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뒤바뀐 자리
신룡 쟁 탈전은 백우진의 방어 성공으로 막을 내 렸다.
언제고 도전하기 위해 두 사람의 비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몇몇 용봉 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백우진의 실력에 안색을 굳히며 떠나갔다.
단 한 사람, 명진만이 크게 웃었다.
“흐하하핫! 역시 대단하오, 신룡!”
이 정도는 되 어야 도전 의 지를 불태울 만하다며,그는 곧장 개 인 연공실로 달려갔다.
“제법 좋은 경기였어.”
“음. 다소 일방적 이긴 했지만, 유 소저도 간간히 날카로운 반격을 보여주 었지.”
“그나저나, 유 소저 마지막 모습이 조금 이상하지 않았나?”
“조금 감정 적으로 보이 긴 했네 만 뭐 , 비무를 하다 보면 다들 그렇게 되 잖 은가.”
“그런가…?”
백우진의 빠른 대처 덕분에 단순히 비무 도중 감정이 격해졌을 거라고 짐 작할 뿐, 그녀에게 순간 심마가 찾아왔음을 눈치챈 이는 거의 없는 듯했다.
단 두 사람을 제외하면.
“호오, 그것 참 탐이 나는 계 집 이구나.”
생도들 틈바구니에 조용히 숨죽인 채 비무를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제 감상을 말했다.
전 연인이었다고는하나, 대저 무슨 사연이 있기에 상대방에게 그토록 격 정적인 감정을 내비칠 수가 있는지, 그것이 매우 흥미롭고 또 마음에 들었다.
“감정이란 참으로 신기하지.안 그런가?”
그가 묻자, 옆에 앉아 있던 사내 가 흉흉한 안광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시 답잖은 선문답은 그만두고, 내 가 해 야 할 일이 나 말하시 오.”
“떼잉, 자네는 영재미가 없어.”
생도들과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젊은 생김새와는 달리, 노인 같은 말투를 쓰는 사내.
“적당히 지켜보고 있으시게. 내가다시 이곳에 올때까지 말일세.”
어쩌 면 동료가 생 길지도 모를 일 아닌가?
사내의 말에 그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동료라.”
사람을 뜨겁 게 만드는 울림 이 있는 단어.
그 또한 동료라는 것을 꿈꾸었던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목 표는 오로지 강해 지 는 것뿐. 그를 위 해서 라면 무엇이든 할 생 각이 었다.
그것이 설령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짓일지언정.
“그럼 난 이만 가네. 이곳의 일은 자네에게 부탁험세.”
“•••조심히 가시오.”
대 연무장에 서 있던 사내는 눈 깜빡할 사이에 검은 연기 가 되 어 흩어졌다.
언제 보아도 가공할 수준의 신법을 보며 그는 주먹을 꽉 쥐 었다.
“반드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노니는 이들을 모두 꺾고, 자신을 종처럼 부리는 사내 마저도 뛰 어넘어 천하를 발아래 두고 말리라고, 그는 다짐했다.
…
몸 곳곳에서 느껴 지는 불편한 감각에 유화연은 금세 잠에서 깨어났다.
찡그린 얼굴로 게슴츠레 눈을 뜬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 려 다 뒷목에 서 느껴 지는 강렬한 통증에 고통어 린 신음을 내 뱉 었다.
“아읏…!”
둘러보지 않아도 이곳이 어디인지는추측이 가능했다. 탕약을 달일 때 나 곤 하는 약재의 냄새들이 한껏 풍기는 걸 보면 의방일 터.
그녀는 여전히 욱신거리는 뒷목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쥐 었다.
제 정신이 었는지 , 아닌지도 분간이 되 지 않는 상태로 울부짖었던 마지 막 순간. 백우진의 손길이 닿았던 마지막부위였다.
“끝났구나….”
패배하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절정에 오르기 전에 그저 막연했던 그의 경지는 절정에 다다르고 다시 보 아도 그 끝을 헤 아릴 수가 없었으니.
충격 속에 전해진 그의 말들이 하나둘씩 떠오른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할 이유가 없다는 말, 이제 그만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찾으라는 말까지 .
“후후.
그녀는 자조 섞인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미 늦었어요.”
