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116화 (116/215)

<116 화〉신녀

다짜고짜 달려든 것은 여인이었다.

꼬질꼬질하게 때가묻은 얼굴을 백우진의 가슴 앞섶에 비비며 눈물을 흘 리는여인.

“왜 이제야오세요오오! 제가얼마나, 얼마나…!”

뿌에 에 에 엥 , 하고 재 차 눈물을 터 뜨리 는 그녀 를 보며 백 우진은 고개 를 갸 웃거렸다.

묘하게 낯이 익다.그런데 기억 속에는 없는 얼굴이다.

‘영웅님…, 이라고 했던가.’

묘한 칭호였다.

백우진이 난감하다는 듯,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백 공자…, 그여인은 또 누군가요.”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서늘한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제갈연지가세상무서운 얼굴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커다란오해를하고 있는게 분명하다.

“나도몰라!”

백우진이 손사래를 치며 억울하다는 듯 소리치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 누 그러들었다.

오해는 생겼을 때 바로 풀어내지 않으면 더 큰 위 기를 불러들인다.

뭐 가 그리도 서글픈지 끝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억지로 품에서 떼어 내며 물었다.

“소저는 누구요?”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훌쩍대던 여인은 때 묻은 손으로 제 눈가를 스 윽 닦아냈다.

“저, 저는 현천문의 …, 히끅, 39대 문주이자신녀에요….”

“…… ”

그래서 그게 뭐냐고.

“•••누구아는 사람?”

백우진은 조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하나 같이 입을쩍 벌리고있는모양새를보니그녀 가말한 단어 에서무언 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뭔데.,,

왕따 당하는 기분이다.

재차 되물었으나그들은 여전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참다 못한 백우진 이 그나마 가장 건드리 기 쉬운…, 이 아니 라 가장 친근한 구왕수의 정강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뻐억

“억 I”

정강이를 움켜쥔 채 주저앉는 구왕수를 보며 백우진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이 친구가 뼈가 약한가 보다.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을 시켜주는 수밖에.

“너 뭐 때문에 그렇게 놀란 거냐?”

“혀, 현천문이라잖아.”

“그게 뭔데.”

웬만큼 유명한 문파라면 백우진의 기 억 에 라도 남아 있어 야 하는데, 아무 리 떠올려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당당하게 물으니 이쪽을 쳐다보는 구왕수의 시선이 아주 오묘했 다.

“너…, 영웅지성 (英雄之星)이라는 동화 안 읽어봤어…?”

“동화?”

“어…,우리 어릴 적에 부모님이나 유모가많이 얘기해주잖아.”

백우진은 이 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뛰어난 무재라며 제멋대로 기대하여 밀물처럼 몰려들었다가 또 제멋대로 실망하여 썰물처럼 빠져나간 가문 사람들의 면면들이 보인다.

그들의 기대에, 실망에.

자의와 타의 가 뒤섞인 검을 휘둘렀다.

홀로 수련장에서 계속.

기분이 나빠졌다. 요령도 모르고 저 혼자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음에 들 지 않았다.

“난 잘모르겠으니 현천문이 뭔지 간단명료하게 설명해봐.”

구왕수의 감각들중 가장 많이 발달한 것은눈치다. 백우진의 기분이 가히 좋지 않음을 단박에 눈치챈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영웅지성은 혈교가 압도적인 힘으로 중원을 침공할 당시에 홀연히 나타 난 영웅의 일대기를 담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화거든…?”

“그래서?”

“현천문은 그 영웅을 도와 혈교를 몰아내는 데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문파 였어.”

지금은 편의상구무림이라불리는 이백여 년 전.

온갖 사술과 강시술로 무장한 혈교의 무리들이 중원을 침공했다.

혈교주라는 압도적인 지도자 아래에 하나로 똘똘 뭉친 혈교는 중원의 문 파들을하나둘씩 접수해 나가기 시작했고, 정파무림의 미래가 바람 앞에 등 불처럼 위태롭게 휘날리고 있을 때.

영웅이 나타났다.

그는 혈교의 무리 가 날뛰 는 곳마다 나타나 한 자루의 검으로 신위 를 선보 이며 단숨에 정파무림의 희망이 되었다.

위풍당당한 그의 뒤에는 언제나 현천문이라는 문파의 무인들이 함께였 다. 들어보지도 못한 문파의 무인들은 구파일방의 제자들을 압도하는 실력 을 선보이며 중원을 지켰다.

