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화 > 더해가는의문
밤이 깊어 오자, 당선영은 아쉬움과 슬픔 가득한 눈을 거둔 채 제 처소로 돌아갔다.
부녀지간의 정을 거의 나눈 적이 없다고는 하나, 그녀에게는 어쨌든 아비 였다. 그런 아비가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그녀를 커다란 충격의 구렁 텅이로 몰아넣었다.
허나 결정적인 단서가 없는 지금으로선 무엇 하나쉽게 결론 지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칠 단계는 아니지.’
넓 게 봐야 할 때다. 억 지로 시 야를 좁혔다간 언제 어 디서 중요한 단서 가 스 쳐 지나갈지 모른다.
그러니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든 걸 지켜봐야만한다.
“아, 머리 쓰는건 딱질색인데.”
깊게 머리 쓰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것 저것 생각하다 보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는 날이 허다하게 많아지기 때문이 었다.
바로 지금처럼.
“공자님, 조반 가져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장지문 너머로 들려오는 간드러진 음성이 상념에 잠겨 있던 그를 일깨웠 다.
눈을 뜨자 어느덧 해가 밝아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들어와.”
드르륵
장지문이 열렸다. 다양한 반찬이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밥상을 낑낑거리 며 들고들어오는 이는 며칠 전, 백우진을 향해 유혹의 수를 펼쳤던 그 시녀였 다.
그가 앉은 자리에 밥상을 내려놓은 그녀는 곧장 밖으로 나가지 않고 맞은 편에 다소곳이 앉아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
!..
.....
“•••왜그래?”
백우진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묻자, 그녀가 생긋 웃으며 물었다.
“식사 시중…, 들어드려도 될까요? 오늘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이 제법 있어 서요.”
“굳이 그럴 것까진… 아니, 아니다. 가끔 시중 받아보는 것도좋겠지.”
완곡하게 거절하려다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젓가 락을 손에 쥐어 생선에 붙은 가시를 모두 발라낸 두툼한 살덩이를 그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어서 드셔요.”
그녀를물끄러미 쳐다보며 숟가락을 입에 무는 백우진.
‘이상하네.’
며칠 전에 보았던 그녀는 풋풋한느낌이 나는 소녀였다. 제법 마음을 먹은 듯했지만, 사내에게 다가가기 위해 하는행동이 하나 같이 어설퍼 오히려 그 것이 매력적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백 우진은 입 을 우물거 리 며 저도 모르게 그녀 쪽에 다 대 고 코를 킁킁거 렸 다.
“어머, 저한테 무언가 냄새라도 나는 건가요?”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묻는 시녀의 모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급히 변명했으나 그녀는 울상을 지으며 조금 더 다가와 제 옷을 가볍게 펄 럭 였다.
“정말 안나나요?”
옷의 펄럭임을 따라 콧구멍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던 향기가 스며들었다. 맡기만 해도 안면 근육을 무장 해제시 키는 듯한 향긋하고 달콤한 냄새.
‘이건 분명히…, 당소저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데?’
그가 킁킁거린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향기가 당선영에게서 맡았던 형기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똑같은건아니지만….’
자세히 맡아보면 미묘하게 다르긴 했다. 차이가 미비하기는하나, 눈앞의 시녀에게서 풍겨오는 향이 조금 더 완숙하고 고아함을 자아냈다.
동시에 내공이 조금씩 소모되 기 시작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 다.
‘당 소저와는 또다른 실험체?’
향만 맡았을 뿐인데 내공이 소모된다는 것은 당선영과 마찬가지로 그녀 의 체취에서 미약이 묻어나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시녀가 당선영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난 실험의 실험체 였단 말이 아닌가.
“공자님…?”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오며 이쪽을 향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온다.
잠시 넋이 나간 표정을 하고 있던 백우진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녀 에게 보여주기 위해 과장한 행동이었다.
“•••시중은 이만 됐어. 그러니 이만 나가보도록 해.”
“아, 알겠어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녀.
백우진은보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돌아 나가던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미소가맺혀 있는 것을.
“이상하네.”
분명 당선영은 말했다.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 실험체였다고.
