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화〉탈출
경지에 이른 환검은 상대의 오감을 장악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예로 들 수 있다.
화산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나무를 보며 창안한 이 검술은 일정 경지에 도 달했을 때 검 이 지 나간 자리 마다 매화 향기 가 남게 된 다.
화산파에서는 이를 두고 검향경(劍香境)이라 칭한다.
고작 향기가 전투에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겠냐 말할 수도 있다. 허나, 이 향기가 전투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안정적 인 향기는 긴장감을 해소하고,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 다준다. 효과 자체만 놓고 보면 무척 이로운 것 같지만, 이 향기를 내뿜는 순간이 치열한 전투가 벌 어 지는 순간이 라는 것이 다.
적절한 긴장감을 전투를 이끌어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그런데 이 긴장감이 원치도 않는 상황에서 풀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크허 억…!”
그 답이 백우진의 주변에 펼쳐졌다.
공동을 경비하는 그림자 일족 열 명 중 여덟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그들 의 조장이 었던 중년의 사내 또한 지금 막 무릎을 꿇었다.
“어휴,오랜만에 몸좀풀었더니 개운하네.”
마혈을 제 압당한 채 바닥에 널부러진 조장은 황당하다 못해 어 이 가 없을 지경이었다.
‘대체 저 괴물은 뭐란 말이냐.’
일족의 젊은 친구들이 모인 탓에 그 경지가 일류 상위에서 절정 초입에 불 과했다지만, 그들은 하나하나가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암살자다.
그런 이들을 단숨에 깨부수고 하는 말이 고작 몸이 개운한 정도라니.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빠득!
‘최악의 상황이다.’
온갖박해에 시달린 일족은실패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대규모로 밀고 들어온 적도 아니고 고작 한 명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전 한다면 부하들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의 죽음은 거의 확정적이라 봐야 했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
조장은 백우진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놈은 분명 문을 열고자 할 터.’
실험실의 문은 기관진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문 옆에 설치된 아홉 개의 단 추를 정해진 순서대로 누르지 않으면 열리지 않게 되어 있다.
이 문을 열 방법을 알고 있는 이는 이곳의 주인인 진미연과 당연신, 그리고 자신들뿐.
또한 문을 여는 단추를 잘못 누르는 순간 이곳과 연결된 외부 비처에 경보 가울리고, 외부에서 열리기 전까지 내부에서는문을 열 수 없게 된다.
실험실이 망가진 순간부터 처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백우진을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적 어도 죽음만은 면할 수 있으리 라.
“십영(十影)!”
그는 백우진에게 당하지 않은 유일한 일족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개폐기를 차단해라!”
단 한 순간의 틈을 노리 기 위 해 그림 자 속에 숨어 상황을 모두 지 켜보고 있던 그녀, 십영은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기회라고 생각해 단검을 손에 쥘 때마다눈이 마주쳤다. 여덟이나되는 일 족과 싸우는 와중에 도, 그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를 주시하고 있었어.’
그가 하고자 마음먹었다면 자신 또한 다른 일족과 마찬가지로 산산조각 이 나흩뿌려진 실험체들 사이에 널부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는 것은.
‘그때의 얘 기 가 아직 유효하다는 의 미 일까.’
사로잡힌 포로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편을 만들기 위한 헛소리에 불 과하다고 여겨 단호하게 거절했던 그 제안이, 지금은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 이 흔들어댔다.
‘석아….’
지금도 진미연의 그림자에 숨어 조금씩 빛을 잃어가고 있을 동생의 이름 을 속으로 불러본다.
희미하게 남은 감정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내거는 것이 과연 맞는 길일 까.
고민이 깊어질 무렵, 백우진의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숨이 붙어있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지.”
마치 자신의 고민을 이미 알고 있다는듯이 말하며, 그는 그녀가숨어 있는 그림 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맛있는 것도 먹고, 죽이는 술도 한 잔 마시고, 하고 싶은 일도 하고, 보고 싶은 건 보고.”
그래야 진짜 살아있는 거지.
“지금 네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게 가능할까?”
마교가 중원 무림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천하를 이룩하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행복해질수 있을까.’
거기까지 가는 길에 자신은, 동생은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살아남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그저 도구취급하는 이들의 밑에서 행복할수 있을까.
까만 먹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미래가 그려지질 않는다.
“십영! 뭐하고 있는거냐!”
우스꽝스럽게 쓰러진 채로소리치는 조장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개폐기를 차단할수 있을 리가 없지.’
이미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명확하게 보고있는백우진을 제치고 개폐기 에 도달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십 영은 그림자를 빠져나왔다.
싸우는 와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은 호리병이 그녀의 시야를 사로잡았다.
“…제게 그 술이란 것을 맛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지.술은나눠 마실 때 더 맛있는 거거든.”
그는 웃는 얼굴로 흔쾌히 대 답했다.
밖을 돌아다닐 자유를 빼앗기고, 음식의 가짓수를 빼앗기는 와중에도 강 짜를 부리며 지켜낸 술병이 었다.
분명 소중한 것일 텐데, 그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에게 호리병을 건네주었 다.
“십여어엉!”
또한번 다급한외침이 들려온다.
가뿐히 무시한채, 백우진을 향해 물었다.
