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긴 밤(Clean Ver.)
자신의 어린 시절을 온통 지배하고 있던 진미연을 직접 처단하고 돌아왔 음에도, 당선영은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가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언제나 그랬듯, 그런 그녀를 위 로해주는 이는 유모였다. 그녀는 어딘가 한 껏 움츠러든 당선영을 위해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유모….
“네.,,
“나 이제 …, 다른 여인들처럼 행복해지면 되는 거겠지 ?”
“그럼요.”
진미연이 퍼부은 말들이 목에 막혀 좀처럼 넘어가질 않는다.
최근 들어 이 몸뚱어리가시한폭탄처럼 느껴진다. 언제 터질지 알수 없지 만, 언제고 꼭 터질 것만 같은 불안한 확신.
훗날 아주 중요한 순간에 이 몸이 백우진을 방해하면,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를 위험에 빠트린다면.
“불안하신가요?”
모든 게 불안했다. 앞으로 그와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언제 까지나 그가 자신을 아껴줄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 쌓여 불 안함이되었다.
“아가씨께 필요한 건 차가 아니 었던 것 같네요.”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마지 막 말을 남긴 채 유모는 어 디론가 사라졌다가 얼마 지 나지 않아 돌아 왔다. 다시 나타난 그녀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항아리를 양손으로 받든 채였 다.
그녀는 항아리를 당선영의 앞에 내려놓았다. 당선영의 예민한 후각이 항 아리로부터 새어 나오는 냄새를 맡았다.
“이건…, 술 같은데.”
“맞아요. 술이랍니다.”
사뭇 놀란 표정으로 유모를 바라보는 당선영. 그도 그럴 것이, 한평생을 함께 해왔지만 그녀 가 술을 가져다 준 적은 처음 있는 일이 었기에 .
“자, 이걸 보시겠어요?”
그녀는 항아리를 옆으로 돌려 반대쪽 면을 당선영의 앞으로 돌려놓았다.
그곳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여아홍(女兒紅).
진나라 때부터 전해 내 려오는, 여아가 태 어났을 때를 기념하여 빚는 술이 었다.
“아가씨가 태어나던 날, 가주님께서 직접 빚으신 술이랍니다.”
“아, 아버지께서?”
“예. 아가씨께서 태어나신 날, 가주님께선 절망하신 한편으론 무척 기뻐하 셨지요.”
실험체로 쓰일 운명이기에 한없이 통곡하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여쁜 자식이기에 기쁘기 한량없었다.
널뛰기하듯 번갈아 솟구치고 가라앉는 감정 속에서 당연신은 아주 깊은 밤 홀로 술을 빚었다.
날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제 딸아이가 스스로 장성하여 언젠가 이 술을 꺼 내 어 마실 수 있기를 간절히 희 망하며.
“우연찮은 계기로 가주님께서 이곳 커다란 나무 아래에 직접 땅을 파 항 아리를 묻으시 는 걸 보고 말았지 요.”
유모의 존재를 알아차린 당연신은 그녀에게 이 사실을 함구할 것을 명령 함과 동시에 어찌 보면 잔인한 부탁을 건넸다.
평생토록 딸아이의 곁을 지켜줄 수 있겠느냐고.
“•••또한 아가씨께서 장성하셨을 때 비로소 이 술을 꺼내어 건네달라고 제 게 부탁하셨어요.”
비화(苞話)를들은 당선영의 반응은무덤덤했다. 기억이란것이 남기 시작 할 무렵엔 이미 진짜가 아닌 가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부녀의 정이란 덧없는 것이 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안도했다. 진짜 아비는 다행히 자신을 진정으로 사 랑하고 있음에.
유모는 단단하게 막아둔 항아리의 입구를 열었다. 그러자 인세의 향기라 곤 믿을 수 없는 그윽한 향이 방을 가득 메웠다.
그녀는 그것을 조금씩 떠 서 호리병에 나누어 담았다. 그리고 술이 꽉 찬 호리병의 마개를 닫아 당선영의 손에 쥐 어주었다.
“자, 이것을 가지고 직접 백우진 공자님께 가보셔요.그리고 직접 여쭤보셔 요. 불안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말이 에요.”
“이, 이 밤에…?”
그녀 가 소스라치 게 놀라며 부끄러워 하자, 유모는 그녀의 손을 잡고 강제 로 일으켰다. 그리곤 한쪽 눈을 찡긋, 하고 감았다뜨며 말했다.
“원래 역사는밤에 이루어지는법이랍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귀에다 대고 유모가 속삭였다.
“이제까지 배운 것들…, 오늘 다직접 써보세요.”
“유, 유모!”
“자아, 어서요.”
그렇게 그녀는 호리병 하나를 손에 쥔 채 제 방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고혹적 인 미소와 매혹적 인 말투로 백우진의 시 선을 한껏 끌어 당긴 것과 는 반대로, 방 안에 살포시 내려앉는 그녀의 몸짓은 수줍은 처녀의 모습 그 대로였다.
당선영은 방을 환하게 밝히는 촛불들을 굳이 다 꺼버린 채, 하나만을 남 겨두었다.
