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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81화 (81/215)

<81화 >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

어두컴컴한 방안.

탁자 위에 켜둔 촛불이 유일한 광원인 곳에서 당선영은 쌉싸름한 찻물을 들이켰다.

그녀의 앞에는 흑의무복을 입은 사내가 고개를 가볍게 숙인 채 서 있었다.

“가주님께서 우려를 표하셨습니 다.”

“뭐 ?”

“2학년 신룡의 과제를 함께 하셨잖습니까.”

표정 만큼이 나 무뚝뚝한 음성 에 당선 영 의 고운 아미 가 찌 푸려 졌다.

백우진의 조별 과제를 돕기 위해 나갔다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기어코 제 아비인 가주에게도 전해졌나 보다.

“말 그대로 도움을 주었을 뿐이 야. 무슨 문제 라도?”

그녀가 태연한 표정으로 머금고 있던 찻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자 사내 는 단도직 입적으로 물었다.

“가주님께선 혹 그에게 호감을 품은 건 아닌지 걱정하고 계십니다.”

“••••••.”

반쯤 비워낸 찻잔을 내려놓는 당선영.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뻥 뚫린 하늘과 그에 걸린 달과 별들이 보인다.

새 장 속의 새 . 자신을 지 칭하기 에 이보다 좋은 말은 없으리 라.

드넓은하늘이 여실히 드러나 있음에도,눈에 보이지 않는 창살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호감이라….”

차라리 호감 정도였으면 나았을지도.

낡고 허름한 집에서 그와 나눈 진한 입맞춤이 진득한 아교처럼 뇌에 달라 붙었는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을 붕 뜨게 만들 정도의 짜릿함과 동시에 구슬픈 감정을 자아 냈다.

‘멈췄어야했어.’

호기심이 호감이 되기 전에,호감이 애정이 되기 전에 멈추었다면.

‘지금보다 덜아팠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만에 하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녀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확신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내였다. 자신감 있는 말투,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뻔 뻔함, 자신의 미약 섞인 체취를 코앞에서 맡고도 끄떡도 않는 강철보다 더 단단한 자제력, 수려한 외모 등.

하나하나 나열하면 끝도 없을 만큼, 그는 여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두루 갖 추었다.

심지어 미래가보장된 신룡이라는 별호까지 얻었으니 모든 가문에서 쌍수 를 들고 환영할 만한 남편감임 에 틀림 없으나, 애 석하게도 당가는 평범 함과 는 거리가 먼 가문이었다.

가주의 우려라는 건,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아마 이를 어긴다면 자신은 생애 처음으로 가문을 벗어나 당도한 학관에서도 퇴관 절

차를 밟게 되리라.

“호감 같은 거 아니니까 마음 놓으시라고 전해드려.”

그래.

호감은 아니다.

이 미 호감이 라고 할 만한 수준은 넘 어섰으니.

“•••알겠습니다.”

사내는 가볍게 목례를 한뒤, 제 모습을 감추었다.

그의 기척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느낀 당선영은 크게 한숨을 내쉬 었다.

“갑갑해.”

조금 전의 사내 가 바로 그 갑갑함의 원 인이 다.

어릴 적부터 당가의 구중심처에서 바깥 세상을 동경해온 그녀는 제 아비 인 가주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단한 번이라도좋으니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 고.

그렇게 조르고졸라 얻어낸 것이 이곳, 정무학관이다.

|  |.....

!..

!

........

물론 그냥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졸업 후에는 가주의 명령에 따라 군말 없 이 따라야 한다는 점과 더불어 학관 내에서 수발을 명목으로 일거수일투족 을 감시 할 호위 를 데 리고 입 관하는 게 조건 이 었다.

조금 전 무뚝뚝한 사내 가 바로 호위 를 가장한 감시 역 이 다. 그는 지 난 삼 년의 시간동안 가주의 충실한눈과귀가 되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했다. 그러다특이사항이 생기는 날이면 어김없이 가주에게 직통으로 전서 구를 날려 이를 낱낱이 보고했다.

“돌아가는것만은안 돼….”

이곳 또한 이래저래 숨 막히는 건 마찬가지지 만, 가문에 있던 시절과는 달 리 이곳에서는 자유를 만끽할 만한 기회를 노려볼 수라도 있었다.

그때가 바로 감시 역인 사내에게 일정을 속이고 백우진과 함께 과제를 나 섰던 순간이었다.

“후후.

오로지 운기조식과 신법을 번갈아 운용하는 강행군에 낡고 허름한 집에 서 잠을 청하고 산속을 헤매는 나날이었지만, 그때는 분명 온전한 자유를 맛볼 수 있었다.

그와의 입맞춤 또한 그를 따돌렸기 에 새 길 수 있었던 추억이 었다.

