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참전
둘째 도련님이 오셨다!
그 한마디에 구름떼처럼 몰려드는 가솔들.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지만, 낯익은 얼굴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다수가 ‘백우진’이 어렸을 적, 좀처럼 성취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을 돌린 이들이었다.
한 자릿수에 불과한 어린아이가 차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깨닫게 될 정도로 매몰찼던 이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이 몸을 환영하고 있다.
백우진은 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였는가 하면.
‘허참.’
별다른 생각 없었다.
원래 대다수의 인간이 그러하다.
감탄고토(甘呑苦吐),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백우진’은 이들에게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을느꼈다.
배신감과 미안함.
‘웃긴 새끼야, 아주.’
자기들이 멋대로기대했다가 실망하여 뒤돌아선 놈들에게 미안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 백우진의 입장에서 배신감도 딱히 공감이 가는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은 기회 아닌가.
내가 품어야 할 사람과 아닌 사람을 명확하게 가를 수 있게 도와주는데 말이다.
“학관에서의 활약은 전해 들었습니다.”
“정말대단하십니다, 도련님!”
“흐하하하! 어릴 때 보았던 무재가드디어 깨어났나봅니다!”
“첫째 도련님과둘째 도련님 모두 장성하시니, 우리 백가의 미래가 아주 밝습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말들에 백우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짧지 않은 여정을 통해 돌아온 사람에게, 그것도 손님까지 줄줄이 데리고 온 마당에 여독을 풀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지는 못할망정 계속 시끄럽게나 하고 있다.
자기들 기억 속에 있는 순박한 둘째 도련님은 이런 것쯤 웃으며 넘어갈줄 알았던 걸까.
‘확 엎어?’
한 번 시원하게 엎어버릴까 생각하다가 이내 참았다.
어쨌든 오랜만에 돌아온 집인데 첫날부터 서로 얼굴 붉히는 건 면해야겠 다싶어서.
“다들오랜만에 뵈어 기쁜 마음은 이해합니다.허나, 제 뒤에 있는동료들 부터 쉬게 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아이쿠, 이거 참! 손님들을모셔두고실례했네.”
가솔들 중 가장 먼저 반응한 이는 가주와 함께 가문 내의 대소사를 담당 하는 두 총관 중 한 명인 내총관 백명신이 었다.
동시에 가주인 백영학의 동생이며, 백우진에겐 숙부 되는 이였다.
또한 가문 내에서 백무혁과 ‘백우진’을 그저 다 같은 조카로서 베풀어준 몇 안되는 사람중한명이었다.
“자, 조만간 연회를 열 테니 오늘은 이 만들 돌아가시 게.”
백명신의 지휘 아래에 상황이 정상적으로돌아가기 시작했다.
자리를 마련한다는 말에 가솔들은 하나둘씩 발걸음을 돌렸고, 먼발치에 서 구경하고 있던 하녀들은 그의 손짓에 급히 다가와 조원들을 객당으로 안 내했다.
“미 안하구나, 우진아. 내 조원들에게도 잠시 후에 정식으로 사과하마.”
“고맙습니다, 숙부.”
백 우진은 깍듯하게 허 리 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그에 게 물었다.
“아버지는 가주전에 계십니까?”
아무리 좋지 않은사이라곤하나,오랜 여정 끝에 집으로돌아왔으니 인사 는 전해야 했다.
마지못한 그의 물음에 백명신은 고개를 저었다.
“화산파에 가셨다. 최근 혼란스러운 섬서의 상황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 기 위해 화산파에서 섬서 지역 유력 가문과문파들을 모아회의를주최했다.
”
“그렇군요.”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백우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집에 붙어 있는 이상, 한 번은 봐야 하는 얼굴이지 만, 어쨌든 지금은 아 니란 생각에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형님이 오시려면 며칠 걸릴 테니,그동안푹 쉬거라.”
“예,그럼.”
흐뭇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백명신을 뒤로한 채, 백우진은 제 방으로 향했다.
낯설음과 낯익음 사이의 어딘가에서 길을 찾아갔다.
아무리 멸시당해도 집안 둘째 아들이라는 건 확실히 하고팠는지, 백호각 이라 명명한 제법 커다란 전각한 채가그의 거처였다.
“어서오십시오, 도련님!”
덩치가 우람한 하인과 하녀 몇몇이 나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두 처음 보는 이들이 었다.
딱 봐도 백우진의 명성이 귀에 들려올 무렵부터 백호각을 관리하기 위해 고용한 이들이 아닐까 싶다.
“방은 깨끗하게 치워두었으니 편히 쉬십시오.그리고 저녁은 언제쯤….”
“아, 나가서 먹을 거니까오늘은 안차려도돼.”
“옙,그럼 편히 쉬십시오!”
군기가꽉 잡힌 그를 돌려보낸 뒤, 백우진은 메고 있는 짐을 방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흐음.,,
보는 곳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몇몇 기 억에는 신예화와 유화연의 모습도 함께였다.
“새끼가 어릴 때부터 발랑 까져선.”
남녀칠세부동석 이 라 했거늘, 여 인을 둘이 나 제 방으로 들이 다니!
“에휴.”
평소였으면 그냥 넘기고 말았을 기억들이 지금은 조금 괴롭게 느껴졌다.
기 억속에서 밝은 미소를 짓고 있는 유화연과 신예화.
이 두 사람의 존재가, 이곳에서는그 어느 때보다크게 부각된다.
느릿하지만 착실하게 따라붙는 기억들을 떨쳐내기 위해 방을 나서는 백 우진.
“나갔다 올게.”
