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I그□은 도둑놈이다
백우진의 기행에 놀란 것은 비단 당선영뿐만이 아니었다.
당가의 출입문을 굳건히 지키고서 있던 당가의 무사들도 아연실색한표 정이되었다.
출입문 경비를 서는 것은 당가에 속한 하급 무사들에게 주어지는 과업이 다.
그들은 지 난 몇 년 동안 당가 소속으로 지 내오면서 숱하게 많은 시 간을 이 곳에서 보냈지만, 지금과 같은 경우는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들은 이내 분노했다.
이곳이 대체 어떤 곳인가.
구파일방과 함께 정파 무림을 이끌어 가는 오대세가 중 일좌인 사천당가 의대문 앞이다.
흉악한 마두들도 숨소리 조차 내 지 않고 조용히 지 나가는 곳에 서 이토록 소리를 드높일 수 있는 이가 있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목에 칼을 들이밀고 일에 대한추궁을 해야했으나, 옆에 있는 존재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가씨, 대체 이 자는 누구입니까?”
가주의 금지옥엽 인 당선영 이 무뢰 한과 함께 왔기 때문이 었다.
그녀는 머리가 아프기라도 한 건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었 다.
‘일을 벌일 거라곤 생각했지만….’
적어도 대문까지는 평범하게 통과하고 나서 일을 벌이리라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자신이 그를 너무나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여전히 분개한표정으로 백우진을 노려보고 있 는 경비 무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손님이야•…
그녀의 말에 경비 무사들의 표정이 더욱 기이하게 변했다.
“아니, 아가씨 손님이 왜그런…?”
잠시 멈춰서 신원만증명하고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굳이 자신들을 무시 하고고래고래 소리를 칠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는왜 그랬을까.
의문이 깊어지는 사이, 당선영이 말을 이었다.
“소란을 피워서 미 안하지 만, 일단은 그냥 넘어가….”
“이 게 웬 소란이냐!”
어떻게든 좋게 넘기기 위해 그들을 어르고 달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대문을 박차고 나섰다.
나선 이는 덥수룩한수염을 턱에 붙이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사내 였다.
“배,백일조장님!”
당가는 하급 무사들과 방계 중에서도 가장 위계가 떨어지는 이들이 생활 하는 외 당과 당가의 직 계와 위 계 가 높은 방계 혈족이 생활하는 내 당으로 나뉜다.
외 당과 내 당에 는 각각의 지 역을 호위 하는 무사대 가 있는데,백 사대와 흑 사대 가 바로 그것이 다.
불같이 화를 내 며 나타난 이는 외 당을 호위 하는 백 사대 중에 서도 일조의 조장을 맡고 있는 당호근이 란 사내 였다.
백우진이 소리를 내지르던 순간 우연히 대문 근처를 지나고 있던 그가 감 히 당가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는 미친놈과 이를 막지 못한무사들을 동시에 혼내주기 위해 나선 것이다.
“대체 어떤 정신 나간놈이 당가 앞에서 목청을 높인단 말이야!”
한껏 치솟은 눈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무사들 앞에 있는 남녀를 바라 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패배감이 들게 만드는 수려한 외모의 청년, 그리고 그 옆 에 있는 여인.
“아, 아가씨?”
머릿속이 요란스럽게 꼬이기 시작했다.
상황으로 봐선 저 사내놈이 당가에 소리친 범인이 맞는듯한데, 학관에 있 어야할당선영은대체 왜 여기에,그것도사내놈의 옆에 있는 것일까.
당호근의 시선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두 무사에게로 향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그,그것이….”
그들 또한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안 가기는 마찬가지 였으나, 자신이 겪은 상황을 그대로 설명해주었다.
“허허, 이 무슨….”
모든 설명을 전해 들은 당호근 또한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지었다.
웃긴 상황이다. 정작 사고를 저지른 이는 어찌나 평온한지 웃는 얼굴을 하 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는 이들이 더욱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으니.
“이보시오, 대체 왜 소리를 지른 것이오? 아가씨의 손님이라면 그저 신원 만 밝히면 통과가되었을 터인데.”
제 머리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여긴 그가 백우진에게 물었다.
그러 자 그가 한 대 답이 가관이 었다.
“난 손님 자격으로 오지 않았으니까.”
“그건 또 무슨….”
당선영이 직접 나서서 손님이라칭했는데 당사자는 손님이 아니라니. 이 무슨 해괴 한 상황이 란 말인가.
“예로부터 사위는 도둑놈이 라 하였소. 부모가 금이 야 옥이야 어여삐 여기 며 키워둔 딸을 홀라당 채가니 그렇게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처지 아니겠소.”
스스로 말하고 스스로 고개 를 끄덕 이 는 백 우진.
그가 자신감이 과하게 섞인 커다란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당가의 가주님으로부터 당소저를 채가기 위해 왔소.”
“너,너…!?”
“뭐,뭐요?”
당선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두 무사와 당호근은 어디서 이런 미친 놈이 나타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그러니 난손님이 아니라도둑놈이오!”
그의 목소리가다시 한번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당호근의 머릿속에 백우진이라는 인간은 하나의 단어로 정리되었다.
미친놈.
“아가씨…, 대체 저 사내는 누굽니까?”
이쯤 되니 사내의 이름이 궁금해진 그가 물었다. 두 손을 빨개진 얼굴을 덮 고 있던 그녀 가 기 어들어 가는 목소리 로 대 답했다.
“옥면신룡…,이에요.”
당호근의 표정이 더욱 이상해졌다. 옥면신룡이라면 듣기로 아주 수려한 외모와 그보다 출중한 실력으로 기재로 손꼽히는 명진을 꺾은 용봉 비무제 의 우승자인데.
