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蓬 후폭풍
여명과 함께 성대한 절정을 맞이한 당선영은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쌔근거리며 곤히 잠든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백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위,위험했다….”
정신력으로 거머쥔 승리였다. 이를 증명하듯, 고작하룻밤 사이에 눈빛은 퀭해지고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볼이 홀쭉해졌다.
지난밤의 흔적을 꼼꼼하게 지워낸 뒤, 백우진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호 리병을 쥐고 밖으로 나와 마루에 걸터앉았다.
때마침 떠오른 해가 내리쬐는 빛이 마당을 서서히 밝게 물들여가는 중이 었다.
“크으.,,
짜릿한 표정을 짓는 백우진.
여인에게 극한의 만족감을 선사하고 맞이하는 아침 햇살, 그야말로 사내 의 낭만이 아닐까.
기분 좋은 얼굴을 한 채로 술을 들이켰다. 흥분할수록 그녀의 체향에 섞여 나오는 미 약의 농도가 짙어진 탓에 이를 막아내느라 내공이 거의 바닥을 드 러낸 상태였다.
“휴우!”
피로가 가득 쌓인 몸에 술까지 들어가자 그야말로 전신이 나른해지는 기 분. 그와는 반대로 정신은 더없이 개운한 느낌이다.
서서히 차오르는 내공들이 곧장 단전 밖으로 나가 몸에 가득하게 쌓인 피 로를 풀어 내 기 위해 스스로 움직 임을 자처 한다.
“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음주선공의 효능인지, 아니면 남들과는 달리 선기가 섞인 내공이 지닌 특별한 효능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부터 술 마시면서 해야겠다.’
거사 중간중간에 술 마시는 시간을 안배한다면 절대 패배하지 않으리라.
“흐흐흐I” 1 1 1 •
다음에 있을 거사를 생각하며 음흉한 웃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
!.
....
“•••좋냐?”
별 안간 지 붕에 서 소리 가 들리 더니 , 동화에 서 나오는 신선 마냥 백발, 백 염 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심지어 흰 의복을 입고 백우진의 앞에 사뿐히 내려 섰다.
“•• ”
해를 등진 채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노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당장에라도 칼부림이 날 것만 같은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 고 올라왔다.
외형적으로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무저갱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까마득 한경지가그의 정체를짐작케 했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백우진은 곧장 마당에 무릎을 꿇으며 그에 게 큰절을 올 렸다.
“장인어르은!”
“닥쳐라, 이노옴!”
노기를 띤 음성과 함께 도의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 피해선 안 될 것만 같은 주먹이 날아들었다.
퍼억
“억 |”
진짜 장인어른의 등장이 었다.
…
분노한당연신에게 몇 대 쥐어 터진 백우진은그의 뒤를 따라 가주전에 도 착했다.
“허허, 참.”
자리 에 앉은 그는 허 탈하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생긴 모습은 영락없이 선풍도골의 상인데 그 안에 화가 가득하게 쌓여 있 는 게 보인다.
‘잘못하면 뼈도 못 추린다, 이거.’
썩 어도 준치라고, 제법 오랜 세월 동안 쇠사슬에 칭칭 감겨 몸 상태가 최 악에 가깝다고 한들, 화경은 화경이다.
심지 어 자신 또한 당선영과의 거사로 인해 체 력 이 많이 상한 상태 가 아닌 가. 잘못 깝쳤다간 자신은 죽고, 그녀는 과부가 될지도 모른다.
“십수년 만에 딸아이 얼굴좀보려고했더니,허허.”
백우진은 더욱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죄인이지….’
무려 십 년이 넘도록 가짜에게 삶을 빼앗긴 채로목숨만 연명하다가 겨우 깨어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년이 된 딸아이 얼굴을 좀 보려 했더니 웬 놈팽 이가 홀라당 잡아먹고 있으니.
‘나같아도 못 참지, 이건.’
그가 자신을 때린 것은충분히 합법적인 일이었다. 아니, 살수를 펼치지 않 은 걸 감사히 여겨야 할지도.
“후우.
그가 한숨을 푹 내쉬 었다.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었다.
“자네가나를구했다지.”
“예,장인어른!”
힘차게 대 답하자, 당연신은 제 이마에 도드라지 게 솟은 핏줄을 매만지 며 말했다.
