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화 > 임•운 (橔꺦)
사람들이 오가는 중요한 길목마다, 도둑이 숨어들기 좋은 곳마다 어김없 이 흑사대 가 돌아다니고 있다.
밤의 장막이 암살자라면 누구나 배우길 희 망하는 최 고의 은신술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 었다.
눈 위 에 무언가 한 꺼풀 씌 운 것처럼 시 야가 흐릿해지 는 점 외 에 빛이 가까 이에 있으면 장막이 흐릿해져 숨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단 점 또한존재했다.
그 탓에 등불을 손에 쥐고 다니는 흑사대 무사들이 보일 때마다 커다란 나무나 담벼락 밑으로 몸을 숨겨 야만 했다.
백우진은위험을 감수해가며 끊임없이 안쪽을 향해걸어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긴장을 좀해야겠는데.’
깊숙이 들어갈수록 더 많은 무사들이 주요 길목을 지키고 서 있었다.
가주전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에는 곳곳에 밝혀둔 등불 때문에 밤이 아니 라동이 터오는 새벽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장막이 벗겨질 수도 있다.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 백우진이 줄 위를 걷듯, 아슬아슬한 걸음으로 등불과 등불 사이에 난 작은 틈을 따라 몸을 움직 였다.
“후우….”
가주전을 넘어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서자 경계를 서는 인원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백우진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전각을 바라보았다.
‘이곳이심처구나.’
당선영이 어릴 때부터 쭉 기거했던 심처란 바로 이곳을 말함이었다.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넓이는 말할 것도 없고, 뒤편에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질 것만 같은 예쁜 연못과 화단이 가꿔져 있다.
그래서 그녀의 유년 시절이 행복했겠냐 묻는다면 글쎄.
자유를 박탈당한 이곳에서의 생활은 그저 잠자리 좋은 감옥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으... ” E그 •
밤의 장막으로 인해 소모된 내공을 조금이 라도 채우기 위해 술을 들이 켜며 숨을 골랐다.
그런 와중에 당선영의 어린 모습을 떠올리니 헤픈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 금 그토록 예쁜데 어렸을 때는 어땠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런 귀여운 아이가 이곳에서 자유를 갈망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렸음을 떠올렸다.
“좋아, 결심했다.”
그녀를 되 찾고, 당가에 서의 일이 모두 해결되 면 이곳을 폭삭 무너뜨려 버리기로.
이곳에 그녀의 추억 따위는 없다.과거의 아픔을되새기고, 자유를찾아 훨훨 떠나가지 못하게 만드는족쇄일 뿐.
작은 결심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짧은 시간이 지만 급하게 들이켠 술이 내 공으로변하여 단전에 녹아내렸다.
“여기인가....”
발걸음이 닿은곳은 건물 뒤편에 마련된 연못가.
그곳에는 희미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그중 눈여겨 보인 것은 발자국이 었다.
흙바닥에 새겨진 발자국의 깊이를 가늠하며 이 걸음이 어디를 향한 것인 지를 추측해냈다.
‘보법을 밟아 뒤로 물러났어.’
그녀 가 움직 였을 방향을 따라 걸 어 간 곳에 또 다른 흔적 이 남아 있었다.
“어라.”
보법을 밟아 착지한 흔적과 함께 급격히 뒤튼 자국이 나타나 있다.
‘뒤에서 기습을 당했구나.’
앞선 상대에 게서 물러나기 위해 물러난 곳에 또 다른 상대가 있었으리라. 그것도 그녀가 전혀 예상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은신술을 펼쳐낸 고수가.
전투가시작과동시에 끝이 났다.그로 인해 남아 있는 흔적이 적어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그녀를 찾아내기 위해선 논리적이어야했다. 어렵사리 찾아낸 단서를 근 거로 삼아 목적지를 추론하여 불필요한 동선으로 인한 시간 낭비를 줄여야
만했다.
문제는, 단서가 없다.
‘이성의 영역은벗어났다.’
이 제는 본능과 감에 의 존할 때다.
밤의 장막을두른채 높다랗게 솟은 심처의 전각꼭대기에 올라선다.
몸 전체를 돌려가며 주변에 보이는모든 건물을 시야에 집어넣는다.
그중 하나가 백 우진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실험실….”
그곳은 당선영과 함께 갔었던 실험실이 었다.
산으로 이어지는 외진 곳에 덩그러니 놓여진 실험실과 이곳 심처의 거리는 공교롭게도 매우 가까웠다.
그녀는 어릴 때 거의 매일 같이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어쩌 면, 이곳은 실험실과 거리가 가깝다는 이유로 그녀의 보금자리가된 것이 아 닐까.
생각을 마치기가무섭게 몸을 날려 실험실 앞에 다다랐다.
제갈세가의 정수가 녹아 있다던 거대한 기관진식으로 이루어진 대문이 막아섰다.
만약 이곳이 처음이 었다면 어쩔 줄 모르고 서성이거나 곧장 검으로 부수 려 했을 테지 만, 이미 당선영과 함께 와본 곳이 다.
그녀는 대문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진식의 발동을 해제하기 위한 방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알려주었다.
혹 이 런 일이 생 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예측이 라도 한 것처 럼.
“역시현명한여자라니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본인이 납치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겠지만, 백우진 혼자서 이곳에 오게 될 일이 생길 경우를 예견한게 아닌가싶다.
대문 위에 어지럽게 펼쳐져 있는 쇠 막대기들을 정해진 위치로 옮긴다.
철컥, 철컥!
작은소리를 내며 쇠 막대기들이 대문 안으로 파고듦과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의 틈이 벌어졌다.
