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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96화 (96/215)

<96 화 > 밝혀지는 정체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꿈속에서의 자신은 도박장에서 실컷 돈을 잃고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었다.

어두운 밤길을 거닐고 있는데 별안간 웬 목소리가 돌아가신 제 어머니를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발끈하여 뒤로 돌아서니 준수하게 생긴 사내의 얼굴만허공에 둥둥 떠 있 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자빠지려 하는데 허공에서 손이 튀어나와 자신 을 끌어당겼다.

‘저,저승사자!’

기어코 저승사자가 자신을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왔구나 싶었던 그는 놀란 나머지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꿈은 거기까지 였다.

“휴우, 정말요상한꿈이었…, 응?”

이마에서 흐른 땀이 얼굴에 줄줄 흘러 닦아내 기 위해 팔을 드는데 무언가 에 꽉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뭐,뭐지?”

이 상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 었다. 힘 겹 게 눈꺼 풀을 들어 올렸는데 도 아무 것도보이지 않았다.자세히 느껴보니 눈에 무언가씌워진듯했다.

그때, 웬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아니, 대장. 이 녀석 눈 떴소!”

처음 들어보는 낯선 목소리.

사내, 정종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빠르게 이해했다.

이제 보니 다리도묶여 있다. 팔다리가묶여 있고, 눈까지 가려진 상태라면 뻔했다.

‘납치된 건가!’

동시에 조금 전 꿈이라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꾸,꿈이 아니었구나.’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건지는 몰라도 얼굴만둥둥 떠 있던 사내는 귀신이 나 저승사자가 아니라 사람이 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을 납치하기 위해 찾아온.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 가 들려왔다.

“깼나?

같은 사내임에도 감탄할 만한 중저음의 미성이 들려왔다. 분명 죽은 제 어 미를 언급했던 그때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누, 누구요!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날 납치한 거요?!”

짐 작 가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 었다.

‘설마당가에서 날…?’

그중 가장유력한 집단이 바로 당가였다. 허나, 정종구는 그들에게 잡혀갈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

“혹 당가에서 온 거요? 난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소! 입 닫고 조용히 살 라는 말 듣고 착실히 살고 있었단 말이오!”

이를들은 백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가에서 해선 안될 짓 많이 했나보다.”

정종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누,누구시오.”

당가의 사람이 아니었다.그랬다면 저런 식으로 얘기했을 리가 없다.

“너한테 내가 누군지 알려줄 거였으면 눈을 안 가렸겠지?”

“••••••.”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내게 원하는게 무엇이오.”

“사천당가.”

은원에 미친 자들이 모인 가문의 이름이 입에 오르자, 정종구는몸을 움츠 렸다.

“당가에서 네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부터 쭉 읊어봐.”

안대 아래로 드러난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나, 나는 그저 당가에서 사용할 독을 연구하는 여, 연구원에 불과했소.”

분명 처음은 그랬다. 당가는 정파에서 유일하게 독의 정당한 사용을 허락 받은 가문이니, 자신이 만들어낸 독이 그들에 의해 정의롭게 사용된다면 그 보다큰 기쁨이 어딨을까하며 독을 만드는 일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딱 처음까지만이었다.물욕에 취하고,높은 성과를위해 제 양심마저 내버 리기 전까지만.

“그래.그러니까독인 연구에 대해서 좀읊어보라고.”

“헉…!”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독인 연구는 당가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기밀 중의 기밀인데 눈앞의 사내는대체 누구길래 이에 대해 알고 있단말인 가.

입을 벌벌 떨고 있을 때, 백우진이 덧붙였다.

“아, 혹시 말하면 당가의 손에 죽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말을 못하는 거라 면 걱정하지 마.”

자신감 넘치는 말투가 정종구의 귀를 쫑긋거리게 만들었다.

‘그러고보니 분명 처음의 사내가이자에게 대장이라불렀었지.’

어쩌면 당가와도 견줄 만한 힘을 지녔거나 그들로부터 자신을 충분히 지 켜줄 수 있는 단체의 일원은 아닐까.

허나그것은그의 뒷말이 들려오기 전까지 품을수 있는 희망이었다.

“말안하면 어차피 내 손에 바로죽을 테니까.”

피부가 따끔거 릴 정도였다. 짧은 한 문장에 담긴 살기 가 그만큼 어마어 마 했다.

‘허,허언이 아니다.’

이쪽을 향한 음성에 진득한 살기가 느껴졌다. 입을 꾹 닫고 있었다간 당가 를 걱정하기도 전에 눈앞의 사내에게 죽을 걱정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가 얘 기했다는 사실만 비 밀로 해준다면 •••,뭐든 답하겠소.”

“그 정도는 해줄수 있지.”

해줄 수 있는 걸 넘어 쉬운 일이었다. 애초에 백우진이 알고 싶은 건 독인 연구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더불어 거기에 연루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름뿐 이니.

최 소한의 안전 장치를 약속받은 정종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그 리고 물었다.

“알고싶은게 무엇이오?”

“독인에 대한 연구를 끝마치고, 가주의 딸한테 미약을 넣는 실험을 했다 고 들었다. 맞나?”

당시의 상황이 정종구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갓 낳은 딸이 연구원들의 손에 들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오열하다 끝내 생 을 마감한 여 인과 이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

차가운실험대 위에 누운핏덩이에게 조금씩, 아주조금씩 미약을흘려 넣 으며 광기로 가득한 웃음을 흘려대던 연구원들의 모습.