“그…, 장인어른이란 말은 그만하게. 내 잘하면 자네에게 만천화우를 펼 칠지도 몰라.”
“예,가주님!”
일단 죽음은 면하고 봐야 했다.
“일단날구해준 것은고맙게 생각하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대체 얼마나 더 오래 그곳에 붙잡혀 있었을지 ….”
몸서리를 치는 당연신.
백우진은 깊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저어, 뭐하나만 여쭤도…?”
“말해보게.”
“이런 말씀을 드려도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자들이 왜 가주님을 살려둔 건지 아십니까?”
그로서는 마교도들이 이미 당가 대부분을 점령한 마당에 당연신을 사지 멀쩡하게 살려둔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무리 삼엄한 경계 속에 가둬 두었다곤하나, 지금처럼 만에 하나가 있는 법 아닌가.
당연신은 길게 자라난수염을 매만지며 백우진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놈들의 놀라운 역용술을 보았겠지.”
“예.”
“내 추측하건대, 그들의 역용술은 변신하려는 대상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은게 아닐까싶네.”
십수 년이 흐른 지금은 기력이 거의 쇠하여 쇠사슬에 감겨 있는동안 대부 분의 시간을 정신을 잃은 채 보냈으나, 처음 붙잡혔을 때에는 정신이 또렷한 상황이었다.
마와 관련된 것에 극도로 혐오감을 보이는 독왕은 녀석들에게 온갖 욕이 란 욕은 다 퍼부었더랜다.
이를 참지 못한짭연신이 당연신의 목을 강하게 움켜쥔 적이 있었는데, 그 가말하길.
“수석장인이 헐레벌떡 달려와 녀석을 막더군. 일을 그르칠 셈이냐면서 말 이야.”
그때 자신을 해할 수 없는 모종의 이유가 있음을 짐작한 당연신은 더욱 신 나게 욕을 퍼부었고, 이를 참지 못한 진미연이 약을 조합하여 그를 잠재웠다 고한다.
“난그 모종의 이유가 역용술에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네.”
“•••확실히 가능성이 있겠군요.”
변하려는 상대가 온전히 생존해 있어야 가능한 역용술이라.
제약과 그에 따른 확실한 효과. 이를 떠올린 백우진은 이를 어디선가 경험 한 적이 있는 듯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떠올리려 애썼지만쉽게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자네가당대의 신룡이라고.”
당연신의 말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백우진을 일깨웠다.
“예 猌 아, 예. 옥면신룡이라는 별호를 받았지요.”
“이름값 제대로 하는 별호구먼.”
탐탁지 않은 시 선 속에 서 느껴 지 는 것은 묘한 질투였다.
‘난놈이긴하군.’
사내 가 봐도 혀를 내 두르게 만드는 잘생 긴 얼굴이 자아내는 질투를 걷어 내고 보면 백우진이 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군계 일학(群鷄銜鶴)이 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사내였다.
수십 년에 걸쳐 당가에 잠입한 마교도를 뿌리채 뽑아버린 것만봐도 능력 이 출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일도 잘하는듯하고.’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당가가 자네에 게 아주 큰 은혜를 입 었네. 내 이에 대한 보답은 두고두고 하지.”
“아유, 아닙니다.”
외가가위험에 처했는데 당연히 나서야지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
“하지만 그것이 자네를 사위로 인정하겠단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
“•••예에.”
좋다 말았다.
“자네가 딸아이의 당금패를 가지고 있다지 ?”
“예예….”
“이리 줘 보게.”
백우진은 품에 소중하게 넣어둔 당금패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를 건네받은 당연신은 검지에 기를 실었다.
유형화된 기운이 그의 손끝에 단단한 형태를 이루어냈다. 강기의 발현이 었다.
그는 강기 가 어린 손가락으로 당금패의 가운데 에 은(恩)이 라는 글자를 덧새겼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백우진에게 건네주었다.
“가문을 구해주었으니 당금패로도 그 은혜가 모자랄 터. 그 패는 오로지 자네만을 위한 새로운 패일세.”
그가 말을 이었다.
“당가의 권역에서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보여주고 뭐든 요구하게. 가 문의 기둥을 뽑는 일만 아니라면 뭐든 들어주라고 일러둘 테니.”
“헉.”
파격적인 보상에 백우진이 곧장 그 패를 당연신의 앞에 내밀었다.
