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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92화 (92/215)

<92 화〉당선영

오대세가, 그것도 사천당가 가주의 여식인 그녀가 태어난 곳은 따뜻하고 넓은 방이 아니라 독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이곳 연구실의 실험대 위 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당가는 독인(毒人)이라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 다나 봐.”

독인 (毒人).

이 는 말 그대 로 걸 어 다니 는 독 그 자체 인 인간을 만들어 내 는 실험 이 었다.

사실 독인이라는 이름은 지고의 경지에 다다른 독공의 고수를 일컫는 말 이었다.

독공을 익힌 무인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평범한 기 대신 독 기운을 단전에 쌓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용독술은 물론이고 평범한 장법에 독의 기운을 섞은독장을 뿜어내 상대를 단숨에 중독시키는것이 가능해졌다.

허나, 독공을 익힌 모든 무인들의 꿈인 독인이 되기 위해선 최소 절정의 경 지 에 올라 독 기운을 쌓기 시작하여 초절정, 화경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독 장을 구사할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했다.

“그때 당가에서 독을 연구하던 한 장인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고작 독장이 나 사용하는 게 아니 라 내뱉는 숨에서, 흐르는 땀 한 방울에 도독이 묻어 나올수 있게 만들면 그것이야말로진정한독인이 아니겠는가.

“미친 생각이었지.”

고민하고 말 것도 없이 일언지하에 폐기해야 할 연구였다. 아무리 그럴싸 한 내용을 주절주절 써놓았다 해도, 숨만 쉬 어도 독이 함께 내뿜어지는 인간 을 만들자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한참 어긋난 일이었으니까.

“근데 놀랍게도 이 연구가허가됐어.”

당가의 대소사는 가주와 전대 고수들로 이루어진 원로회와의 회합을 통 해 이루어진다.

회합에서 아주 극렬한 논쟁 끝에 쥐나 돼지와 같은 동물들에게 먼저 실험 을 해보는 것으로 연구가 시 작되 었다.

“독을몸에 주입하는 연구잖아.쉬울 리가없었지.”

연구는 난항을 겪었다. 쥐에 아주 미량의 독을 주입하고 내성을 키우는 과정에 서 몇 번을 넘 기 지 못하고 절명하는 횟수가 수백,수천 번으로 늘어났 다.

느리게 한걸음씩 나아갔다.두번, 세 번 만에 목숨을 잃었던 쥐나 개,고양 이들은 수십 번의 독 주입을 견디고 살아남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한 개체는 숨을 내쉴 때마다 미약한독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어.”

잠시나마 희망을 보았던 연구는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미약한독기는 체내에 심는데에 성공했으나, 보다 강력한독을 체내에 심으려고 하면 연구 초기 때처럼 실험체들이 버티지 못하고죽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막대한금이 소모된 금단의 연구는 거기서 끝이 나는 듯했지만…, 장인 은 마지막 제안을 했다고 해.”

당가의 재산을 수도 없이 빨아먹은 연구를 실패로 끝마친다는 것은 곧 죽 음을 의미했다.

자신의 죽음을 피하기 위해 수도 없이 머리를 쥐어짜낸 장인은 한 가지 수 를 떠올렸다.

“체 내 에 주입하여 물들일 수 있는 미 약한 독 중에서 가장 효과적 인 ….”

그녀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단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 졌다.

숨기려 했다면 이곳에 와선 안 됐다. 어떤 얘기도 꺼내서는 안됐다.그러 나 그녀는 백우진에게 자신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사모하는 이 에 게 평 생 짐 이 될 지도 모를 치부를 비 밀로 한 채 살아가고 싶지 않았기 에.

“미약을…, 여인의 몸에 투여하자고. 그렇게 해서…, 명가의 자손, 상단의 자손들과 연을 맺게 하면 당가는 보다 부유해질 수 있다고….”

사내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끌리는 여성에게 자제력이 한없이 약해지는 법 이다.그런 와중에 미약이 스며든다면 일사천리다.

기정사실을 만들어 강제 혼약을 맺든, 걸어 다니는 미약이나 다름없는 여 인에게 푹 빠져 치마폭에 휩싸여 사는 사내를 만들든 어느 쪽이든 당가가 막 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되 니 연구로 인해 탕진한 금을 충당하고도 남지 않 겠느냐는 말이다.

“당시 재정이 많이 어려워졌던 원로회는 이를받아들였지 ….”

그들은 이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열띤 환호마저 보냈다.

당가의 여 인들은 당가 내부에서는 그 쓰임새 가 애매했고, 밖으로는 사내 들이 본능적으로 꺼 렸다.

시집을 가게 되면 출가외 인이 될 것을 염려한 탓에 당가의 비전을 제대로 익힐 수 없는 여인들은 당가의 무력으로의 쓰임새가 모자랐다.

그렇다고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려고 해도 당가라는 이름 자체는 혼처 로 부족함이 없으나독에 대한 인식 때문에 혹여 아내가 자신이 먹는밥에 독 이라도 타는 걸 아닐까 염려하는 패기 없는 사내들에게 있어 당가의 여인들 은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당가의 여인들을 제대로 쓸 방법을 찾아냈으니,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었을 거야.”

