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蓬 거래
호쾌한 타격음과 함께 녀석의 목이 휙 돌아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림자속에 몸이 들어간채로 고정이 되어있던 것이 독이었다. 충분한 기 가 실린 공격을 그대로 얼굴로 받아낸 녀석은 두꺼운 몸이 무색하게도 채 한 방을 견디지 못하고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기절하고 말았다.
“식겁했네.”
시 간만 놓고 보면 일방적 인 승리라고 볼 수 있다. 허나, 백우진은 짧은 시 간 동안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위 기감을 느꼈다.
“여 기에도 있었나, 영계 (影界)를 넘나들수 있는 녀석이.”
판타지 세계에서는 그들을 그림자 일족이라 칭했다.
그들은 날 때부터 아주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태 어나는데, 눈앞의 녀석처 럼 그림자 속으로 제 몸을 숨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그림자 일족은 과거 한 왕에게 중용 됐던 적 도 있었으나, 그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이종족들에게 박해 당하며 살아왔 다.
그들이 지니고 태어나는 능력이 제 목숨을 언제 앗아갈지 모른다는불안 감이 만든 멸시와 차별이었다.
그로 인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아와야만했던 그림자 일족은 마왕이 중 간계를 침입하자, 곧장 마왕의 편에 붙어 용사였던 그의 목을 노리는위협적 인 칼날이 되었다.
“진짜 애먹었지, 그땐.”
그때를 떠올린 백우진이 몸을 가볍게 떨어댔다.
그들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그림 자만 드리운 곳이 라면 언제든지 나타나 그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단검을 휘둘러댔다.
덕분에 마왕성 근처에 다다랐을 즈음부터 밤에 편히 잠드는 것은 고사하 고, 하루 내내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녀석들의 습격을 대비해야만 했다.
수없이 많은 시련들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했던 그에게도 그때 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치고, 괴로운 나날들이 었 다.
쳢 적이 된다면 곤란한데 …:
백우진은 조금 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 녀석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올 렸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 |..
!.
새하얗던 손톱과 손끝이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감 전된 것처럼 저릿한 감각과 통증이 느껴졌다.
“이래서 싫다니까.”
용사였던 시절, 무려 한 달을 그림자 일족에게 시달리며 살았다.
밤낮으로 날카롭게 세운 감각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믿고 있었던 선 을 부수고 나아가 새롭게 성장했고, 정신은 미치기 일보직전에 달했다.
이대로 가면 마왕을 대면하기도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녀석들을 상대할 대응책을 찾기 위해 모든 수를 강구했다.
해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녀석들이 발을 들여놓는 그림자 속에 자신 또한 발을 담그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이 해답을 도출해내기까지 수많은 실험과 고통이 뒤따랐다.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는 녀석들을 끊임 없이 관찰한 끝에 그 또한 그림자 속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게 되 었다.
그곳은 단순한 그림자 속이 아니 라, 현실을 짙은 회 색빛으로 투영해낸 하 나의 세계였다.
그는 이를 영계(影界)라고 칭했다.
어떻게든 그곳에 발을 들여놓게 된 후, 그림자 일족을 상대하는 일은 무척 이나 쉬워졌다. 제 능력만 믿고 당당하게 그림자 속을 유영하여 다가오는 놈 들을 기 다렸다가 푹 찍어버리 면 그만인 일이 되 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후폭풍도 상당했다. 영계의 짙은 회색빛은 그곳에 진입 한 살아있는 인간의 색채를 빼앗는다.
색채란단순히 피부의 색만을뜻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다채롭게 뿜어 내 는 감정 들을 송두리 째 앗아간다는 의 미 였다.
그곳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이는 그림자 일족이 유일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녀석은 반푼이인 것 같은데 ….”
그림 자 속에 서 나타난 녀석은 무감정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직 온전히 감정을 빼앗기지는 않은 듯했지만, 어느 정도 영계로부터 색 채를 빼앗긴 것으로 보였다.
그림자 일족과 인간의 혼혈쯤 되는 걸까, 아니면 이곳에는 영계에 넘나들 수 있는 특수한 무공이 라도 있는 걸까.
“어느 쪽이든 귀찮겠어.”
차라리 녀석이 당가에서 키우는 비밀 병기라면 좋겠다. 그렇다면 당가에 숨어든 쥐새끼들을 모두 색출하고 나면 적으로 싸울 일은 없게 될 테니.