그때를 회상하며 행복에 젖어 있던 그녀는 별안간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 다.

“너무하네, 백우진.”

백우진이 괘씸해졌다. 아무리 자신이 최근에 차갑게 굴었다고 해도 진한 입 맞춤까지 한 사이 가 아닌 가.

호감이 가는 상대가눈에 보이지 않으면 한번쯤 찾아오기 마련인데,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아하하…!”

그녀는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어차피 찾아와도 만나주지도 않을 셈이면서 그가 자신을 찾아와 문전박 대 당하는 모습을 기대하기라도 했던 걸까.

“바보 같아.”

그를 생각하면 냉철한 이성이 일부분 마비가 되고 감정이 그 빈자리를 메 꾼다.

지나고 나면 왜 그랬지, 자책하면서도 막상그 순간을 되돌리거나 지우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 또한 백우진이라는 사내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 중 하나인 걸까.

“정말큰일이네….”

들불처럼 단숨에 치솟은 감정이다.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리라 생각했건만.

그때 이후로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처음과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이 불 쑥불쑥 떠오른다.

“지금뭐하고 있을까….”

“뭐하긴.”

별안간 들려오는 낯익은 음성에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으로 물든 그녀의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에 ?”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당소저보러 왔지.”

검보라색 상처를 입은 채 진득한 미소를 짓고 있는 호랑이가 솟구치듯 나 타났다.

:k * *

넓은 객실을 잡아둔 게 다행이었다.

네 사람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떨어진 곳에 앉아운기조식에 한창열을 올리는중이었다.

“끄윽.

그와중에 술잔을기울이며 식탁위에 거하게 차려진음식들을대부분비 워낸 백우진은 만족스럽다는듯, 배를 통통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오래 걸리네.”

술 한 잔에 담긴 내공을 대충 계산해보면 斑년 정도가 나온다. 절대로 적은 양은 아니지만, 영단이나 영초에 비하면 적은편이라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 라 보았는데 아니 었나 보다.

“그래도 뭐…, 다들 문제는 없어 보이고.”

얼굴이 편안해진 것으로 보아선 술로 인해 추가된 기운들을 모두 추슬러 갈무리하고, 마지막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것으로 보였다.

고작 斑년이 더해졌을 뿐인데 네 사람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세가 한층 깊어졌다. 태백호와 같은 마물은 무리겠지 만, 웬만한 마물과 상대할 때는 충 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으리라.

“운 좋은 녀석들.”

본디 내공이란무인에게 있어 몸에 흐르는 피와 다름없다.그렇기에 영단 이나 영초가 생기면 부모와도 나눠 먹지 않는데 한낱 조원들에게 이를 나눠 주는 자신은 대체 얼마나 자애로운 조장이란 말인가.

자화자찬을 하며 객실을 나선 그는 바쁘게 돌아다니는 점소이를 붙잡아 세웠다.

“반시진쯤 후에 음식을 새로 해서 객실에 올리도록해.그 외에 내 조원들 이 먹고 싶다는 거 있으면 뭐든 내주도록 하고.”

“예,대협! 제가알아서 잘모시도록하겠습니다요!”

오랫동안운기조식을 하고 나면 배가고파지는 법이다. 그들이 이후에 먹 을 음식까지 모두 준비시켜둔 뒤, 그가 향한곳은 당선영이 머무르고 있는 기 숙사였다.

각각의 기숙사에는 이성의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이를 어길 시 어마어마한 벌점이 부과되 어 정말 간 큰 인간이 아니고선 이성을 만나기 위 해 기숙사에 침입하는 미친 짓을 벌이는 이는 없다.

한 떠벌이가 읊은 학관의 역사에 의하면 마지 막으로 이성의 기숙사에 침 입했다가 걸린 생도가 오 년 전이라던가.

“실제로오 년 전이 마지막은 아니겠지만.”

들키지 않으면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지난오 년간 잠잠했던 것은 그간 여자 기숙사를 침입한 대담한 생도들이 모두 들키지 않았기 때문일 터다.

여 자 기숙사에 다다른 백 우진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그리며 건물을 올려 다 봤다.

“나도은신술은제법 일가견이 있다, 이거야.”

판타지 세계에서의 용사백우진은 다재다능했다. 아니, 그를 가르친 두 검 귀가 다재 다능했다. 마법을 제외한 온갖 잡기에 능한 두 노인네는 먼 훗날 용담호혈의 성에 갇힌 공주를 구할 일이 생길지 모를 일이라며 은신술에, 자 물쇠 따는 법까지 알려주었다.

덕분에 보안이 철통 같은 마왕성에서도 은신술 하나만으로 한 개의 층을 통과한 전적이 있는 그다.

고작해야사감이 한두 번씩 지나다니는 기숙사쯤이야, 누워서 식은죽 먹 기다.