손을 뻗어 문을 밀자, 꽁꽁 틀어막혀 있던 고약한 냄새가 새 어 나와 코를 찔러댄다.
“어우.
수십, 수백 번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은 냄새. 잠시나마코를 막아버리고 싶었지만, 감각이란 건 서로 모든 것이 연결되는 법이다.
그로 인한 감각의 저하가우려되어 꾹 참아내는수밖에.
힘없이 걸어 들어간 실험실 내부는 저번에 보았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 어 보였다. 여전히 기분 나쁘고, 오래 있고 싶지 않은 장소라는 것만 같을 뿐.
“여기가 아닌가….”
이상하네. 강하게 감이 왔었는데.
누군가는 고작 감 하나만 믿고 그러고 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대상이 백 우진이 라면 이 야기 는 좀 달라져 야 한다.
수많은 역경을 거듭하며 단련된 그의 감각은 때때로 이성적인 추론보다 앞설 때도 있었으니 .
속단하긴 이르지.’
세심하게 운용한 기를 눈에 담아 안력을 극대화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들이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선명하고 상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벽 에 난 아주 작은 생채 기 마저 커나랗게 볼 수 있는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것 중 하나 그의 시선을 꽉 붙들었다.
“저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벽이 었다. 그는 곧장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희 미하지만, 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꺾이 고, 휘는 구간이 존재했다.
이는분명히 보았던 적이 있는흐름이었다.
“진법이 잖아.’,
이곳은 당가 내에서도 가장중요한 곳이다. 건물 전체의 설계를 제갈세가 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맡겼을 정도면 그 중요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 곳에 진법 정도야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 펼쳐진 진법의 일부가 백우진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라는 게 문제였다.
기물을 찾아 해제하는 방식은 백우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진법에 대 한 이해 도가 높은 제 갈연지 나 가능한 일이 니 .
백우진에게 가능한 것은 힘으로 진법을 파훼하는 방법뿐이었다.
소란이 좀 일기는 하겠으나 이곳은 내당에서도 조금 떨어진 곳에 있으니 조심 만 하면 소리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거라 생 각하며,벽 전체를 날려버리 기 위해 천천히 기운을 끌어 올리며 검봉에 손을 가져갔을 즈음이었다.
쉬익
날카로운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가 귓전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빠르고, 맹렬했다.
옆구리에 무리가 갈 정도로 몸을 비틀자, 조금 전 심장이 놓여 있던 자리에 기 다란 쇠 꼬챙 이 가 튀 어 나왔다.
고개를 돌리 자 덩치 가 우람한 괴 한 하나가 두 눈을 껌 뻑 이 며 서 있었다.
” 너냐?“
피하지 못할필살의 일격이라생각했던 것일까.
한 박자 늦게 팔을 당겨 꼬챙이를 회수하려는 녀석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말을 이었다.
”우리당소저 뒤잡은새끼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백우진의 심장은 거세게 뛰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왔으면 그 기척이 느껴져야 했고, 가까이에 있었다면 알아채 지 못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
응당 느껴 져 야 할 것들을 모두 배 제 한 채 바로 등 뒤 에 서 나타났다.
신출귀몰한 그의 무공에서 백우진은 강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거 그건데.’
판타지 세계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마왕성을 코앞에 두고 차린 야영지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을 때, 별안간 나타난 마족 하나의 공격에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이 그때와똑같았다.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드높은 경지에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뒤를 내어주었다.
제법 강하게 걷어차인 녀석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몸을 꼿꼿하게 세 웠다.
”죽어라.“
인간이라곤 믿을 수 없는 딱딱한 말과 함께, 녀석의 몸이 바닥으로 빨려들 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바닥이 아니라 그림자였다.
녀석은 제 몸을 그림자 속에 숨기고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넘나들며 상 대방의 뒤를 노리는 것이었다.
”이놈 보게.“
아주 느릿하게 그림자 속으로 스며드는 놈을 보며 백우진은 어이없다는 듯, 허허로운 웃음을 내뱉었다.
이윽고 녀석은 그림자 속에 제 몸을 완벽하게 감췄다.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녀석은 어디에서든 튀어나올 수 있다. 그러니 이 곳처럼 이것저것 무언가가 많은 곳은 녀석에게 있어 유리한 전장이나 다름없 다.
허나 백우진에게는 보였다. 녀석이 어디에서 어디로, 또 어느 곳에서 나와 자신을 향해 꼬챙이를 찌르고 들어오려 하는지가.
”거기 오래 있으면 몸 버려, 욘석아.“
어 린아이 타이르듯 내뱉는 말과 함께 백우진은 제 주변에 달빛을 받아 그 림 자를 드리운 커 다란 항아리 아래로 손을 쑥 내 밀었다. 그러 자 그의 손 또
한 그림 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 어디보자….“
그림자 속을 이리저리 헤집던 손에 무언가가 걸렸다.
”옳지.“
여기 있구나.
손에 걸린 무언가를 아주 강하게 쥔 채로 손을 끌어당겼다.
”어서와.“
역으로 당하는 건 처음이지?
그림자를 헤집은 손이 끌고 나온 것은 그 속에 숨어 공격할 기회를 호시탐 탐노리고 있던 사내의 머리끄덩이였다.
”……?“
그림 자 속에 서 모가지 만 강제로 끌려 나온 사내는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 하기가 힘든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백 우진은 히 죽 웃으며 반대 쪽 손을 들어 올렸다.
...
”그렇게 뻔히 보이는 데에서 숨으면 쓰나.“
그러면 다 보이잖아.
아리송한그의 말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눈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는 녀석의 얼굴위로주먹이 내리꽂혔다.
”한숨자자.“
뻐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