열렬한 찬성을 이끌어 내며 마지막 실험이 승인되 었다. 그리고 그 실험 대 상은 곧 있으면 태어날 가주의 자식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졌다.

“원로회에선 곧 태어날 가주의 자식이 딸이면 실험을 감행하고, 자식이라 면 하는 수 없이 다른 실험체를 찾기로 중지를 모았어.”

백우진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째서 가주의 자식을 실험체로쓸생각을했지?”

상식 적으로 이 해할 수가 없었다. 쥐 나 고양이,개 와 같은 동물들에 게 성공 적인 실험이 었다곤 하나 어쨌든 인간에게는 처음이 아닌가.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도 모를 실험의 첫 대상으로 가주의 자식을 꼽는다 는 게 말이나되는 일인가.

“•••책임론이 대두된 거야.처음 연구를허가했을 때,찬성표를 던진 이들 이 가주인 아버지를 비롯한 가주파의 일원들이었거든.”

원로회는 두 개의 파벌로 나뉘 어 있다. 가주를 따르는 가주파와 원로회 중에서도 가장 높은 배분인 일 장로를 중심으로 뭉친 장로파가 바로 그것이 다.

처음 장인의 연구 승인에 대한 찬반토론이 펼쳐졌을 때, 장로파는 격렬히 반대했고, 가주파는 실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 많다는 이유로 찬성 을 주창했다.

“당시 아버지는…,그실험을 반대하는쪽이었어.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가주파의 인원들이 이를 찬성하고 나서니까 어쩔 수 없이 흐름에 몸을 맡기 셨던 거고.”

독왕이 가주가된지 얼마되지 않은시점이었다.

당시 두 파벌의 숫자가 엇비슷하여 가주파의 일부가 등을 돌리 기 라도 하면 가주 자리에 앉은 내내 원로회의 꼭두각시가될 수도 있음을 염려한그 는 찬성의 흐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웃긴 건 막상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에 연구를 찬성했던 가주파 원로들 이 전부 아버지에게 책임을 씌웠다는 거야.”

“허.”

당시의 당연신이 할수있었던 것은 하나뿐이었다. 이윽고태어날 아이가 딸이 아닌 사내 이기를 바라는 것.

짙은 불안 속에서 산통을 느낀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를 낳자마자 혼절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힘으로 뱃속에서 빠져나와 우렁찬 울음소리를 뽐낸 아 이는 얄궂게도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당연신은 한없이 절망했고, 원로회와 장인은 기다렸다는 듯 갓난아기의 몸에 미약을조금씩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것이 체내에 배어들 때까지 계속.

“그거 아니?”

당선영은 제 팔을 덮고 있는 소매를 걷어 올려 뽀얀 살결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피부에는 땀을 만들어내는 곳이 있다는 걸.”

땀샘.

그리 성실하지는 않았지만, 지구에서 교육 과정을 거친 백우진이 이를 모 를리가없었다.

“나는 그곳이 전부 미 약으로 뒤덮여 있어. 그래서 내 가 땀을 흘리 거나 감 정적인 기복이 심해지면…, 체취에 미약이 섞여 들어가게 돼.”

어릴 적에 그로 인해 사내들로부터 몇 번이나위기를 겪었는지 모른다. 그 녀는 제 감정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독공을 배워 어느 정 도 체취를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을 보필하는 시녀 두어 명이 전부인 심 처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몸이 증오스럽 다는 듯, 살결이 드러난 제 팔을 으스러 져라 꽉 쥐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매사에 열정적이었던 아버지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 다고해.”

언제나 가문의 대소사를 해결하기 위해 앞장서던 당연신은 그때부터 달 라지기 시작했다.

원로회의 장로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힘없고, 의지도 없는 나태한 인간 이 되어버렸다.

백 우진은 그녀 에 게 로 다가가 자신의 팔을 으스러 져 라 꽉 움켜쥐 고 있는 손을 풀어냈다.

당선영은 제 손에 닿은 그의 따스한손길에 기뻐하는 한편, 한없이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이런 나를 감당할 수 있겠니 猌 괴물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네 곁에 있 어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만약그렇지 않다면…, 흣!”

..

!..

...

...

지금이라도 당가를 떠나라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백우진은 당선영의 허리를 잡고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제 얼굴을 그녀의 목덜 미 에 가져 가 크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녀 몸에서 나는 본연의 체취와 더불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미약의 달 콤한 향기 가 함께 섞여 스며들었다.

“뭐,뭐하는 거야…?”

그녀가 당황 섞인 물음을 던지자, 백우진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이 뒤섞인 향기가 딱 내 취향이 야. 아주 마음에 들어.”

그런 것은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는다는 듯 여느 때와 다름없는 웃음에 당선영은 지금까지 했던 모든 긴장이 일시에 해소됨을 느꼈다.

“조금만 안아주겠니.”

“이리 와.”

백우진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제 품에서 온전히 긴장을 놓은 채 기대어 있는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리 는 부드러운 손짓과 달리, 실험실 한쪽 벽면을 응시하는 백우진의 두 눈은 닿 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 날카롭고, 싸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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