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화〉내기
자신을 향해 깍듯이 인사하는 백우진을 바라보는 당연신의 눈빛은 차갑 고, 무기질했다.
마치 발에 채이고 채이는돌멩이를보는듯한 감각이 전해져왔다.
장인어른이라는 과감한 단어를 선택했음에도 들을 가치가 없다는 듯, 고 개를 돌려 당선영을 바라보았다.
“네가 예까지 어인 일이냐.”
음의 고저조차느껴지지 않는말투에 당선영의 몸이 흠칫 떨렸다.
“백우진 공자와조별 과제를 나왔어요….”
쥐 어 짜낸 듯한 대답 속에서 떨림 이 느껴 졌다.
아비에게 대답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워야할일인가. 백우진으로선 이해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네 호위는 어디 가고 혼자왔느냐.”
옅은 노기 가 느껴 졌다. 아무런 보고조차 않은 당제 우에 게 화가 나 있는 것 이 느껴졌다.
“당호위가 비무 중에 크게 다쳤어요. 의원이 말하길, 석 달 정도는 요양하 며 휴식을 취해야한다고….”
“허허.”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비 무라…
그를 생도로서 학관에 밀어 넣기는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당선영의 호 위에 더욱 집중하라는 의 미였다.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고작 비무에서 석 달이나 운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를 입었다는 건 곧이곧대 로 믿기 힘들었다.
‘무언가 있군.’
그가그렇게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숨어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저놈인가?’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 에는 백우진이 있을 거 라는 것도 말이 다.
지금까지 사고 한번 치 지 않던 아이 가 갑자기 변하게 되는 것은 보통 외부 적인 요인이 끼어들 때가 많다.
‘저놈이 귀에 헛바람을 불어넣은 게야.’
얼굴로 꾀 어 냈는지 , 아니 면 다른 무언 가인지 는 몰라도 백우진 이 잠자코 있던 그녀를 꾀어냄으로써 이러한 일이 벌어졌음은 틀림없었다.
“그래.과제 때문에 근처까지 왔다가 잠시 들른 게냐?”
“그것이….”
당선영의 인생에서 당연신은 아비임과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딸이 아니라쓰임새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녀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말하면 그 쓰임새로 부터 벗어나겠단 말과 일맥상통한다.
살면서 단한번도 애정어린 눈빛을보여준 적 없던 아비가과연 제 말을듣 고 어떤 표정을 짓고, 또 어떤 행동을 할지 그녀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욱 무서웠다. 인간의 공포심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미지로부 터오는것이기에.
하지만…!’
인생에는 전환점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순간을 어떻게 맞이하냐에 따라보잘것없는 인생이 단숨에 가치 있게 뒤바뀌고, 부유했던 삶이 한순간에 몰락을 맞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는 지금 순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전환점임을 느꼈다. 여기서 어떤 말을,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지금처럼 새장속의 새로 살지, 아 니면 온전한 자유를 얻어 백우진의 곁에 평생 머무를지가 결정된다.
| |.....
!..
......
그러니 지금은 없던 용기도 만들어 내 야 하는 순간이 다. 그렇다면 너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며 아비의 손에 한 줌 독수가 되 어 흘러내 리는 결말을 맞이 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을 해 야만 했다.
“잠시들른게…, 아니에요.”
사정없이 흔들리는 음성이 첫걸음을 떼었다.
“그럼 무엇이냐.”
당선영이 그를무서워하게 된 데에는저 말투의 공이 가장컸다.
제 딸에게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듯, 툭툭 내뱉어지는 말 한마디가 몇 번 이고 자신이 태어난 의 미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안겨주었 다.
누구에 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래 서 저항하기 를 꺼 렸다. 혹 쓰 임새마저 없어지면, 가문에서 버려지게 되면 더 이상남아 있는 게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래서 자유를 꿈꾸면서도 도망칠 궁리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 녀는 달랐다.
“애초부터 이곳을 목적지로 정해서 왔어요. 과제는 이를 위한 핑계였고요. ”
지금 자신의 곁에는 백우진이 있다. 자신을 위해 이곳 당가까지 함께 와준 소중한이가,한없이 믿음직하게 자신을지키고서 있다.
“여기가목적지였다라….”
소름끼치는 두 눈동자가 그녀를 또렷하게 응시했다.
“옆에 있는저 사내가말한 것처럼 정말혼인이라도 허락받기 위해 오기라 도 했느냐.”
어디 말할 테면 말해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드는 당연신의 모습에 미약한 공포가 다시 점화되는 듯했으나 그녀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당장은 아니지만, 그와 혼인을 전제로 만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 해서 온건 맞아요.”
그의 눈썹 이 치솟았다. 얼굴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했으 나, 평소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안다.
