이 미 자신에 대한 집 착으로 말미 암아 재 능의 꽃을활짝피우게 되었으니.
딱한 번만 얘기할 테니 잘들어.”
어느새 차가운 눈빛으로 돌변한 백우진이 그녀를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네 기억 속의 백우진은 죽었어.”
그는 이미 죽었다.등신같이 여자때문에 온정신 다팔려선 아무런 준비도 없이 털레털레 가선 자기보다 경지도 낮은 산적한테 찔려 산속을 헤매다가 쓸쓸히 죽어갔다.
‘나보다 더 등신이야.’
자신 또한 이 럴 말 할 처 지 가 아니 지 만, 그놈보단 나았다. 적 어도 임무를 망각하거나 실패하지는 않았으니 .
“난 네가 알던 백우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됐고.”
전혀 다른 영혼이 몸에 들어왔음을 의미하지만, 그녀는 그저 죽을 고비를 넘 기고 새 로이 태 어 났다는 정도로 이 해할 테 지.
“그러니 난 네 가 기대하는 백우진이 될 수가 없단 뜻이 야. 그 말인즉.”
“잠깐만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낀 유화연이 그의 말을 멈추기 위해 다급히 말을 꺼 냈으나, 백 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 었다.
“네가 나를 사랑할 이유는 이미 없어졌다는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덧붙여 서로가 사랑할 자격 또한 없다. 한쪽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몸 에 들어앉은 신세고, 다른 한쪽은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꿈꾸고 있으니.
단호한 말이 그녀의 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녀의 입에서 새빨간 피가 왈칵 쏟아졌다. 이미 내상을 입은신체에 정신마저 온전치 않게 되면서 심마가찾 아오려는 것이 었다.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도 상관없어요. 난그저…!”
피를 토하면서도 그녀는 제 할 말을 끝까지 이 어나가려 했다. 허나 백우진 은 이를두고보지 않았다.
콰릉!
벼락의 자세를 운용하여 눈 깜빡할 사이에 그녀의 곁에 다다른 백우진이 처 연한 얼굴로 그녀에 게 말했다.
“이제 그만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아.”
심마에 완전히 잡아먹히게 되면 주화입마가찾아와폐인이 되거나,광인 이 되어 죽을 때까지 날뛰거나.
둘 중 어느쪽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그 전에 정신을 끊어 심마로부터 해방시켜야만했다.
자세가 완전히 흐트러진 그녀의 뒤를 잡은 백우진이 검병으로 뒷목을 강 하게 후려쳤다.
빠악!
“가,가….”
애달픈 단어를 입에 담으며 유화연은 눈을 감았다.
썩 은 나무 토막처 럼 쓰러 져 가는 그녀의 궤 적을 따라 피 와 눈물 방울이 올 을이 남아흩어졌다.
그것이 꼭 화려하게 피어난꽃에 달린 꽃잎들이 바람에 날려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