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위기
백우진을 압박하던 기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당연신의 몸에 갈무리되었 다.
딸인 당선영조차 처음 보았을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 또한 가볍게 웃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부드럽게 말아 올린 입꼬리에 담긴 것은 명백한 조소 였다.
“제법 괜찮은 도발이었네.”
온몸이 찌그러질 것만 같은 압박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백우진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서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던 궁극의 도발이 실패했다는 데에서 오는충격이 제법 큰듯했다.
“무림에서 자네와 나의 배분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알고는 있는 겐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떠 올랐다. 정파 무림 에는 배분이 라는 것을 제법 중 히여긴다는 것을.
배분이란 서열과 비슷하다. 백우진은 이제 막 무림에 이름을 날린 말학에 불과했고, 독왕 당연신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명성을 쌓아 올린 대선배 다.
“무림 말학에 불과한 자네와 내가 내기라.무림의 동도들이 이 독왕을 얼 마나 우습게 보겠나.”
판타지 세계에서든 지구에서든 자존심 앞에 서열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 허나, 정파 무림은다르다.
아무리 상대편이 먼저 도발했다고 한들, 오대세 가의 가주라는 높은 배분 을 지 닌 그가 백우진과 내 기를 하여 이 겨도 본전에 못 미 치고, 패 배하면 막대 한 손해를 떠 안게 되는데 냉정하게 생각하면 절대 응할 리가 없었다.
‘생각보다 더 냉정하구만.’
백우진도 그에게 별다른 이득이 없다는 것쯤은 내기를 제안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상대방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투를 사용하여 속을 긁어 냈던 거다. 이성을 잃은 이의 머리로는손익 계산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으 니 말이다.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 백우진을 또렷하게 응시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 딸은 내어줄 수 없네. 그러니 다른 혼처를 알아보 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미 련 없이 뒤로 돌아섰다. 앞서간 총관이 열어둔 문으 로 나서기 전, 고개를 살짝돌려 입을 열었다.
“기왕왔으니 며칠 푹쉬다가게.자네는이제 손님이 아닌가.”
비아냥 섞인 어조로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사라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 보던 백우진이 고개를 돌려 당선영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녀도 이쪽을 보려 했는지 고개를 돌리는 와중이 었다.
“이제…, 어떡하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은 힘없는 목소리에 백우진은 힘 없는 미소로 화 답했다.
“아무래도 엿된것 같은데.”
어떡하지?
:k * *
사천 성도에 터를잡은지 30년이 넘은무림맹 지부가발칵뒤집혔다.
발단은 정무학관의 신룡조 조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로부터 였다.
“지금이 보고서가 사실인가.”
무림맹 성도 지부의 지부장 자리를 오 년째 지키고 있는 잔참마도(殘澯魔 刀) 고명한은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한 생도에게 추 궁하듯 물었다.
소녀의 티를 온전히 벗어 던지지 못한 작고 여린 소녀는 강한 압박감에 눈 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제법 강단 있는 말투로 대답했다.
“한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입니다.”
“그런가.”
가끔 있다.
좋은 성적을 받아내기 위해 이따금 보고서에 거짓말을 섞는 약아빠진 녀 석들이.
혹여 이들도 그럴지도 모른단 생각에 강한 말투로 물었으나 지금의 모습 을 보면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모두 사실인 듯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
이곳에 지부장으로 부임하기 전 그의 소속은 무림맹 본단 직할대인 멸마 대 소속이었다. 그만큼 마물과 마인에 대한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마물과 마인이 나타날 때마다 인근 지역이 적잖은 피해를 입기는 했으나 어떻게든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언제나 단독 행동을 하기 때문이 었다.
그랬던 녀석들이 보고서에 적힌 내용대로 마교도의 명령에 단체로 움직 이기 시작한다면 녀석들이 나타난 지역은 멸마대가 도착도 하기 전에 쑥대 밭으로 변해버릴 터.
“당장 확인부터 해 야겠어. 길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나?”
고명 한이 자리 를 박차고 일어 나며 물었다. 제 갈연지 또한 기 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죠.”
제갈연지가 이끄는 신룡조원과 성도 지부 소속의 무인들로 이루어진 조 사대가 꾸려졌다.
“출발한다!”
그들은 지체 없이 성도를 나섰다.
고뇌 로 가득찬 하루가 지 나갔다.
굉장히 좋지 않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 백우진은 아침상이 차려지기도 전 에 술부터 들이켰다.
빈속이 잠시 쓰리는듯했으나 이내 잠잠해졌다. 이 또한몸이 적응을 한 덕 이리라.
“비기가 통하지 않을 줄은 몰랐는데 • • •.”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넘어가는 자존심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네.”
단숨에 끝낼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이제는 내부에서 살살 건드 려보는 수밖에 없다.
“뭐,아예 수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비기는 아쉽게 불발됐지만 중요한 것 정보 하나를 건지는 데에는 성공했 다.
화경의 고수인 독왕 당연신이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겠으나, 좀처럼 힘 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말이 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화경의 경지를 마스터라고 표현한다. 완숙의 경지에 이른 검술은 물론이고, 이곳에선 기라고 부르는 오러를 다루는 데에 있어 제 손발보다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붙여진 표현이었다.
당연신이 어제 보여준힘은무척 거세고 강렬했다.허나, 화경의 경지에 이 른 이가 보여주기엔 한없이 모자라고 어설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못 속이 지.”
