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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속 주정뱅이가 되었다-123화 (123/215)

<123 화〉유인

일촉즉발의 상황.

삼 인의 매화검수 중 첫째, 만운이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한껏 기세를 피어올리며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았다.

‘낭패로군.’

상대의 도발적인 언행에 화가 나 권주니, 벌주니 마음대로 떠벌리기는 했 으나, 실상 상황이 좋지 않은 쪽은 바로 자신들이 었다.

백우진이 만들어낸 가짜 흔적 에 속아 엄한 곳으로 달려간 어중이 떠 중이 들을 제외 한, 한가닥 하는 고수들의 숫자가 총 열넷.

그중 자신 그리고 사형제들을 제외하면 열하나.

‘그들 모두가 적이다.’

그중 눈앞의 젊은 사내와 우측에 서 있는 흑색 장삼을 입은 노인.

다른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라면, 그들이 자아내는 기세는 높은 곳에서 굉음을 토해내며 추락하는 폭포였다.

‘적어도 나와 동급…, 아니면 그 이상이다.’

스스로 말하고도 어 이 가 없을 지 경 이 다.

서른다섯에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힘입어 초절정에 오른 만운.

그것만으로도 사문인 화산파의 장로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연회를 벌 일 정도였는데, 저 스물 남짓한 젊은 사내가 자신과 비슷한 기세를 흘리고 있 다.

‘저 사내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괴물이라 불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저 사내의 정체가, 그는몹시도 궁금 했다.

“흘흘흘!”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싸움에 잔뜩긴장된 분위기가 흐르고 있을 때.

우측에 서 있던 흑색 장삼을 걸친 노인이 요상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다가 왔다.

“젊은친구의 기세가정말대단하구먼.”

노인은 백우진을 보며 인자한 미 소를 지 어 보였다.

“이보게,젊은친구.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은듯한데 나와손을 잡는건 어 떠 한가.”

겉으로는 인자한 척 웃고 있는 노인은 속으로 이 판을 어떻게 쉽게 무너뜨 릴 수 있는가에 대한 계산을 거의 마쳐둔 상태였다.

‘요주의 인물은 저 젊은 친구와매화검수 뿐.’

이곳에 모인 이들 전부가제 실력에 제법 자신이 있는 이들이기는했으나, 노인은 저 둘을 제외한 모두가 덤벼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허나 그랬다간 죽 쒀서 개 주는 꼴밖에 되 지 않는다.

무사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위 험 인물로 지 정한 대상 중 하나와 손 을 잡는 것이 가장 쉬운 길임을, 그는 어렵지 않게 생각해냈다.

그중 하나를 택하는 건 무척이 나 쉬 웠다.

‘아무리 그래도 내 정파놈과 손을 잡을 순 없지.’

노인은 사흑련 소속의 무인이 었다.

그런 만큼 화산파의 매화검 수와는 손을 잡으려 야 잡을 수 없는 사이 였다.

“자네와 내가손을 잡는다면 저들 모두가 달려들어도 이길 수 있지 않겠 나.”

“흐음.

의심쩍은 눈빛으로 노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백우진.

그러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노인을 향해 가라는 식으로 손을 휘저 었다.

“영감님, 좋은 말로 할때 그냥 가쇼.”

“무, 뭬야?”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몸이라도 성해야 하지 않겠냐고요.”

노인의 깡마른 얼굴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이놈이…!”

처음이었다.

자신을 뒷방 늙은이 취급하는 놈은 말이다.

“네놈의 버릇을 고쳐주겠다, 이노옴!”

화가 단단히 난노인이 걸치고 있는 장삼을 펄럭이며 허리춤에 차고 있는 얇은 칼에 손을 가져갔다.

노인은 양다리를 넓게 벌리며 자세를 최대한 낮춘 채로 백우진을 노려보 았다.

땅에 닿을 듯, 말듯한 발도 자세.

이 를 알아본 한 고수가 놀란 목소리로 외 쳤다.

“이,일섬필혈(一閔必血)!”

일섬필혈 잔추.

그는 사흑련이 자랑하는 고수 중 한 사람으로, 특유의 낮은 자세 에 서 펼치 는 발도술은 가히 무림의 일절이라 칭하기에 부족함 없는 기예로 칭송받고 있었다.

일섬필혈이 라는 별호 또한 검이 빛을 내뿜으면 반드시 피를 본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었다.

“흑풍대가 벌써 섬서에 들어왔단 말인가!”

“이런 제길!”

또한 그는 사흑련이 출격시킨 흑풍대의 부대주였다.

백우진 또한 그 이름을 기 억하고 있다.

하오문으로부터 장보도 쟁탈전에 대한 정보들 사이에 끼어 있던 흑풍대 와청룡단에 대한 정보속에 들어 있던 이름이었다.

“자세를 잡거라. 안 그러면 네놈의 목이 달아날 게다.”

노인, 잔추가 경고했다.

그는 백우진을 죽일 생각까지는 하고 있지 않았다.

고작 스물 남짓한 나이에 초절정에 오른 괴물 중의 괴물 아닌가.

훗날 녀석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궁금해진 탓이다.

‘정파 놈이었다면 가차 없이 벴을 테지만.’

정파 무림의 대 들보인 화산파와 반목하는 것을 보면 정 파와는 거 리 가 먼 녀석일 터다.

‘오만한 성격을 고쳐주마.’

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탓에 오만해진 성격을 바로잡아주는 정 도로 끝내리라.

그가 재 차 소리 쳤다.

!....

!..

........

“어서자세를 잡으라니까!”