“술이란 것을 마시면…, 복잡한 일도 명쾌해진다들었습니다.”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 없는 그녀 였다. 포만감과 만족감 같은 한때의 쾌 락이 복수로 벼려진 칼날을 무디게 만든다며, 일족의 어른들은 그것들을 매 우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작 본인들은 끼 니 마다 기 름진 음식과 비 싼 술로 배 를 가득 채 웠으면서.
반발심 이 일었다. 그녀는 곧장 호리병을 입에 가져가 술을 한 모금 들이켰 다.
쌉싸름한 맛에 인상을 찡그리는 십영.
“•••쓰군요.
백우진이 혀를 찼다.
“애송이구만.”
묘한 불쾌감을 느낀 그녀가 호리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제법 많은 양을 들이켰다.
뱃속이 화끈해지더니 머리가핑 돌기 시작했다.눈에 보이는 것들이 조금 식 비뚤어졌다.
“십영! 지금이라도늦지 않았다! 빨리 개폐기를…!”
“닥치십싀오.”
얼굴이 빨개진 십영은 돌맹이를 하나 주워 제 귀를 시끄럽게 만드는 조장 을 향해 냅다 던져버렸다.
뻐억!
“끄하악!”
조장은 쌍코피를 터뜨리며 침몰했다.
언제나 차분했던 감정이 이토록 날뛸 수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의 시선이 백우진에게로 향했다.
“당싄에게는빛이 납늬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검은 먹물을 들이부은 것처럼 캄캄했던 미래가 조 금씩 벗겨진다.
“정말…, 나와동생의 안식처가되어주싈 겁늬까….”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든지.”
백우진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죠습니다. 당신을 믿겠습늬다.”
꼬부라진 혀로 배신을 택했다.
“거, 일단운기조식을 좀하고 있어.”
백우진 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그녀 가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았 다.
“•••첫번째명이군요. 알겠습늬다.”
곧장 소주천에 들어가는 그녀를 보며 백우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술 깨고 나면 오리발 내미는 건 아닌가 몰라.”
..
설마그럴 리는 없겠지.
백우진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그림자 일족을 모두 모아 자신이 머물렀던 방 안에 모두 때려 넣고 문 역할을 하는 석벽에 온갖 무거운 것들을 쌓아두었다.
“대충 정리는 끝났고.”
앞으로 큰 힘 이 되 어줌과 동시에 문을 열 방법을 알고 있는 십영을 포섭해 두었으니 나가는 것은 마음먹 기 에 달렸다.
당장 문을 열지 않은 것은 이곳에서 확인하지 못한 숨은 공간이 몇 개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분명거기에 뭔가가 있어.’
진미연에 의해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음에도, 그림자 일족이 막아서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한 공간 중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으 리라.
좌측 석벽 윗부분을 주먹으로 때리자 그곳이 쑥 들어가면서 석벽 일부분 이 돌아갔다.
어 두컴 컴 한 공간이 드러 났다.
안력을 돋우며 안으로 들어서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 에 들어온다.
무척 이 나 두꺼 운 쇠 창살이 보인다. 그리 고 그 안에 는.
크륵!
크워어어!
마물들이 오랜만에 보는 인간을 향해 포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들을본백우진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실험은 이미 거의 성공했었던 건가.”
마물들은 백 우진을 향해 포효성 만 내 지를 뿐, 공격 적 인 태도를 보이 지 않 고 있었다. 성도에 들어서기 전에 보았던 마물들에 비해 한층뛰어난 자제력 이 엿보였다.
진미연에게 약간의 시간이 더 주어지면 거대한 재앙이 벌어질지도모른다
•
백우진은 쇠창살 너머에 서 있는 마물들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몇몇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공간이 무척 협소한 탓에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다음 생에는 이딴 세상 말고, 좋은 곳에서 태어나라.”
짧은 말로 명복을 빌어주며 그들의 시체 위에 술을 뿌려준 뒤, 그는 밖으 로 나섰다. 그리고 또 다른 공간의 문을 열어젖혔다.
대체로 비슷했다. 인간을 맞이함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차분한 눈빛을 내 비치는 마물과 마인들이 가득하게 쌓여 있었다.
“미친년, 미친년….”
그것들을 전부 처리한 뒤, 백우진은 포로일 적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찾 아낸 마지막 공간에 다다랐다.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거대한 쇠창살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또한 동일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응당 들려와야 할 마물의 포효성이 들 려오지 않았다.
기감을 활짝 열어둔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쇠창살 너머, 주렁주렁 매달린 두꺼운 쇠사슬들이 보인다. 얽히고설킨 그 것들은 한 방향을 따라 떨 어 져 내 려 갔다.
두꺼 운 쇠 사슬로 이 루어 진 둥근 뭉치 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 언뜻 살색 이 내비친다.
속도를 높여 앞으로 더욱 빠르게 나아갔다. 이윽고 쇠 창살의 앞에 도달한 백우진은보았다.
쇠사슬 뭉치 위로 빼꼼 내밀어진 사내의 얼굴을.
봉두난발의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낯익은 얼굴이었다.
“당연신….”
영 락없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진짜 당연신 이 쇠 사슬 속에 봉인되 다시 피 파묻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