“저, 저 사내가그옥면신룡이란 말입니까?”
“네….”
고작 약관의 나이에 절정에 오른 명진과 백우진을 보며 정파 무림의 미래 가 아주 밝고 찬란하다며 들떠 있던 호사가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큰일이구나.’
그는 정파 무림의 미래가 어둡게만 느껴졌다.
…
대문 앞에서 벌어진 소란은 이내 일파만파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소문이 퍼 지는 데 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백 우진의 우렁찬 외 침 이 었다.
손님 이 아니 라 도둑놈이 라는 그 외 침은 외 당에 있는 대 다수의 이 들이 들 었을 정도로 크고 우렁찼다.
스스로를 끊임 없이 도둑이 라 칭하지 만 당선 영과 함께 찾아온 이 상 당가 는 그를 손님 으로 맞이 할 수밖에 없었다.
소란의 주인공이 당가 안으로 들어서고, 문앞을 지 키고 서 있던 무사 중 하 나에 의해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가주님.”
“무슨 일인가.”
사천당가의 내당 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가주전에도 그들의 소문이 닿았다.
권태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탁상 앞에 앉아 턱을 괴고 있던 당가의 가주, 당연신에게 총관이 다가와 그의 귀에다 대고 이야기를 속삭였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선영이를 말하는 겐가?”
“그렇습니다.”
짙게 찌든 얼굴 사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분명 마지막보고 때 학관에 있다는 얘기를들었거늘.”
“아무래도 보고 체 계 에 문제 가 생 긴 듯합니 다. 한 달 전 마지 막 보고를 끝 으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고 있습니 다.”
보고란 것이 매 일 오는 것은 아니 었다. 다만, 그녀 가 학관을 나서 거나 주변 에 특이한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그에 대해 상세한 내용을 적어 보고가 전해 진다.
당선영이 가문에 당도할 때까지 몰랐다는 것은 꼬박꼬박 보고를 올리던 당제 우에 게 보고를 할 수 없을 만한 문제 가 생 겼다고 밖에 는 볼 수 없었다.
“어쨌거나 가문에 온 것이니 별 문제는 없지 않나.”
감시역을 붙인 건 혹여 그녀가 어딘가로 사라지 거나 도망칠 때를 대비하 기 위 함이 었다. 보고를 받지 못한 것은 뼈 아픈 일이 지 만, 그 목적 지 가 가문이 라면 크게 걱정할 일도 없을 터.
“그것이…, 아가씨께서 혼자오신 게 아니랍니다.”
“자기 조원이라도줄줄이 이끌고온 겐가?”
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웬 사내와 함께 왔다고….”
“사내…?”
축 늘어져 있던 그의 눈썹 이 살짝 치솟았다.
“예. 작년 용봉 비무제에서 우승하여 옥면신룡이라는 별호를 얻은 백우진 과 함께 도착했다고 합니 다.”
“백우진이라….”
당제우의 보고에도 한번 거론된 적 있었던 녀석이다.
당선영이 아무런 대가도 없이 녀석의 조별 과제에 따라나서 도움을 주었 다는 보고를 받고서 다시는 사내를 돕는 일 따위는 하지 말라고 우회 적 인 표 현을 담아 회신한 것으로 기 억하는데.
“그랬는데…, 그 녀석과 가문에 돌아왔다?”
말끝을 올리는 것은 당연신의 기분이 언짢을 때 나타나는 습관 중 하나였 다.
이를 눈치챈 총관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보, 보고드릴 내용이 조금 더 있습니다….”
이후에 더욱 충격적인 내용을 그에게 읊어야 하기에.
“대문에서 옥면신룡과 잠시 소란이 있었습니다. 헌데 그 이유가….”
총관은 외 당으로부터 올라온 보고서의 내용을 토씨 하나 빠트리 지 않고 그대로 당연신에게 전해주었다.
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의 짙은 검미가 완전히 치솟았다.
“허허.”
허한 웃음소리 가 넓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총관의 안색 이 더욱 파리해졌 다. 그 또한 그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을 때 나타나는 전조 현상 중 하나였다.
“도둑놈이라….”
감히 당가의 대문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제 딸을 데려가겠단 말 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단 말인가.
“간 하나만은 정말 큰 놈인가 보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가문에 도둑놈이 들었는데 얼굴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는가.
총관이 앞서고 당연신이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안내 한 곳은 내 당에 손님을 맞이 하기 위 해 꾸며 놓은 객 당이 었다. 하 는 행실만 놓고 보면 외 당에 두어 야 마땅하나 가주의 딸의 손님 인 만큼 하는
수 없이 내당에 들여놓은 것이다.
지척에 다다르자 장지문 너머로 남녀의 희 미한 대화가 들려왔다. 기막을 펼쳐둔 탓인지 제대로 들려오지는 않았으나, 대체적으로 여인이 혼을 내고 사내 는 미 안하다며 싹싹 빌고 있는 모양새로 느껴 졌다.
“문열게.”
“예.”
총관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가볍게 기침 소리를 낸 뒤, 문을 열어 젖혔 다.
드러난 내부에는 백우진과 당선영 이 마주보고 앉아 찻물을 들이 켜고 있 었다.
“아, 아버님….”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화들짝 놀란 당선영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고 개를 숙였다.
백우진 또한 자리 에 서 일어 났다. 그녀와는 달리 매우 느긋한 움직 임으로 몸을 일으킨 뒤, 당연신을 향해 포권을취하며 고개를숙였다.
“장인어른을 뵙습니다!”
당연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
!...
..
아무래도 집에 도둑놈이 아니라 미친개 한 마리를 들여놓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