이유인즉, 체내에 독을 주입하는 것이 성인일 때보다 아이일 때가, 그중에 서도 갓 태어난 아기일 때 성공률이 제일 높았기 때문이라고.
또 그녀는 처량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그렇기에 자신이 당가에서 더 없이 소중한존재로서 살 수 있다고.
갓난아기 때 미약으로 몸을 절인 아이가 성장하면서 어떤 문제점을 떠 안고, 또 어떤 변화를 보일지 관찰하여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실험체 이 기에.
“그럼 저여자는대체 뭐야.”
예전에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분명 꽤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다곤 했 지 만, 사리분별 안 되는 어 린 시 절은 아니 었다.
“설마….”
아찔한 생 각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 나갔다.
만약 바쁘게 돌아다니 느라 어 디 있는지 조차 파악하기 힘 들다는 그 장인 이 독인에 대한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면?
조금 전 자신에게 조반을 가져다준 소녀는 거듭한 연구의 결과물로 성인 일 때 실험을 받은 거라면.
어느 정도 아귀가 들어맞게 된다.
“뭐 하나풀린 것도없는데 왜 자꾸의문만쌓이냐….”
안 그래도 답답했던 가슴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조금만 더 있다간 꾹꾹 억눌러둔 성깔이 발휘될 것만 같다.
속을 달래기 위해 호리병에 담긴 술을 입에 부었다. 화끈한 감각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내공이 제법 빠른 속도로 쌓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 처치한 마물들에게서 나온 마석으로 빚은 술이었다.
“슬슬 끝이 보이네.”
어느덧 무척 연해진 술의 색깔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장지문 너머로 사내의 그림자가 비쳤다.
“저어, 공자님.”
낯익은 음성이었다. 자신에게 과감하게도 새로운 인사법을 곧장 시도한 경비 무사의 것이 분명했다.
“공자님 이름으로 서찰이 한 장도착했습니다요.”
가만히 듣고 있던 백우진이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 장지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여,여기 있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핼쑥해진 경비 무사의 모 습을 보고 장난기 가 올라왔지 만, 꾹 참으며 그에게 가라고 손짓했다.
그는 곧장 서찰을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오.
기다리고 있던 내용이 었다.
당가에 짙게 깔린 암운 속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해줄 정종구 를 찾았다는 소식 이 었다.
그것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곳에서 말이다.
…
번화한 도시에는 하나쯤 어두운 밤에도 그 빛을 잃지 않는 불야성 (끱夜城)이 존재한다.
대부분이 그러하듯, 짙은 밤에도 빛을 잃지 않고 영업이 한창인 곳은 딱하 나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놈이 도박을 하고 있다?”
“예.”
안내를 위해 흑일이 붙여준 하오문도가 깍듯하게 답했다.
낮에 는 객잔, 야심 한 밤부터 새 벽 까지 는 도박장으로 운영되 는 이곳에 정종구가 있단다.
백우진은 그것이 이해가되지 않았다.
“당가에서 쫓겨난놈이, 성도에 살고 있다고?”
“정확히 성도는 아닙니다만…, 아주근처에서 살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오문도는 제 품에 지니고 있던 그림 한 장을 건네주었다.
“정종구의 현재 모습입니다.”
당선영이 그려주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한 정종구의 모습이 그려 져 있었다.
“자세히 안보면 다른 사람이라고해도믿겠네.”
눈가에 박힌 좁쌀만 한 점이라던가, 귓등 밑에 자리 잡은 사마귀와 같은 특징적인 부분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정종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 라져 있었다.
‘얼굴을 이토록 꾸민 걸 보면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건데 ….’
그것이 과연 누구일까.
유력한 후보는 아마 당가일 것이다. 매일 같이 도박장에 출근도장을 찍고 있는 걸 보면 당가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나온 사람치곤 돈도 꽤나 많아 보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 이건가.”
생 각보다 과감하고 현명한 판단이 라고 칭 찬해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 냥 바보 같은 선택 이 아니 었을까.
도박장으로 운영되는 객잔 건물 주변에서 미약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그 수가무려 열둘에 달했다.
‘감시? 아니면 살인?’
어느 쪽이든 정종구가 주목받고 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 었다.
“넌 이만 가봐. 지부장에게 고맙다고 전해주고.”