충동적으로 학관 곳곳을 뛰 어다니 며 마침 내 백우진을 마주한 순간, 그녀 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와 동시에 자신이 했던 어리석은 짓에 대한 환멸이 더불어 떠오르면서 숨이 막혔다.
이 제 그녀 에 게 남은 행 복으로 가는 길 이 란 무슨 수를 써 서 라도 그의 마음 을 돌려놓는 것밖에 없다.
“윽…!”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유화연.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정말갈텐가?”
상주 중인 의원 이 아직 치료를 더 이 어 가야 한다고 만류했지 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작은 실랑이 끝에 시간마다 찾아와 치료를 받기로 약속한 뒤 의방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아
달이 휘 영청 떠오른 밤하늘을 바라보는 유화연의 동공이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파혼을 입에 담았을때,백우진이 말했던 자신과남궁수가 만났던 날또한 이처럼 맑고 깨끗한 하늘 위로 보름달이 떠올라 세상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 다.
그때의 그는 자신을 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을 따라 움직인다. 관자놀이를 마구 찌 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도착한곳은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있었던 학관 외곽의 정자였다.
“아, 으….
이곳은 본디 그녀가 힘든 일이 있거나, 혼자 조용히 사색에 잠기고 싶을 때 마다 찾는 곳이었다. 그것이 어쩌다 남궁수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 었고,그때의 일 이후로 이곳은고통어린 기억만이 가득한곳이 되어 발길을 끊은 곳이 기도 했다.
“빨리 …, 빨리 벗어나야…!”
두통의 강도는 점점 거세졌다. 더 이상떠올리고싶지 않았던 기억들이 자 꾸만 생 각이 나 혼란을 가중시 켰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정자를 벗어나려 할 때, 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는 두 쌍의 발걸음을 보았다.
“아……?”
여유로운 걸음으로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흐드러지게 핀 꽃을 바라보 다가 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걷는 남녀.
청색과 백색이 조화로이 섞인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미소 짓는 이는 백우 진이 었다. 그리고 연자색 궁장 차림 에 드러난 어 깨 위 로 속이 살짝 비 치는 저 고리를 입고 앞머리를 길게 드리운 이는 제갈연지 였다.
“우욱!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는 순간, 욕지 기가 솟았다.
유화연은 입을 꾹 닫은 채 그들이 볼 수 없도록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 뒤 에 숨어 입에 가득 차오른 것을 뱉어냈다.
그것은 검붉은 피 였다.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나무를 붙잡고 선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고 고개만 살짝 내밀어 정자를 향해 걸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와아…, 학관에 이런 곳이 있는줄은 몰랐어요….”
찬란한 달빛 아래 펼쳐진 연못과 그 위에 피어난 꽃.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 에 눈처럼 휘날리는꽃잎들까지.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 방에 걸어두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경치와 분위 기 에 제갈연지는 눈을 빛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연못을 내다보고 있는 백우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아….”
이토록 압도적인 경치 속에서도그는 빛났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이 그에 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곳은 학관 내 에서 물을 내 다보며 마음을 안정시 킬 수 있는 곳이 었다. 비 록 이 몸에 안 좋은 기 억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자신과는 전혀 관계 없 는 기 억이 었기에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며 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던 백우진은 옆에서 느껴지는 노골적인 시선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제갈연지 가 넋을 놓은 표정으로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에猌 아, 아니, 그, 아, 아무것도 아니에욧!”
금세 얼굴이 빨개져선 고개를 돌리는 제갈연지.
백우진은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궁금한 것이 생겨 그녀 의 양 어깨를 붙잡고 자신과 마주볼 수 있게끔 몸을 돌렸다.
“나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
“뭐,뭐, 뭔데요?”
“제 갈 소저는 나를 언제 처음으로 봤어 ? 그러니 까…, 그냥 얼굴만 본 날이 아니라 기억에 또렷하게 남긴 날 같은 거 말이야.”
“그,그건….”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달아올랐던 얼굴이 이제는 능금처럼 붉게 변했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소음과 사람으로 가득한 낮보다, 고요하고 어둠이 짙 게 내려앉아 어딘가로 숨어들기 좋은 밤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따금 남들 몰래 밖으로 나와 밤 산책을 즐기곤 했다.