하지 만 만약 녀석이 당가 소속이 아닌 다른 세력에서 키워낸 비밀 병기라 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더욱 지 난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 었다.
손끝의 감각은 무인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백우진은 내공을 끌어 올려 손끝을 물들인 회색 빛을 지워 냈다.
아주 잠깐만 담갔을 뿐인데도 막대한 양의 내공이 소모되 었다. 당시보다 훨씬 뒤처져 있는 경지 탓에 같은 시간을 담가도 침식되는 속도가 훨씬 빨라 진 것같다.
“조심해야겠어.”
당분간은 녀석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호리병을 열어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단전에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하는 내공을 느끼며 주먹에 그중 일부를 담아 진법이 펼쳐져 있는 벽을 향해 내질렀다.
퍼엉
그리 두껍 지 않은 벽 이 라 부수는 데 에 생 각보다 작은 소음이 뒤 따랐다. 이 정도면 멀리 떨어져 있는무사들에게 아슬아슬하게 들리지 않았을 수준이 다.
뚫린 벽 너머에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운을 실어 밝힌 눈으로도 좀처럼 그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킁킁!
개라도 빙의된 것처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백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냄새가 확나네.”
난다.
죽음의 냄새가.
수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고, 자신의 죽음 또한 준비 되어 있을지 모를곳이다.
“이 역겨운 할망구 빨리 효도 관광 보내드려야겠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쥐고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 백우진.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코끝을 찌르는 죽음의 냄새가 더욱 짙어 져만 간다.
“방공호라도 만든거야, 뭐야.”
계단이 끝도 없이 이 어진다. 조금 전 안력을 돋워 보았을 때 끝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 가 아니 라 그만큼 깊게 내 려 가야만 하기 때문이 었음을 깨달은 백우진이 놀란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공간인 만큼 적이 습격 해오기 가장 적합한 곳이라 한껏 끌어올린 긴장감이 무색 하게도 내 려 가는 내 내 주변엔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이러면 숨은 쉬어지나.”
땅을 얼마나 파고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인력을 동원했 을까.
크게 돋군 안력에 비로소 계단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
수많은 계 단을 내 려 도착한 바닥에서 , 그를 기 다리는 것은 길게 늘어진 복도였다.
그 끝에는 딱봐도 무척이나 단단해 보이는 쇠문이 굳게 닫혀 있다.
걸음을 재촉하여 쇠문 앞에 다다른 백우진은 쇠문에 손을 대보았다.
“이건안되겠다.”
지금 경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자른다.
판타지 세계의 미스릴과 비견되는 만년한철이 약간 섞인데다 무식하다 싶 을 정도로 두껍다.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벽력탄을 터뜨려도 생채기 조금 나고 말 것 같다.
이 걸 자르기 위해선 최소 검 강 비스무리한 거라도 있어 야 하고, 완벽하게 일합에 잘라내기 위해선 완벽한 검강이 필요하다.
“어쩔수 없지.”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확정됐다.
남은 방법은 정중하게 출입을 요청하는 것뿐.
내공을 실은 주먹으로 쇠문을 두드렸다.
콰앙! 쾅!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잠깐만 문 좀 열어주세요!
그렇게 수십 회쯤 두드렸을까.
그그긍!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던 쇠문이 요란한소리를 내며 그 속 에 감춘 것을 천천히 내비쳤다.
세상에 미친놈은 많다. 판타지 세계에서도 같은 인간을 상대로 비인간적 인 실험을 자행하는 미친 과학자들의 실험실은 몇 번이고 본 적이 있다.
허 나 그 어 떤 미 친 과학자의 연구실도 이보다 참혹할 수는 없으리 라.
그 증거로, 쇠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 백우진의 동공이 일순 크게 흔들렸다.
목불인견(目끱忍見).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참혹하다는 말로 도 모든 걸 담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쩌면, 이곳이 인세에 강림한 지옥은 아닐까싶을 정도.
수십, 수백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투명한유리관이 넓은공동에 가득했다
•
그곳에 들어 있는 것은 온갖 동물들이 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간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내장이 전부 헤집어진 시체, 피부가검게 물든시체, 겨드랑이 사이에 다른 이의 팔두 개를 붙여둔 시체, 인간의 상체에 말의 하체를 강제로 꿰맨 시체
인간의 솟구치는 창의력이 절대 향해선 안될 곳으로발휘된 참혹한현장 을 보며, 구역질을 참아내느라 몇 번이고 속을 다스려 야만 했다.
