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蓬 허심탄회(獸心褩꺼)
정파와 사파. 그리고 정사지 간의 무인들.
그들 중 장보도를 손에 넣는 자가 누구든, 혼자서 유유히 혈수마녀의 유산 을 습득할 수는 없는 상황이 다.
정파가 장보도를 손에 넣으면 사파는 이를 훼방 놓으며 함께 찾자고 제안 할 것이고, 반대 가 되 어도 상황은 똑같을 것이다.
어느 편도 아닌 개인이 장보도를 습득했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에 불과한 이가 양대 세력의 거센 압박을 버틸 수 있을 리 없을 테니.
‘이 판에 끼기 위해선 장보도를 가진 자가되는 수밖에 없다.’
최근 백우진의 명성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당가에 숨어든 마교도를 색출하는 데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정파의 홍복이라는 말까지 듣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후기지수에 불과한 수준.’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그들을 찾아가 한 손 거들고 싶다고 말한들, 그들이 끼워줄 리가 만무했다.
그렇기에 장보도를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아주 자연스럽게 판에 끼어드는 것은 물론, 이를 빌미로 두 세력 사이를 중 재하는 것 또한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현재 장보도의 위치는?”
백우진의 물음에 흑구가 답했다.
“청청현입니다.”
장보도의 경로가 어지러이 그려진 지도에서 청청현을 찾아손가락으로 짚 었다.
신법을 운용하면 반나절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문제 가 하나 있다면.
‘화산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네.’
화산파의 권역이나 다름없는 화음현과 청청현은 고작 한 시진 거리에 있 다는 점이다.
하오문이 이토록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는 정보를 개방이 모를 리가 없을 터.
개방으로부터 소식을 전달받은 화산파는 제자들을 내려보내 이 소란을 잠재우겠다는 명목으로 장보도를 손에 넣으려 할 것은 자명한 일.
그렇게 되면 지금 생각해둔 방법들이 모두 허사가 된다.
‘그럴 수는 없지.’
종이 뭉치를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나는 백우진.
“정보잘 받았어.”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깍듯하게 대답하는 흑구.
“보답은 언젠가받게 될거야.”
당가만큼은 아니지만, 백우진 또한은원에 철저한 편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인사를 마친 뒤, 곧장 밖으로 나섰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휘황찬란한 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조원들은….’
조원들을 데려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사람이 많을수록주변의 눈에 더 띄기 쉬운법이다.
‘반나절 거리니까.’
허 리춤에 차고 있는 검과 호리병이 면 충분했다.
‘그럼 바로 출발을….’
백우진이 곧장 신법을 운용하려 할때.
“우진아...?”
“가…, 백공자?”
익숙한 두 개의 맑은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빳빳해진 목을 억지로 돌렸다.
신예화와 유화연.
이곳에 있어선 안될 두 여인이 대로변에 나란히 서서 이쪽을쳐다보고 있 었다.
“너희가왜 거기서 나와…?”
…
야심한 밤.
달빛조차 들이치지 못하는 울창한 산속을 달리며, 백우진은 생 각했다.
‘망했다.’
좌측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짧은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따라붙는 신예화가 보인다.
이번에는 우측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 럼 자꾸만 치솟는 입꼬리를 모르는지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달리는 유화연이 보인다.
‘시발.’
우연도 이런 지독한 우연이 있을 수가 없다.
그 넓은 지역에서, 하필 그곳에, 심지어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세 사람이 모일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아는 공대생이 있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을 정도.
신예화는 섬서백 가와 마찬가지로 백하현에 자리 잡은 본가 신가장에 들렀다 오는 길 이 라 했고, 유화연은 심 신을 달래 려 본가에 들렀다가 섬서 에 서 벌어지고 있는 장보도 쟁탈전에 대한 이 야기를 듣고 이곳으로 왔단다.
‘개 같은 장보도.’
어떻게든 그녀들을 떼어내려 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았다.
데리고 갈 생각이 전혀 없다고 선빵을 쳤더니 신예화가 마음대로 하란다.
그래서 마음대로 청청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따 라오고 있다.
속도를 내 어 거 리 를 벌려도 의 미 가 없었다.
화경에서 가능한초상비의 경지가 아닌 이상 신법을 운용하면 흔적이 남 는다.
학관에서 색적술을 배운 두 사람은 그가 남긴 족적을 쫓아 꾸역꾸역 따라 왔다.
“후우.
결국 꼬리를 단 채로 청청현에 다다랐다.
그리 크지 않고, 고요한 동네 임에도 불구하고 바라보고 있으면 불길한 느 낌이 팍팍꽂힌다.
안으로 들어서자 곳곳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애 써 숨을 죽이고 먹 잇감을 노리 는 맹수와 비슷한 느낌 이 다.
“백 공자….”
유화연 또한 곳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꼈는지 불안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모르는 척해.”
“.•.네.”
숨어 있는 이들 중 일부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 있다.
혹여 경쟁자가될지도 모를 이에 대해 미리 파악해두기 위한느낌.
“어디 보자....”
백우진은 기감을 넓게 펼쳤다.
초절정에 오르면서 보다 촘촘하고 넓어진 그물망이 곳곳에 숨어든 쥐새 끼들을 모조리 파악했다.
“어디 있으려나.”