“자아, 슬슬….”

은신술을 위해주변의 기운과제 기운을 동화시키고 있을 즈음이었다.

여 자 기 숙사에 서 별 안간 검은 그림 자가 허 공으로 솟구치 더 니 빠른 속도 로사라져갔다.

“이거봐라?”

심지어 그 출발지가 자신의 목적지인 당선영의 기숙사 창문이었다.

“오호라.”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당선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당가의 호위. 가문으로부터 멀리 떨 어져 있는그녀의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드는 가주의 충실한종.

“너 잘만났다.”

백우진은 곧장 녀석의 뒤를 밟았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인영(人影)이 건물 지붕을 사뿐사뿐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백우진은 기왓장 하나를 집 어 녀석을 향해 냅다 던져버렸다.

지옥에서도 데려온다는 좌완 투수의 강속구가 뿜어져 나왔다.

쐐애액, 하는소리와함께 지척에 다다른 기왓장이 사내의 주먹에 산산이 부서졌다.

퍼억

한건물의 지붕위에 멈춰 선 사내는 이윽고지붕위에 안착하는 백우진을 보았다.

“백우진.”

묘한살기가 어린 음성.

백우진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건물 지붕밟으면 교칙 위반인데.”

“••••••.”

허를 찔린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백우진의 말이 이어졌다.

“당선영의 호위 당제우, 맞지?”

당제우. 그림자가 되 기를 자처한 이후로 거의 불리지 않아 반쯤 잊고 있었 던 이름이 거론되자,무심한그의 눈빛에서 흉흉한기세가흘러나오기 시작 했다.

“내게 볼일이라도 있나.”

백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 난 지금 당소저 보러 가는 길이 었는데.”

대낮에도 허락되지 않는 금지(禁地)를 야밤에 가겠다는 것은 그의도가 뻔히 읽히는 행동이었다.

“불허한다.”

그가 즉답하자, 백우진은 콧방귀를 뀌 었다.

“내가네 말을들어야할이유는없지 않을까?”

상당히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투였다. 당제우는곧장허리 뒤쪽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손에 쥐 었다.

“그렇다면 말을 듣게 하면 되겠군.”

“할 수 있을까? 나, 신룡인데 猌 엄청 강한데 ?”

백우진이 거들먹거리며 말하자, 당제우는 차가운 미소를 내비쳤다.

“그런 허울따위에는관심 없다.”

그는 용봉 비 무제 에 참여 조차 하지 않았다. 그림 자로 살아가기 로 맹 세 한 몸에 용과 같은 거창한 별호는 오히려 독이었기에.

허나 제 실력에 대한 자신감만은 충만했다. 실력만이 전부인 당가에서 중 요 인물인 당선영의 호위를 맡았음은 그 실력을 인정 받았다는 뜻이 기도 했 다. 생도들 사이 에 서 천외 천이 라 불리는 독고천을 제외 하면 그 누구에 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 좋네.”

백우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넌지시 말을 꺼 냈다.

“그냥 붙는 것도 재미 없는데,나랑 내기 하나 해보는 거 어때?”

“•••무슨 내기 말이냐.”

“간단해. 이긴 사람이 원하는 거 들어주는 거지.”

“내게 원하는게 있나보군.”

“응.”

더 이상의 연기는의미 없어졌다. 이미 분위기는조성되었고, 제 실력에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당제우 또한 여기서 내뺄 것 같지는 않으니.

“내 가이기면 너, 딱 석달만 눈 닫고, 귀 막고 있어라.”

당제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과 귀를 언급하는 것은 곧 가주에 게 당선 영 에 대 한 보고를 올리는 것을 멈추라는 의 미 였다.

조금 전호감이 아니라했던 당선영과는 달리, 눈앞의 백우진은그녀에게 명백한 호감을 지 니고 있는 모양이 다.

■불쌍한 녀석이었군.,

그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줄도 모르고 날뛰는 모습이 조금은 안쓰러웠다.

“여기서 내빼는 건아니지?”

값싼 도발에 다시 한번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의미가 없는 싸움이다.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그녀가 알아서 처리할 녀석이니.

허나.

“좋다. 내기에 응하마. 내가 이기면 넌 팔 한짝을 내놓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기에 응했다.

‘이토록 거슬리는 놈은 처음이다.’

그림자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이후, 죽은 것이나 다름없던 제 감정을 이 토록 날뛰게 만드는 녀석은 눈앞의 백우진이 처음이었다.

“싸네.”

신체 일부를 내놓으라는 흉흉한 조건에도, 백우진은 흔쾌히 수락하며 검 을 뽑았다.

“미 인을 얻으려면 그 정도쯤이 야.”

고고한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던 당제우의 기세가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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