그리고 그 속에는 자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으로 죄책감이란 것을 느 꼈던 때였다.

“•••그렇소.”

수천, 수만의 동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것이 사 람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일말의 망설임 없이 연구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확신이,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 에 무너져 내렸다.

그에게는 다른 의미로 절대 잊을수 없는 평생 안고 살아가야만하는 기억 이었다.

“내 가 알기 로 그 실험은 그때 가 마지 막이 었다고 들었다. 이 후 아이 가 성 장 하면서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니 지켜본후에 이어가도늦지 않다는 이 유로 말이야.”

그런데.

“그 실험…, 그때가 마지막이 아니었지?”

가주의 딸, 당선영의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실험은중지되 었다.

당시 회의에선 그녀가성인이 되어 무사히 혼인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 지만, 그것은 당선영이 열 살 되 던 해에 깨어지고 말았다.

“십년 뒤…, 실험이 재개되었소.”

그 시간 동안 연구원들은 당선영의 경과만 지켜보고 있던 게 아니 었다. 그 녀의 몸에서 일어난 변화와 더불어 동물들을 상대로 비밀리에 연구를 지속 했다.

더 강한 독을 주입하는 것은 번번히 실패했지 만,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 니었다.

“실험 대상은?”

“열 명의 여인이 었소. 나이대는 지학에서 불혹까지 다양했고, 모두 당가에 서 일하고 있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었지 ….”

오랜 연구 끝에 성장이 멈춘 이들을 대상으로 독을 주입시킬 수 있는 방법 을 찾아낸 것이다.

갓난아기를 구하는 것보다 제법 큰 아이부터 성인을 구하는 일이 훨씬 쉬 웠다. 그들은 지체 없이 두 번째 실험을 자행했다.

“넷이 죽고, 여섯이 살아남았소.그리고그중에서 당선영처럼 성공한사례 는두명이었지.”

“살아남았던 넷은 결국 죽었나.”

“죽지는 않았소. 다만…, 폐인이 되었지.”

몸을 절인 미약이 역류를 일으켰다. 너무나도 강한효과로 인해 몸이 무너 져 내렸고,그녀들은결국폐인이 되어버렸다.

“성공한두사람은 어떻게 됐지?”

“어디론가 시집을 보냈다고들었소. 제법 권세 있는 가문이라들었는데 수 석 장인이 직접 처리한 탓에 나는 모르오.”

열 명 중두명이 성공했다.

성공률이 할.

수석 장인을 필두로 한 연구진은 이후로도 몇 번의 실험을 자행했다. 높은 성공률을 보이 기도 하고, 낮은 성공률을 보이기도 하면서 그들은 점차 익 숙해져 갔다.

가만히 이야기를듣고 있던 백우진이 그에게 물었다.

“죄 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나 봐.”

같은 인간의 목숨을 이토록 죽여 놓고서 연구에 대한 성과가 있었다는 이 유만으로 더욱 박차를 가했다는 말에서 백우진은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과연 저들을 같은 인간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수석 장인이 말하더군. 이대로 실패인 채로 두면 떠나보낸 이들에 대한죄책감이 더 커질 뿐이라고. 조금이나마속죄하기 위해선 오히려 이 실 험에 성공해야 한다고 말이오.”

지금 생 각해보면 말도 안 되 는 궤변이 었다. 진심 으로 사죄 하고자 했다면 그때라도 연구를 멈추고 평생 속죄 해 야만 했다.

“우리 연구원들은그궤변에 홀라당넘어갔소.그땐 완전히 미쳐있었던 게 지….”

그들은 넘어갔다. 아니, 그것이 궤변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 멍청한 이는 연 구원 이 될 수 없다. 알면서도 넘 어가기로 한 것이 다.

이미 자신들의 손에 묻힌 피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할 수 없을 때였다.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상황에서 연구마저 실패하면 정말로 미쳐버 릴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 각한 것이다.

“당시 실험에 희생된 이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나?”

“…대부분기 억하고 있소.”

백우진은 품에서 복면을 꺼내어 제 얼굴에 둘렀다.그리고 그의 눈을 가 리고 있던 안대를 벗겨냈다.

“으음…!

환하게 스며드는 빛에 정종구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백우진은품에서 그림 한장을 꺼내어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당선영과 같은 체취를 내뿜던 시녀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실험체의 얼굴들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를 알아보리라.

“이 얼굴, 본적 있나?”

!..

.......

정종구는 종이 안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 다보았다.

그리고.

“허억!”

헛바람을 들이켜고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콰당!

의 자와 함께 뒤로 넘 어 가면서 제 법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그는 육신의 아 픔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림을 보며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대, 대체 그 미친년의 얼굴을 어떻게 …!”

“미친년?”

백우진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무언가 커 다란 건수를 잡았음이 틀 림없었다.

“이 여인이 누구인데 그리 놀라.”

그가 궁금하다는 듯 묻자, 정종구는 어 이 가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도, 독인 연구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면서 어찌 저 얼굴을 모른단 말이오!”

백우진은 단순히 그녀를 실험체 정도로 여겼다.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으로 봐선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 고.

허나, 정종구의 얼굴을 봐선 그 정도 수준이 아닌 듯했다.

묶인 두 팔로 그림을 가리 키 며, 그가 소리 쳤다.

“그, 그자가 바로 이 모든 일을 벌인 수석 장인이잖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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