“당시 현천문은 구파일방을 뛰 어 넘는 영향력 을 지 니 게 되 었음에 도 불구 하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해.”

권 력과 명 예 에 대 한 욕심 을 뒤 로한 채 그들은 떠 났다. 무림 에 위 기 가 찾아 오고 영웅의 별이 찬란하게 빛나는 날, 다시 나타나겠다는 말과 함께.

구왕수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스로를 현천문의 문주라 칭한 여인 이 입을 열었다.

“맞아요. 저희 현천문은…,모든권력과 명예를등지고, 깊은산속으로들 어갔어요. 또다시 닥쳐올 환란으로부터 무림을 지키기 위해 모습을 감추었 죠.”

언제나 무림을 위협하는 것은 드러난 세력이 아니라 암중에서 힘을 키운 세 력들이 었다. 그렇기 에 현천문 또한 숨어든 것이 다.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위협이 되기 위해.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제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몇 달 전, 영웅의 별이 다시 빛나기 시작했어요.그리고무림에 위협이 찾 아오는 것을 암시하는 적 색 흉성 또한 활활 타오르듯 빛을 내 기 시 작했죠.”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은 그녀의 눈동자는 그 무엇으로도 더럽힐 수 없다 는 듯, 맑고 고고했다.

|  |.

!....

.......

“저는선대들이 그러했듯, 커다란위기가 닥쳐올무림을 구하기 위해 하산 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백우진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바로 당신, 영웅님과 함께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부담스럽 게 쳐 다보는 그녀 로부터 한 걸음 물러 난 백우진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중요한얘기 도중에 미안하지만말이야….”

코를 틀어 막은 채 코맹 맹 이 소리로 그녀 에 게 말을 덧붙였다.

“일단좀 씻고 얘기하지.”

그녀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 무학관은 생도들의 안전과 학습 환경을 위 해 폐 쇄 적 인 분위 기 를 유지 하고 있지만, 아예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다.

꼭 필요한 사람의 경우, 생도의 보증으로 일정 기간 머무를 수 있는 체류 증이 주어진다.

백우진은 그 체류증을 통해 신녀라 자칭하는 여인을 학관 안으로 들였다.

그렇게 안으로 들인 그녀는 곧장 하오문 지부가 운영하는 객잔으로 보냈 다.

잠시 후 찾아갈 테니 몸부터 씻으라는 말을 남기고, 백우진도 기숙사로 돌 아왔다.

“이거 내용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소설을 다 읽어보지 못한 탓에 하나둘씩 변수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물론다 읽어볼걸, 하는후회는하지 않는다.

“더 읽었다간 혈압올라서 죽었을 거야.”

지뢰가 뻔히 보이는데 그걸 밟고 지나가는 놈이 미친놈 아닌가.

“현천문이라….”

과거 영웅이라 불리는 이와 함께 혈교의 무리를 막아낸 문파. 그리고 그 문파의 당대 문주이자 신녀라 칭하는 여인이 자신을 영웅이라 칭했다.

그렇다면 현천문은 마교와의 전쟁에 앞서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안배인 걸까.

“그런 거라면 좋겠는데 말이지.”

어쩐지 느낌이 영 별로다.

욕탕에 서 몸을 씻고 나와 새로운 의 복을 꺼 내 어 입 은 뒤 , 객 잔으로 향했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요!”

낯이 익숙한 점소이가 달려 나와 그를 맞이했다.

“애용하시던 방에 조원분들모두모여 계십니다.”

“괜찮은 술이랑요기가 될 만한 것들 좀 추려서 올려줘.”

“예, 금방해다가 올리겠습니다!”

그에게 은자 한 냥을 건네준 뒤, 조원들과 자주 만남을 가졌던 이 층의 끄 트머리 객실의 문을 열었다.

빈 식탁에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 야기를 나누고 있는 조원들의 모습이 보 인다.

제갈연지의 옆자리가비어 있다. 이쪽을 향해 손짓하는 걸 보면 일부러 비 워둔 듯했다.

“그여인은?

“아직 씻는 중.”

백우진의 물음에 신예화가 대답했다.

“안그래도그여인에 대해 이야기하고있던 참이오.”

장삼이 말을 꺼냈다.

“정말로 현천문일까?”