이 어지는 경고를 들은 백우진의 다음 행동은 모두의 눈을 의심케 했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는가 싶더니, 검이 아닌 호리병을 꺼내어 그 안에 든 것을 입으로 들이붓는 게 아닌가.

희 미한 냄새 가 퍼 지는 걸로 미루어 보건대 , 그것은 분명 술이 었다.

“이,이놈이?”

분노가 극에 달하자 이 제 는 황당할 지 경 이 다.

그때, 백우진이 밉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잔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영감, 계속그러고 있으면 허리 굽어요.”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할 텐데 허리라도 온전하셔야지 .

그 말은 애초부터 그리 깊지 않은 잔추의 인내심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 게 만들었다.

훗날이고 뭐고 이놈의 목을 베 어 노인공경의 본으로 삼으리라!

“ 카아앗!”

귀를 찌르는 괴성과 함께 노인의 칼이 검집을 벗어나세상 밖으로 튀어나 왔다.

일섬필혈이라는 별호를 도박장에서 따낸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 칼날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고, 그 자리를 대신한 섬뜩이는 한줄기 빛살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칼날이 지나가는 모양이 땅 밑을 날다가 급선회하여 허공으로 솟구치는 제비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연섬 (燕쪅).

지금까지 제 앞을 가로막은수많은 적들을 양단한그의 성명절기가.

카아앙

“••••••!”

무참히 깨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공경이 라곤 씨가 말라버린 싸가지 없는 젊은 사내 놈에의해.

자세를 바로잡은 잔추는 허망한 눈으로 제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사흑련주에게 하사 받아 무려 수년을 함께해온 검이 반으로 똑 부러졌다.

언제 뽑아들었는지도 모를, 젊은 놈이 쥐고 있는 검에 의해서.

“허,허허.”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고 했던가.

본디 무공이란 오래 배울수록 더 잘하고, 고강한 법이라 여겼건만.

잔추는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넣었다.

“•••내가졌네.”

조금 전까지 만 해도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던 상대 에 게 허리를 숙이는 잔 추.

패배를 인정한 것이다.

“자네 가 오만하다 생 각했는데 아니 었어. 오히려 오만한 건 나였던 것 같군

” •

“엄….”

백팔십도로 바뀌 어버린 잔추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빨리 끝내고 싶어서 일부러 노인들이 듣기 싫어할 만한 말들만 골라서 한 거였는데.

“내 목숨은 자네의 손에 달려 있네. 자네가 원한다면 난 겸허히 죽음을 받 아들일걸세.”

홀가분해진 표정, 말투와는 반대로 노인의 눈빛에는 여전히 삶에 대한 의 지가 충만했다.

“허나, 가능하다면 한번만 살려주게.”

그는 재차 허리를 숙였다.

오직 제 명줄을 위해 자존심을 버린 모양새는 아니 었다.

“꼭 지켜야만 하는 이가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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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우진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영감.”

분명 그가 처음에 했던 말은 좋은 말로 할 때 가라는 말이 었다.

고개를 든 잔추가 어색하게 웃었다.

“•••고맙네.빚진 목숨값은 어떤 식으로든 갚겠네.”

백우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영감,그 말 잊어선 안될겁니다.”

“아,알겠네.”

“그럼 얼른 가쇼.”

“그,그럼 이만가보겠네.”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신법을 운용하여 빠르게 멀어져가는 잔추.

그런 노인을 보며 백우진이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사흑련에서 내보낸 흑풍대의 부대주의 목숨값이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만, 그 정도면 아주 훌륭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흑풍대 가 대 기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 가는 잔추는 이유 없이 돋는 소름 에 몸서리를 쳤다.

장보도 얻을 생각으로 자신만만하던 무인들의 얼굴이 급변했다.

“이, 일섬필혈을 일격에 물리치다니.”

“검을 언제 뽑았는지 보지도 못했어 ….”

모두가한가락하는 제 실력만 믿고 이곳에 남아 있던 이들이었다.

절세의 무공이 아무리 가지고 싶다고 한들, 제 목숨이 달아난 이후라면 무 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 난빠지겠어!”

“제길!”

“•••나도 물러나겠어.”

매화검수 셋을 포함한 총 열셋의 무인들 중 아홉이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이 자리에 남은 것은세 명의 매화검수와백우진,그리고제 키만한대도 를 등에 메고 있는 사내가 전부였다.

백우진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묘한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 를 향해 물었다.

“너도 빨리 정해. 덤빌 거면 덤비고, 아니면 꺼지고.”

그가 종용하자, 사내는 시선을 내 리 깐 채 제 손을 쥐 락펴 락하다가 이 내 고 개를 저었다.

그리고선 등을 돌려 천천히 멀어져갔다.

“뭐야, 저건.”

생긴 것만 봐선 다짜고짜 대도를 휘두르는 광전사 같은데, 하는 행동이 굉 장히 이성적이다.

숲속에 적막이 찾아왔다.

만운은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듯, 검을 곧추세운 채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 다.

서서히 분위기가 고조될 즈음.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형!”

매화검수들 중 가장 막내인 정운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멈춰 세웠다.

“무슨일이냐, 사제.”

일순간 집중력 이 흐트러진 만운이 짜증 섞 인 목소리로 되 묻자, 정운은 굳 은 얼굴로 걸어 나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았다.

“제 기억이 맞다면…, 저희는저분과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뭐라?

“처음엔 저도 긴가민가했습니 다만…, 이제야 비로소 생 각이 났습니 다.”

정운은 등을 돌려 백우진을 바라보았다.

“옥면신룡소협, 맞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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