절정, 초절정에 이르러 강렬한 기세를 흩뿌리고 다니는 무인들은 화경에 접 어들게 되 면서 모든 기운을 내부로 갈무리하여 범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 가된다.
이를 반박귀진의 경지라 하여 경지가 낮은 이는 화경의 고수에게서 그 어떤 기운도 읽지 못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백우진에 게도 해 당하는 말이 었다. 그가 고수를 알아보는 건 은연 중에 나오는 분위기와 여유 등을 경험을 기반하여 읽 어내림으로써 추측할 뿐이지, 화경의 고수에게서 기세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아주 순간이지만 느껴졌단 말이지 ….”
처음 당연신의 등장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다. 완연한 화경의 고수가 이 런 것이다, 하고 말하듯 겉으로 흘러나오는 기운이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헌데 한 번 기운을 흩뿌리고 거둬들인 시점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명 제법 잘 갈무리한다고 하긴 했으나, 미처 숨기지 못한 일부의 기세가 자꾸만 새어 나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몸에 이상또는제약이 생겨 실력을제대로발휘하지 못하는것과는조금 달랐다. 몸에 문제 가 생 겼다 해도 화경은 화경이 다. 실질적 인 전투력 이 떨어 질 수는 있어도 반박귀진의 경지가무너지는 경우는 가만히 있어도 기운이 줄줄 새는 죽음을 앞둔 노인이나 병자가 아닌 이상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혼란스러웠다.
기세를 완전히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건 결국 당연신이 화경에 이른 고수 가 아니라는 뜻이 되는데.
그건 그것대로 이상했다.
“독왕은분명 무림에 알려질 대로 알려진 명사인데 ….”
제 딸에게 어떤 아비인지는둘째치고, 그는무림에 몇 안되는화경의 고 수로 그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화경으로 인정받은 것은 무림 동도들이 보는 앞에 서 화경 에 오른 고 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강기를 선보였기 때문이 다.
독특한 무공을 배웠다면 반박귀진에 가깝게 기세를 갈무리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 만 강기 만큼은 그 무엇으로도 흉내 낼 수 없다.
그러니 당연신이 화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 뭐지.”
아무래도 자신이 어제 본 당연신은 당연신이 아니 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k * *
무인들을 이끌고 신룡조가 마물을 처치한 지역에 당도한 고명한은 침음 성을 흘렸다.
“크음…!
마물의 흔적이 명명백백히 남아 있는동굴이 실제로존재했다. 더불어 동 굴의 입구에는 진법의 흔적마저 남아 있었다.
그들이 올린 보고서에 거짓 한줄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는 한껏 굳은 얼굴로 제갈연지에게 물었다.
“그대들 조장이 남기고 간 지도가 있다고 했지.”
“•••네.마물이 숨어 있을 것으로추정되는 위치가표시되어 있지요.”
“바로 둘러보세.”
얼마나 많은 마물들이 이 지역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만약 녀석들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면 지금껏 본 적 없는 대학살의 현장 이 펼쳐지리라.
조급한 마음은 발걸음에 그대로 이 어졌다. 쭉쭉 앞서 나가는 그의 발걸음 을 따라부하들이 힘겹게 뒤따랐다.
백우진이 남기고 간 지도의 표식을 따라 인근 숲속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 했다.
하룻밤 사이 에 무려 다섯 곳을 뒤 졌지 만,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발견되 지 않았다.
“저어,오늘은이만휴식을취하는게 어떠신가요.”
사위가 어둠에 물들어갔다.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올 터.
그와 함께 무리를 이끌던 제 갈연지 가 용기를 내 어 의 견을 피 력했다. 그러 나 고명한은 이를 듣지 않았다.
“횃불이 있으면 수색을 이어갈 수 있네. 마지막으로 한 곳만 더 찾아보도 록 하세.”
“네….”
그의 조급함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제갈연지는 한 걸음 뒤 로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에 대원들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다음 수색 장 소에 도달했을 때였다.
갸릉!
제갈연지의 품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감은채 고로롱코를골며 잠 들어 있던 백호가 별안간 눈을 뜨더니 귀 여운 포효를 내질렀다.
“제갈 참모, 이것은….”
옆에 있던 장삼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백호가 울부짖기 시작할 때마다 그곳에는 존재했다. 마물이 숨어 있는 동굴이.
제갈연지가 품에 있던 백호를 땅위에 내려놓자,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
“다, 당장 쫓아야 해요!”
“저 고양이를 말인가?”
고명한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투로 묻자 제갈연지가 앞서 달려가며 소 리쳤다.
“고, 고양이가 아니라 백호예요!”
앞서 달려간 신룡조원의 뒤를 고명한과 조사대원들 또한 뒤따랐다.
그들이 멈춘 곳은 숲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질기고 억센 풀들이 뒤엉켜 자라나 있는 곳이었다.
억센 풀들을 칼로 모조리 쳐내며 도달한 곳에는 커다란 동굴이 존재했다. 지금까지 그들이 보았던 것보다 몇 배는 더 크고 넓은 동굴이.
이를 본 고명한이 안색을 굳혔다.
“말도 안되는 곳에 도착한 것 같군.”
그때 였다.
가장 먼저 도착하여 동굴 주변을 살피고 있던 제갈연지 가 다급한 목소리 로 소리쳤다.
“지,진법이 해체되어 있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동굴 안으로부터 인간의 것과는 거리가 먼 발걸음 소리가울려 퍼졌다.
쿵 쿠웅 쿠궁
“바,발소리가…!”
한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