청청현에 장보도의 주인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아마 이곳에 먼저 온 이들은그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파악해둔 채 틈을 노 리고 있을 터.
‘그럼 쉽지.’
그런 상황에 서 장보도의 주인 이 있는 위 치 를 특정하는 것은 무척 이 나 쉬 운일이었다.
가장많은무인들이 숨어 있고, 시선이 몰려 있는곳이 정답일 테니.
“오, 저긴가.”
그것들이 가리 키 는 곳은 한 객 잔이 었다.
밤이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객잔의 불빛이 여전히 밝았다.
안으로 들어 서 려 하자 곳곳에 서 살기 가 쏟아졌다.
경고였다.
이곳에 들어가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살해 협박.
“허허.”
우스웠다.
객잔 안으로 들이닥칠 용기는 없고, 누군가 먼저 일을 벌이 길 기다리 다가 쥐새끼처럼 장보도만 훔쳐볼 요령으로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
“같잖게.
초절정에 오르면서 변화한 것은 육신뿐만이 아니었다.
기의 수발 또한 절정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워 진 상태
단전에서 체외로 방출된 기의 줄기들이 자신에게 살기를 쏟아내던 녀석 들에게 정확히 날아갔다.
“크헉!”
“케 흑!
털썩 ! 털썩 !
단말마의 비명을 토해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쥐새끼들.
물리적인 충격은 아니 었다.
단지 기에 살기를 실었을 뿐.
그조차도 버티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약해 빠진 녀석이라는 증거밖에 되지 않았다.
“지,지금뭘한 거야…?”
“백 공자, 설마….”
뒤 따르던 두 여인의 눈동자가 휘 둥그레졌다.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몰라서 되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사용한 수법이 절정의 경지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고명한 수법이 었 기에.
백우진은 그녀들의 물음에 대한 답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내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이곳에 모인 이들의 경지는 다양했다.
낮게는 이류부터, 높게는…, 초절정까지.
그녀들의 실력 이라면 쉽게 당하지 않겠지만, 수가 워 낙 많으니 눈 먼 칼에 맞아 크게 다칠 위험도 존재했다.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겁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 객잔주의 모 습이 보였다.
“어, 어, 어서 오십시오….”
객잔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많으면 시끌벅적하기 마련인데, 이곳은 오로지 술 따르는 소 리만 들려왔다.
이들때문이리라.
객잔주가 저리도 겁을 집어먹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어휴, 벌떼같이 몰려들었구만.”
객잔에 울려 퍼지는 나지막한음성.
오직 술 따르는 소리 만 들려 올 정 도로 고요한 공간에 서 퍼 진 음성 을 듣지 못한이는 없었다.
어떤 이는무시했고, 어떤 이는 발끈했다.
그러나 째려보는 이는 있어도 나서서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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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면면을 살피며 백우진은 빈 자리로 가 앉았다.
살벌하게 술만 마시고 앉아 있는 무인들 사이를 지나온 객잔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무, 무얼 드시겠습니까.”
“여기서 자랑하는 술과 음식으로 부탁합니다, 주인장.”
아, 그리고.
백우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저기에 앉은 살벌한 작자들과는 달리 좋은 사람이니 긴장하지 마 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은자 몇 냥을 꺼내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는 차마 대 답하지 못하고 인사만 꾸벅 건넨 뒤 , 곧장 주방으로 달려 가 사라졌다.
백우진의 두 번째 도발에 발끈하여 몸을 움찔거리는 이들이 속출했다.
몇몇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만류하는모습도 보였다.
“쩝.”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백우진.
그런 그를 보며 신예화와 유화연은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남에게 쓴소리 한 번 제대로 내뱉지 못하던 유약한 그가, 지금은 저 많은 무인들을 상대로 과감한 도발을 선보이고 있다.
‘그렇게나 변하셨네요.’
예전에 알던 백우진은 죽었다는 말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이해할수 없었던 말이, 지금은 어째서인지 이해가 갔다.
그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 면서도, 또 한편으론 애달프게 만들었다.
“여,여기 술과 안주 가져왔습니다.”
여전히 떨림 가득한 모습으로 다가와 술과 안주를 내려놓고 금세 사라지 는 객잔주.
백우진은 창문 너머로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밤이 깊다.
“좋아, 이렇게된거.”
백우진은 술병을 들어 그녀들의 앞에 놓인 술잔에 따라주었다.
“우리 얘기 좀해보자고.”
“무슨 얘기…?”
신예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얘기긴.”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이 답답하고 꼬인 관계를 어떻게든 정리해보자, 이 거야.”
술잔을 들어 올리는 백우진.
“복잡하게 하지 말고, 딱 한마디로 본인의 심정을 얘기하자고.”
술잔을 입에 털어 말끔히 비워낸 그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말 을이었다.
“너희들이 알고 지내던 백우진은 죽었다.”
그런고로.
“난 너희에게 우정을 줄 순 있어도 애정은 줄 수 없다, 이상 끝.”
이제 내 차례는 끝이야.
다음은 누가 말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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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잔에 앉아 있던 수많은 무인들은 귀를 쫑긋거리면서도 그들의 이야기 에 아무런 관심 없는 척, 술잔을 들이켜며 속으로 확신했다.
‘저 새끼는또라이가분명하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