당연신은 지금, 진심으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혼인이라.”
주변의 흐름이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인이란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서 한 걸음 멀어진 존재들이다. 맨손으로 바위를 부수고, 검으로 강철을 갈라내는 이들이 여타의 인간과 다 를 바 없다고 말하는 것도 우습잖은가.
경지에 오를수록 이러한 간극은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인들이 그 토록 바라는 꿈의 경지인 화경에 다다랐을 때.
그때는 인간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하곤 한다. 그만큼 할수 있 는 것들이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는 시 기 이 기 에.
당연신은 무림에서 몇 없다는 화경에 이른 고수 중의 고수였다. 화경의 극 에 달한 삼존의 자리에까진 미치지 못하나, 그들 바로 밑이라 전해지는 팔왕 (八王)의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이가 바로 그다.
그런 화경의 고수가 자신의 언짢음을 기세로써 표현하기 시작했다.
“흐읏…!
실체 없는 강요가 뒤따랐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이 기운은 그녀에게 답 을 강요하기 위함이 었다.
“밖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구나. 역시 널 학관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는 말하고 있다. 자신을 언제든 다시 이곳 어딘가에 가두어 놓고 빛 한 줄기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음을.
그러니, 어서 했던 말을 정정하라고.
“딸을 사랑하는 건 참 좋은데 말입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기운과 기운 사이에 난데없이 백우진이 끼어들었다
오로지 당선영 한 사람에게로 쏟아지던 기운이 그에게로 대신 전해졌다.
온몸에 쇳덩이를 두른 듯한 감각이 느껴 진다. 그러나 버텨내지 못할 정도 는아니었다.
“자식에게 폭력을행사해선 안되지 않겠습니까.”
백우진이 손을 들어 검을 쥐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러 자 그에 게 서 쏟아지 던 기 세 가 한층 누그러 들었다.
무감각한 당연신에 눈빛에 처음으로 이채가 서렸다.
“호오.”
전력을 다해 끌어올린 기세는 아닐지 라도 화경의 고수가 뿜어낸 기운인 것만은 틀림 없었다.
그런 기세를 손짓 한 번에 끊어내는 것을 보면 신룡이라는 이름이 허명은 아니 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제법이군.”
미친개나 다름없었던 첫인상과는 달리, 그가 정파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빼어난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사그라들고 있던 기운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부풀 리기 시작했다.
“허나부족하다.”
거대한 기운이 오롯이 백우진을 향해 쏟아졌다.
지구의 중력보다 몇 배는 더 높은 행성에 발을 내 디 딘 기분이 다. 백우진의 무릎을 꿇리기 위해 폭포수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기운에 이를 버티는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자네에게는 미안하네만.”
내뱉는 음성에서도 기운이 넘실거렸다. 한 글자, 한글자 귀에 새기듯 들어 오는 소리 에 얇은 핏줄기 가 흘렀다.
“내 딸의 혼처는 이미 정해져 있네.”
그러니.
“이만조용히 물러나는 게 어떤가.”
이것은권고나제안이 아닌 협박이었다. 이대로돌아가지 않으면 당장에 라도 온몸에 피를 쏟게 해주겠다는 강렬한 의 지 가 담겨 있었다.
“배,백우진…!”
등뒤에 서 있던 당선영이 걱정스러운 어조로그의 이름을불렀다.
사모하는 이가 자신으로 인해 귀에서 피를 흘리고, 강한 압박감을 온몸으 로 받아내고 있다.
그가고통받는 모습을 더 이상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연신에게 사죄를 구하고 백우진을 밖으로 내쫓는다면 더 큰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
피 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차마 하고 싶지 않은 말을 입에 올렸을 즈 음이었다.
“저랑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압박 속에서 백우진이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당연신 또한 제법 놀라고 말았다.
‘고작절정에 불과한녀석이 어찌….’
지금 내뿜는 기세는 백우진의 경지를 초월한 지 오래였다. 당장 무릎을 꿇 지 않고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 여겨야 하건만, 이를 넘어서 말까지 할줄이야.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을 때, 백우진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침내 드러난 그의 얼굴은 자신감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걸로 말입니 다.”
고개조차 들기 힘들 정도로 강한 압박 속에서 백우진은 확신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화경의 고수인 그가, 좀처럼 제 힘을 발휘하지 못 하는 상태임을.
‘ 가능하다.’
여전히 벽은 높고, 두꺼웠으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수준까지는 아니라 는것을.
그렇기에 당연신으로부터 당선영을 빼앗아 올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백우진은 그를 자극하기 위해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띠꺼운 표정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아,혹시 쫄리면 뒈지셔도 됩니다.”
하수하!
권태로 가득한 그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구겨졌다.
백우진이 시전한,님 쫄?,의 효과가너무나도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