“그럼 따님을 제게 주십시오!”
“••••••.”
스스로 매를 번 백우진은 추가로 몇 대 더 얻어터진 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뒤 가주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눈탱이 하나를 시퍼렇게 물들인 채로 객당으로 터덜터덜 돌아온 백우진 은 담벼락 아래에 기대고 서서 애꿎은 흙을 툭툭 파고 있는 제갈연지를 보았 다.
때마침 고개를 들어 올린 그녀 또한 백우진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빠 른 속도로 달려와 그의 얼굴을 감싸쥐 었다.
“배,백 공자! 어, 얼굴이 …!”
“하하…, 영광의 상처랄까….”
“아,안아파요…?”
마음에 온통 자신에 대한 걱정만을 채운 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응시 하며, 어젯밤그녀가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 많이 하면 뼈 삭는다고 했던 말이.
“제갈소저.”
“네…?”
“그,음…, 내가말이야. 어제….”
그녀는 자신이 당 소저와 거사를 치룰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 다. 허나 알고 있었냐는 물음보다 했다는 말로 스스로 고백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아 이 야기를 꺼 내 려 할 때였다.
“알고…, 있어요.”
그녀가 백우진의 입을 막았다.
“어제 당소저가저를 찾아왔었어요….”
들이닥친 흉사로 인해 가문이 한창 어수선할 때, 얼굴을 보기 힘들 거라 생 각했던 당선영이 신룡조가 머물고 있는 곳까지 찾아와 제갈연지를 따로 불 렀다.
옅은 피 냄새를 풍기며 찾아온 그녀는 제갈연지에게 의외의 말을 꺼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자고…, 했어요.”
서 로가 백 우진을 좋아하고, 백 우진은 두 사람 모두를 품에 안을 것 이 라는 걸 알고 있다. 허나두 사람은 지금까지 모른다는 듯이 서로를 대했다.
당선영은 더 이상그러지 말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제갈연지도 이를수긍 했다. 이미 밤중에 그에게 고백을 받았고, 자신은 이에 응했으니, 그녀 또한 언제 가 됐든 이 에 대한 이 야기를 허심 탄회하게 꺼 내고 싶다고 생 각할 때였 다.
문제는 이후의 이야기였다.
“당 소저 가… , 오늘밤 백 공자와 초야를 치 를 생 각이 라고 얘 기 를 ….”
그녀는 당당하게 이야기를 꺼냈고, 제갈연지는 이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처음이 라는 건 특별한 의 미 가 있는 법 이 다. 자신의 처음은 물론이고, 제 가 좋아하는 사내 또한 처음이기를 바라는 건 그렇게 큰 욕심은 아니리라.
제갈연지는 이를 극구 거부했다. 그를 만난 것도 자신이 먼저였다. 그러니 초야를 치르는 것 또한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나, 이윽고 건네 오는제안이 그녀의 구미를 당기게 만들었다.
“무슨 제안?”
궁금함을 참지 못한 백우진이 묻자, 제갈연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제 얼 굴을 옆으로 휙 돌리며 대답했다.
“여,여자들만의비, 비밀이에요.”
“••••••.”
“아, 아무튼! 이미 저도동의한 일이니까…, 혹여 미안한 감정 같은 건 안 가져도 돼요….”
백우진이 당선영과 뒹 구는 모습을 상상하면 지금도 죽도록 아쉽 고, 후회 되 지 만 그녀는 이 일을 십 보 전진을 위 한 일 보의 후퇴 쯤으로 생 각하기로 했 다.
백우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벌벌 떨었다. 이를 본 제갈연지가 의아 한 눈빛으로 그의 소매 를 살짝 쥐 었다.
“백 공자…,왜 그래요…?”
“제갈소저어!”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한 백우진이 달려들어 와락 껴 안았다.
“히잇…!”
제 품에서 빳빳하게 굳어가는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찌 이리도 현명한 여인이란 말인가! 역시 제갈세가는 다르구나!
거사를 치를 때만 해도 행복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제갈연지의 존 재를 떠올린 이후부터는 그녀에게 어떤 말로 상황을 설명해야 하나 고민
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 다.
그 고민을 단숨에 풀어주었으니 고마울 수밖에.
“내가평생 행복하게 해줄게, 임자!”
“이,임자…, 히으응….”
치사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삭임에 제갈연지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