은은한 불빛 속에서 그녀는 긴장을 조금 가라앉히며 신줏단지 모시듯 소 중히 품에 안고온 호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뽕!
청량한 소리와 함께 짙은 향기가 넓은 방에 가득 퍼졌다.
그윽한 술의 향에서 은은한 과일의 향기가 느껴졌다. 맡고 있기만 해도 단 단히 틀어쥔 표정이 속절없이 풀어져 나른해지게 만드는 기분.
쪼르르!
작은술잔에 술을 담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나 태어 나던 날 빚은 술이래.”
백우진은그제야 이 술의 향이 자신의 호리병에 담긴 신선이 빚은술보다 그윽하고, 진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아홍(女兒紅).
부모의 온갖 바람과 세월이 담긴 술이니, 설령 신선이라 할지라도 이 술에 는 한수접어줄수밖에.
“진미연을 죽였어.”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내게 그러더라. 이 몸뚱어리가나는물론이고, 너도파멸로 이끌 거라고.”
술잔을 만지 작거리 며 시 선을 마주치 지 않던 그녀 가 용기를 내 어 고개를 들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아서…, 네게 물어보려고 왔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는 두 눈동자가, 고요한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백우진의 눈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네 곁에 있어도 되는지, 날 평생 사랑해줄 수 있는지 ….”
연인 사이에 나누어 봤자 하등 쓸모없는 물음들 뿐이 었다. 현재의 두 사람 이 아무리 사랑을 말하고, 영원을 논한다 한들, 미래의 두 사람은 어떻게 될 지 스스로도 모르기에.
그럼에도 인간이란 그러했다.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한때의 거짓말일 수도 있음을 능히 짐 작하고 있으면서도 원하는 답을 듣고, 찰나에 찾아오는 안락함에 눈을 감을 수 있기를 바란다.
“••••••.”
백우진은 말없이 술잔을 쥐 었다. 끝을 모르고 계속해서 퍼뜨리는 그윽한 향을 한입에 머금고 음미했다.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까지. 각기 떼어놓으면 독특한 것들이 한데 모여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윽한 향을 가듬 머금은 채, 백우진은 작은 상을 옆으로 치우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경직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앞으로 나아가자, 그녀의 가녀 린 신형이 뒤로쓰러졌다.
입에 머금은 여아홍을 그녀의 입에 흘려보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당선영은 입에서 느껴지는 그윽한 맛과 향을 느끼며 서서히 안정되어 갔다.
츄릅, 츈.
가벼운 입맞춤은 더욱 그 농밀함을 더해갔다. 서로의 입 안으로 혀가오갈 때 마다 더욱 야릇하고, 적 나라한 소리 가 적 막을 두드렸다.
한참 뒤에 입을 떼어낸 백우진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짙은 미소를 그 리며 말했다.
“이미 한번 들었을 텐데. 난내 손에 쥔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말.”
그녀의 눈이 동그래 졌다. 그것은 분명 모두가 잠든 사이 자신이 아닌 제 갈 연지와 나눈대화에 포함되어있는 말이었다.
그 말인즉, 백우진은 그때 자신이 깨어 있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 다.
“•••알고 있었니?”
“그토록 부스럭대는데 모를 수야 있나.”
“그, 그랬구나.”
살짝 부끄러운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려는 그녀의 볼을 붙잡아 시선 을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그걸로 충분한 것 같고, 남은 건 두 번째 질문인 가.”
백우진은 제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호리병을 꺼내어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
“이 호리병의 술이 완전히 마르는 날까지 사랑하는 걸로 하자고.”
..
!....
........
그녀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고작 그 정도?”
호리병의 비밀을 모르는 그녀에게는 그것이 턱없이 작게만 느껴진 것이다 •
“고작이 아닐걸.”
백우진은 가벼운 허공섭물을 이용하여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대접을 끌 어당겼다.그리고 호리병 마개를 열어 대접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대접을 절대 채울수 없는크기의 호리병에서 술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 다. 대접을 가득 채우고도 계속 나와 백우진이 마개를 다시 닫았을 정도.
믿기 힘든 광경을 본 그녀의 얼굴이 참으로 볼 만했다.
“보패야.”
“•••신선들이 가지고 다닌다는 그 전설의 물건을 말하는 거니?”
“응.그것도 주선(酒仙)의 보패지.”
선계에 있는 주선의 술 창고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이걸 믿 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그가 재차 묻자, 그녀는 살포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충분해.”
그렇게 말하며 제 볼을 잡고 있는 백우진의 손을 덥석 붙잡아 제 가슴 위 에 올려두는 당선영.
“말은 충분하니까, 이젠 직접 보여주렴.”
사뭇 여유 있는 표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풍만한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 이 심장 박동은 그녀가 무척이나 긴장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심지에 불이 붙었다.
애써 잠재워둔 욕망이 깨어나 활개를 친다. 당선영 또한 제 온몸을 향해
부딪혀오는 그의 욕망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며 서서히 본능을 일깨웠다.
엎치 락뒤 치 락 짓누르고 짓눌리 던 두 사람.
“내,내가졌어. 졌으니까…!”
동이 틀무렵까지 이어진 긴 밤의 끝.
패 배 자는 당선영 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