“다녀오십시오, 도련님!”
대문 밖까지 나선 그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 대로변의 풍경을 눈으로 살폈다.
백 가가 자리 잡을 때만 해도 작은 고을에 불과했던 백하현은 백 가와 함께 성장을 거듭하여, 이제는 섬서를 대표하는 지역 중 하나가되 었다.
수십의 인파가 거니는 대로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 윽고 그가 도착한 곳은 제 법 한적 한 곳에 위 치 한 작은 구멍 가게 였다.
“어서옵셔.”
코 옆에 커다란왕점을 갖다붙인 사내가 인사를 건네왔다.
백우진은 사천에서와 마찬가지로 패 하나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를본 사내의 눈이 점점 커졌다.
“아이고, 제 가 중요한 손님을 몰라뵀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제 뒤 편에 위 치한 커다란 상자를 옆으로 쭉 밀어내 더 니 마루로 되 어 있는 바닥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계단이 드러났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지 하를 참으로 좋아하는 녀 석들이 다.
익숙한 것 투성 이 였다.
익숙한 계단, 복도, 끄트머리의 방.
“어서오십시오. 백하지부장입니다. 흑구(黑九)라 불러주십시오.”
심지어 익숙한 이름까지.
자리에 앉은 백우진이 그에게 물었다.
“부탁한 정보는?”
“취합해 두었습니다.”
그는제 발아래 서랍을 열어 두툼한종이뭉치를 꺼내어 백우진에게 건네 주었다.
........
학관의 지부장에게 미리 부탁해둔 섬서성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섬서성이 그려진 지도 위로 장보도가 처음으로 나타난 위치부터 시작하여 어디서 누가 빼앗았고, 또 누가 빼앗겼는지 그 경로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 다.
“이 장보도 말이야.”
“예.”
“누가 정보를 퍼뜨린 거지? 원주인은 꽁꽁 숨기려 했을 텐데.”
보물 지도를 품에 넣고 있는 이가 자신의 입으로 이에 대해 떠벌리고 다닐 리가 없다.
흑구는 고개 를 저 었다.
“저희도 알아보려 했습니다만, 출처를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으
O •
출처 가 불분명하다.
백우진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너무나도 공교롭지 않은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개떼처럼 몰려와 섬서 일대 를 혼란에 빠트린다는 것이 말이다.
종이 뭉치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백우진의 얼굴은 소태를 씹은 것처럼 일 그러져갔다.
“완전 개판이구만.”
개판이 라는 말밖에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 다.
이 를 중재 하기 위 해 무림 맹 과 사흑련은 각각 청 룡단과 흑풍대 를 출격 시 켰다.
그들의 출격 소식이 장보도 쟁탈전에 참여하고 있는 무인들에게도 전 해졌다.
그 결과.
“더 미쳐날뛰고 있네.”
처음에 는 그래도 눈치 가 보였는지 밤에 만 이루어 지 던 살인 이 , 이 제는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청룡단과 흑풍대가 도착하는 순간, 자신들에게 혈수마녀의 유산을 습득 할 확률이 하염없이 줄어든다는 것을 말이다.
‘이걸어쩐다….’
최 악의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
만약 이 모든 난리가 마교의 철저한 준비로부터 이루어진 계략이라는 가 정.
‘장보도는 진짜일 확률이 높겠지.’
장보도가 가짜라면 그것이 밝혀지는 순간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이유 가사라진다.
그러니 장보도에 표시된 지 역에는 무엇이 되 었든 존재할 확률이 높다.
‘그때부터 더 큰혼란이 벌어질 테고.’
이 미 적 잖은 피 가 흘렀지 만, 냉 정하게 얘 기 하면 이 것은 식 전 행 사에 불과 하다.
정파와 사파를 대변하는 무림맹과 사흑련.
그리 고 그들이 자랑하는 무력 단체 인 청룡단과 흑풍대 가 이 곳으로 오고 있다.
중재,라는 평화적인 말을 사용하긴 했지 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동일할 터.
‘서로 가지려 하겠지.’
혈수마녀는 정확한 근원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단은 정사지간의 무인이 라고 봐야했다.
정사의 고수 수십을 손쉽게 해치운 그녀의 무공이 어느 한쪽으로 넘어간 다면.
그로 인해 정파를대표하는존(尊),사파에서 황(皇)이나제(꽃)의 별호를 지닌 절세의 고수가 더 나타나게 된다면.
서로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는 세력 구도가 한쪽으로 치우쳐질 것은 자 명한일이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이 완전히 사라져야만끝나는 최악의 전쟁이.
물론 어느 정도 비약이 섞여 있는 가정이 다.
두 단체의 대표들도 머리가 있고, 보좌하는 이들도 수두룩한데 마교의 침 공을 떠올리지 못하는 바보들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문제가되는 거지.’
반대로 생각하면 마교의 입장에서 그들이 안 싸우면 싸울 때까지 기다려 주겠냐는 거다.
이미 세력 구도도 망가뜨려 놨겠다,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양쪽에 심어둔 간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할 터다.
‘장보도가 나타난 이상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장보도를 탈취하여 태워버릴까 생각도 해보았다.
한 장만 있을 리 가 없지.’
사라진 장보도를 대신할 또 다른 복사본이 나돌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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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거 다 마교놈들의 소행인 거 아시죠오오!,라고 외쳐봤자 장보 도 노리려고 잔꾀 굴리는 놈 취급받을 테니.
아무리 생 각해도 방법은 하나 뿐이다.
‘내가 먹자!’
가장 깨끗한 내 가 먹는 수밖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