구왕수가 그에 따른 의문을 던졌다.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표정을 하고 있다.그도그럴 것이, 현천문이 마지 막으로모습을보인 게 벌써 이백 년 전이다.

숲속에서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난 여인이 이제는 동화나 설화 처럼 전해질 정도로 오래된 옛날에 활동하던 현천문의 문주라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기꾼이 라고 하기 에도 좀 이상하고….”

감언이 설로 속속 꼬드겨 야 할 사기꾼이 굳이 이백 년 전의 문파를 들먹 여 지금과 같은 의심을 사는 것도 이상했다.

“당사자한테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

백우진이 말했다.

이번 여정을 통해 한층 더 발전한 감각에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전 해졌다.

똑똑!

“저어…, 들어가도될까요?”

낮에 들었던 여인의 음성이었다.

“들어오시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무척 이 나 아리 따운 여 인이 었다.

새하얀 피부와는 대비되 어 흐르는 윤기 있는 흑발, 맑은 기운이 가득한 자 애로운 눈빛, 건강한 혈기 가 전해 지는 분홍빛 입술.

전체적으로 무슨 얘기나 부탁도 흔쾌히 들어줄 것만 같은 자애롭고, 푸 근한 인상의 미녀.

무엇보다 세상 만물을 포용하고도 그 품이 넉넉하게 남을 것만 같은 압도 적인 풍만함이 잊고 있었던 하나의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마, 마망.’

하마터면 넋을 잃을 뻔했다.

야….

“허어.”

구왕수와 장삼 또한 백우진과 다를 바 없었는지, 고개를 돌린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사내들의 얼빠진 모습에 화가 난 신예화와 제갈연지가 백우진을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졸지에 공격 대상이 된 백우진은 분위기를환기시키기 위해 헛기침을 하 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쪽에 앉으시오.”

“네에, 실례합니다.”

가볍게 웃는 얼굴이 따사로운 햇살 같다.

그녀가 신예화의 옆자리에 앉자,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들려왔 다.

“공자님! 주문하신 술과음식 가지고왔습니다.”

“들어와.”

텅 비어 있던 식탁이 빠른속도로 차오른다.

후각을 열렬히 자극하는 음식들이 하나둘씩 들어설 때마다 신녀의 얼굴이 휙휙 돌아간다.

조금만 더 있으면 침을 뚝뚝 흘릴 것만 같았다.

“소저께선…, 현천문의 문주라고하셨죠…?”

그런 그녀를 향해 제 갈연지 가 물음을 던졌다.

“네,네에…. 현천문의 39대 문주에요….”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하는 신녀.

“저어는…, 영웅님과 함께 세상을 구원 • • ••”

꿀꺽!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는 거야, 꿀꺽하러 왔다는 거야.

보다 못한 백우진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일단밥부터 먹고 천천히 얘기하자고.”

“네에….”

“잘 먹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을 쥐고 식탁을 유린하는 신녀.

한 손으론 젓가락을 쥐고 여러 음식을 집어 들고, 다른 한손으론 큼지막 한 닭다리를 쥐고 뜯어 먹는다.

대체 며칠을 굶은 걸까.

그렇게 온갖 음식들을 모조리 맛본 그녀가 별안간 눈물을 글썽 거리 기 시 작했다.

“너무행복해서 눈물이 나와요…!”

“…….”

왠지 바닷가에서나 맡을 법한 짠내가 물씬 풍겼다.

“우, 울지 말고 많이 먹어요.”

그녀의 옆에 있던 신예화가 따뜻한 말과 함께 등을 토닥여주자 눈물을 그 쳤다.

“•••우리도 일단 먹자.”

텅 빈 식탁을 두 번이나 더 채우고 또 비운 뒤에야 식사를 끝마칠 수 있게 되었다.

세 상 모든 행복을 끌어 안은 듯 웃고 있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아까 했던 소개를 다시 해주었으면 좋겠소.”

“ 아!”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킨 신녀가 백우진을 향해 정 중하게 허리를숙이며 인사를올렸다.

“현천문의 39대 문주이자신녀인 설수연, 영웅님께 인사올립니다.”

스스로 빛을 내 는 듯한 미 소가 백 우진의 뇌 리 를 스치 고 지 나간다.

“ 아.”

떠올랐다.

처음 보았던 그녀가왜 낯이 익었는지.

그해답은 ‘백우진’의 기억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성녀.’

그녀는 자신이 용사라 불리던 시절,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였던 성녀와 매우 유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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