“홀홀,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구먼.”
그 속에서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력 을 돋운 후에 야 드러 난 공동의 끄트머 리 에 휘 황찬란한 의 자가 하나 놓여 있다. 그리고 그곳에 기괴한 문양이 잔뜩 그려진 가면을 쓴 노파가 앉아 이 쪽을 향해 새하얀 손을 휘 적 거 리고 있었다.
하나둘씩 시체들을 지나 앞으로 걸어 나아갔다.
“반갑습니다, 옥면신룡.그대는 당선영 아가씨를구하러 온 게지요?”
처음본사람처럼 인사를 건네는 수석 장인 진미연.
백우진은 가면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을 보았다.
‘진짜네.’
똑같았다.
객당에서 자신을 시중들던 젊고 아리따운 시녀의 눈동자와 눈앞의 눈동 자가.
허나 이를 아는 체할 이유는 없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비밀은 하나라도 더 간직 하고 있을수록 자신의 패 가 되는 법 이 니 .
“그대가수석 장인인가.”
“홀홀, 그렇습니다.”
백우진은 흉흉한 기세를 피워 올리며 그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당 소저 내놔.”
웬만한 강심장도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주저앉아 가랑이 사이로 실금을 토 해냈을 기세에도, 진미연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우진이 시큰둥한표정을 짓고 서 있자, 수석 장인은 제 의자 옆에 있던 커 다란 단추를 꾹 눌렀다.
덜컹
그러자 그녀의 우측 대각선 뒤편에 있던 벽이 돌아가고, 반대쪽 벽면이 드 러났다.
“••••••!”
그곳엔 당선영이 쇠사슬에 꽁꽁묶인 채로 매달려 있었다.
“당 소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미동도 없던 그녀가 백우진의 음성에 반응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는 참혹한광경 속에 올곧게 서 있는 백우진 을 보았다.
“백..., 우진....”
무어라 더 말을 하고 싶은데 고개를 드는 것조차 힘겨워 좀처럼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홀홀홀!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저와, 거래를하시겠습니까?”
마음 같아선 저 노인네의 목을 붙잡아 그대로 부러뜨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 만 칼자루는 상대 가 쥐고 있는 상황이 다.
“조건을 말해.”
백우진이 당장 할수 있는 건 진미연이 마련해둔 거래에 응하는 것밖에 없 었다.
“당선영 아가씨는현재 매우불안정한상태랍니다.조금만더 시간이 지나 면 아가씨 체내에 물든 미약이 온몸에 퍼지게 될 테지요.”
미 약의 기본적 인 효능은 상대 방을 성 적으로 흥분시 키는 것이 다. 하지 만 뭐든지 과한 것은독이 되는 법이다.
그녀의 체내를온통 물들일 정도의 미약이 일시에 몸에 퍼져나가면 그 끝 은두 가지다.
미약에 완전히 절여져 반쯤 정신이 나가남자의 양기를 탐하며 살거나, 폐 인이되거나.
어느 쪽이든 맞이해선 안될 결말이었다.
“아가씨 께 해 약을 드리고 놔드리 겠습니 다. 또한 다시는 건드리 지 않겠다 고 약속드리지요.”
진미연이 거래 조건을 내놓았다.
“그대신,백우진 공자께서 제 실험체가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자아, 어떠십니까.
간단한 이 야기 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시이발…, 당했네.”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당선영을 구태여 이곳까지 데리고 온 것은 그녀를 다시 한번 실험체로 쓰려던 게 아니었다.
그녀는 인질이 었던 거다. 자신을 이곳까지 유인해내 기 위한.
“아,안돼….절대 응하지 마…!”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으로 애달픈 소리를 자아내는 당선영을 일별한 백우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미리 알았다고 한들 답은 없었을 것이 다. 함정 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 신은그녀를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직접 걸음했을 테니.
짧은 고민 끝에 결심을 내린 백우진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 는 진미연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삼시세끼 술과함께 거하게 차려준다면 응하도록하지.”
“홀홀홀!”
“아, 아아…!”
두 사람의 음성으로부터 기쁨과 비탄이 교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