그를 처음으로 뇌리에 각인시킨 것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 산책을 하 고 있을때였다.
밤만 되 면 알 수 없는 일말의 용기 가 생 겨 항상 가던 길 대신 평소 타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을 듯한 곳에 무언가 있을까 싶어 돌아다니는 걸 즐겼던 그 녀는 그때도 아직 가보지 못한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을 때였다.
“그, 그때 처음 봤어요…. 달빛 아래에서 열심히 수련하고 있는 백 공자를 요….”
백 우진이 라는 이름 석 자는 예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반푼이, 속 빈 강정, 면룡 등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영 쓸모가 없다며 무 시당하기 일쑤였던 그는 분한 얼굴을 한 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느꼈어요…. 아, 저 사람은 나랑은 다르게 온갖 무 시에 맞서싸우고 있구나,하고….”
비슷한 처지 이기는 했으나, 그와 자신은 확연히 다르다는 걸 그녀는 그때 깨달았다.
자신은 남들의 손가락질에 순응했고, 그는 끝까지 맞서 싸우기 위해 노 력하고 있었음을.
똑같은 처지에도 꺾이지 않는 그의 모습이 눈에 처음으로 각인된 날이었 다.
“그래서 그때부터 따라다닌 거야?”
“네에…, 헤엑?!”
무심 결에 대 답하며 고개 를 끄덕 이 고 있던 제 갈연지 가 화들짝 놀란 표정 을지었다.
“어,어떻게…!”
“뭐 …, 그때는 몰랐지. 그런데 제 갈 소저랑 같이 있다 보면 날 아주 오랫동 안본 사람처럼 얘기할때가있었거든.”
“아, 그, 그게에….”
당황한 그녀 가 손가락을 꼼지 락거 리 며 머 릿속에 서 이 말, 저 말들을 떠 올리고 있을 때였다.
“그럼 우리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날은?”
또다른 질문이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대답하기가무척 쉬웠다.
“의뢰소에서 만났을 때요…! 그때 백 공자가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었어 요….”
그날은 그녀에게 몇 안 되는 행복한 기 억 중 단연 첫 번째로 손꼽히는 날이 었다.
언제나서성이기만할뿐, 말을걸 엄두조차도내지 못하던 자신에게 꿈에 그리 던 사내 가 먼저 다가와준 순간이 었으니.
“그랬구나.”
백우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조금은 불안했다. 그녀 또한 자신이 아닌 ‘백우진’을 먼저 보았던 만큼, 앞 으로의 자신에게 실망하면 어쩌나하고.
“실제로대화하고, 같이 지낸 나’는… 어땠어?”
“어…, 멀리서 지켜보던 것과는조금…, 달랐어요.”
‘다르다’, 라는 말한마디에 백우진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옆에서 지켜본 백 공자는…, 더 강하고, 멋있었어요. 가끔 알수 없는 행동도하고, 술도 많이 마시지만…, 따뜻하고, 착하고,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느꼈어요. 그래서….”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는그녀의 입술에 백우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그 의 눈동자에는 언뜻 간절함 같은 것도 섞여 있었다.
“더,더…, 조, 좋아졌어욧!”
눈을 질끈 감았다가 부릅뜨며 고백 에 가까운 말을 내뱉 었다.
이를들은백우진의 상체가 기울었다.
폭
넓은 소맷 자락이 부딪치 는 소리와 함께 백우진이 쓰러 지듯 기 울어 지 며 제 갈연지의 몸을 끌어안았다.
“꺄읏…!”
놀람과 기쁨이 정확하게 반반 섞인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배,백공자…?”
그녀는 느꼈다. 자신의 등에 닿은그의 팔이며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 을.
제갈연지의 좌측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백우진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조금만이러고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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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온전히 나로서 인정 받았다는 생각이 들자, 고된 하루에 쌓인 정신 적 피로가 단숨에 녹아내 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 갈연지는 용기를 내 어 떨리는 두 팔을 뻗 어 백우진을 감싸안았다.
평소보다 빠르게 숨을 쉬는지, 등이 빠르게 올라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 하는 중이었다.
“네에….”
그러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빠르게 오르내리는 그의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