“감사합니다.”
혼자가 된 백우진은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그대로 도박장으로 들어가 녀석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낼 셈 이 었으나 생 각이 바뀌 었다.
조금 기다리면서 여길 지켜보는 열두 명의 목적도 파악해볼 심산이었다.
어두운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은 백우진은 술을 한 모금씩 입에 머금고 있 을 때, 조금 전 그림으로 확인한 정종구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박은 사내가 건물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에라이, 썩어빠진 놈들 같으니!”
퉤!
입이 거친 것을 보니 제대로 빨리고 나온 듯싶다.
한동안 건물 앞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정종구는 이내 애꿎은 땅을 걷어 차며 발걸음을 옮겼다.
“빌어먹을…, 내다음에는….”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그의 주변으로 조금 전 건물을 에워싸고 있던 열두 명이 움직인다.
철저하게 거리를 유지한 채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봐선 죽일 마음은 없는 듯하다.
‘그럼 관찰인가.’
허 나 관찰이 라기 엔 또 그 수가 너무 많지 않은가. 매 일 열둘이 나 되 는 인원 을 사람 하나 감시하는 데 에 쓰기 엔 인력 낭비 가 아닐까 싶었지 만, 어쩌 면 그 만큼 중요한 인물이 라 그만큼 사람을 쓰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기 대 감 이 부풀어 올랐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정종구를 둘러싼 열둘의 목적은 감시 및 보호일 터.
판타지 세계에서 용사라는 존재는 다재다능의 대명사다. 신이 내린 재능 을 소유한 만큼, 무엇이든 배울 수 있고,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친다.
그 재능을 가지고도 백우진은 마법을 배우지 못했다. 고도로 숙련된 검술 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희대의 망언을 일삼는 두 검귀를 스승으로 둔 탓이다.
덕분에 마법 한줄 익히지 못했지만, 다른 것들은 지겹도록 배웠다. 지금 보이는 것 또한 그중의 일환이었다.
단전에 있던 기운들이 용천혈을 통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그렇게 바닥 을 타고 흐른 기운들은 주변에 짙게 깔린 어둠을 끌어당겨 백우진의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밤의 장막.’
세계에서 각기 다르게 부르는 기(氣) 또는 마나라는 건 결국 자연을 구성 하는 작은단위다.
불, 물, 바람, 대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리고 어둠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의 몸에 저장된 기운으로 자연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지만, 약간의 가 공을 거치면 주변의 기운을 끌어당겨 동화할 수는 있다.
밤의 장막은 그것을 이용한 기술이다. 자신의 기운으로 어둠을 끌어당겨 제 몸에 두르는, 분명 검귀가창안했음에도판타지 세계의 모든 암살자들이 배움을 간절히 바랐던 최상위 은신술이, 이곳에 펼쳐졌다.
색 안경을 낀 듯, 어둑해진 시야 너머로 정종구의 뒷모습이 보였다. 주변에 어둠을 드리우는 밤의 장막이 지닌 유일한 단점이었다.
백우진은 일직선으로 그를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럼에도 그 누구 하나 그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덧 소리 없이 정종구의 지척에 다다른백우진이 입을 열어 귀에다대 고 속삭였다.
“종구야, 엄마가 저녁 먹으러 들어오래.”
“뭐야, 어떤 녀석이 죽은우리 엄마를…!”
정종구가 노기를 띤 음성을 토해내며 뒤로 돌아서던 그때, 백우진은 제 앞 에 드리워 진 장막을 살짝 걷 어냈다.
“어,미안.”
그건 몰랐네.
히죽 웃는 얼굴로 심심한 사과의 인사를 건넨 뒤, 손을 뻗어 녀석의 목덜미 를 잡고 장막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걷어냈던 장막의 틈을 메꿨다.
바로 그 순간, 정종구를 감시하고 있던 야행복을걸친 이들이 내려앉았다.
철저하게 가려진 얼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눈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대체 무슨일이 벌어졌단 말이냐.”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무언가가나타나서…!”
그야말로 대혼돈이 벌어졌다.
백우진은 어느새 눈을 까뒤집고 기절한 정종구를 어깨에 들쳐 메고 그들 사이를유유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